설교

불가능한 것을 실현하라는 신앙의 요구 - 로마서 12:9~21[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1-20 14:20
조회
38046
2019년 1월 20일(월)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불가능한 것을 실현하라는 신앙의 요구
본문: 로마서 12:9~21



신앙은 그저 마음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고 삶의 윤리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역설했던 바울은, 그러기에 끊임없이 윤리적 권면 또한 역설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로마서의 본문말씀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를 역설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은 구체적인 공동체의 상황에 대응하여 변화무쌍한 언어로 이런저런 권면을 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이 그저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어의 편차가 없지는 않지만, 대체로 일관된 신학적 입장에 따라 구체적인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로마서의 본문말씀은, 여기저기 서신에서 말했던 내용을 정제된 형태로 정리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울이 다른 교회공동체에 보낸 서신의 경우는 스스로 공동체를 세웠거나 방문하고 지도한 적이 있어 그 상황을 알고 있고, 그런 만큼 구체적 사안에 대한 권면을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교회공동체에 보내는 편지로서, 바울이 아직 로마교회에 방문해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전한 편지입니다. 그러기에 이 서신은 일종의 자기소개서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고, 그런 만큼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담담하게 정리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은 크게 보아 두 가지 차원으로 나뉩니다. 9~13절은 주로 공동체 내부를 겨냥한 생활윤리를 말하고 있고, 14~21절은 공동체 외부, 그것도 심지어는 적대자들을 유념하는 가운데 지켜야 할 그리스도인의 생활윤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윤리적 권면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적 기초는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육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 열심을 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며, 환난 가운데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십시오. 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십시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윤리적 덕목을 말할 때 많은 경우 당시 그리스-로마세계의 윤리적 덕목, 스토아철학의 윤리적 덕목을 수용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수용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관점에서 수용하고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것 가운데 하나가 모든 윤리적 덕목의 기초로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궁극적 지평을 함축하는 동시에 구체적인 인간관계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바울의 임의적인 주장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서 그것이야말로 가장 근본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첫 대목에서 그 사랑은 단순한 어떤 감정의 상태를 넘어 모든 관계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이 말씀은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그대로 연상시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맹목적 감정이 아닙니다. 방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명백히 진리와 함께 하는 것이고, 불의와 악에 분노하고 선을 굳게 붙잡는 것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여러 가지 구체적인 권면으로 이어지지만 그 요체는 이렇게 집약됩니다. 주님을 온전히 섬기라는 것, 그리고 성도들을 돌보라는 것으로 집약됩니다.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으로,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을 섬길 뿐 아니라, 나아가 곁에 있는 형제들을 존중하고 아주 구체적으로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고, 여행하는 성도들을 잘 대접하라고 합니다. 구약성서에서의 가르침,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여기서 다시 한 번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이 권면을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보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그래야 하고, 나도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겠다 하고 다짐할 만합니다. 가능성의 윤리입니다.

그런데 권면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보기에 선한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였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것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이 말씀을 들으면 그 느낌이 어떻습니까? 옳은 말씀인 것 같기는 하지만, 과연 가능할까요? 이런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불가능성의 윤리입니다.
이 권면 역시 사랑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은 본문의 내용 자체로 분명히 드러납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 하지 마십시오.” 이 말씀은 바울이 말하고, 이미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의 실체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는 것은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공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황금율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모든 위대한 정신세계가 가르치고 있는 그 태도가 어떻게 가능한지 분명한 어조로 말합니다.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는 태도에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굳이 줄여 말하면 ‘겸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그 겸손의 미덕은 그리스도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유대교나 그리스-로마의 가르침에서는 권장되지 않은 미덕이었다는 점입니다. 유대교에서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강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관념이 강했고, 그리스-로마세계에서는 그것이 노예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지 자유인에게는 어울리지 않은 것이라는 관념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강조합니다. 물론 그 역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바울의 깨달음에서 비롯됩니다.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적대자들을 향할 때에도 그와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했던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울에게서 이와 같이 변용되고 있습니다. 흔히 오해되고 있듯이 그것은 불의에 대한 분노를 접으라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며, 불의와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할지언정 저주하지 말라고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합니다. 불의와 악을 미워하기에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은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악을 척결하겠다는 것이 더 큰 악을 만들어내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적 차원에서 또는 개인적 차원에서 경험합니다. 그 악순환을 넘어서기 위한 길로서 원수들을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까요? 흔히 말하기를 죄는 미워할지언정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말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바울 역시 그 불가능성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할 수 있는 대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당장 그렇게 하기 쉽지 않지만, 그렇게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바울은 다시 강조합니다. 원수 갚는 일을 스스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라 합니다. 심지어는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것이 될 것이다”(잠언 25:21~22). 여기에 머리 위에 숯불을 얹는다는 것은 언뜻 보기에 ‘뜨거운 맛을 보여준다’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은 고대 근동, 특히 이집트에서 참회의식을 유념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참회할 때 그 표시로 머리에 숯불을 얹는 관습을 말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는 행위를 보며, 원수가 참회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라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들에게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는 항변과 탄식이 나올 법합니다. 선의를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벌어지는데, 악의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선의를 베풀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교훈은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바라는 궁극적 교훈으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덕목을 실천할 때 우리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실천하고자 할 때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진정한 초월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가능한 것만 하고 산다면 우리에게 새삼스러운 어떤 목표가 필요 없습니다. 지금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마땅히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키는 데 절실히 요구되는 것, 그것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여정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 역시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윤리를 극한으로까지 확장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망상이 아닙니다. 그 통찰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성찰의 핵심은 자신의 고통에 대한 성찰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타인, 심지어는 적대자에게까지도 확장될 때 진정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기왕에 자신들의 범위에 있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공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신앙의 위대함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우리 교회는 우리 교회를 찾은 손님들을 정성으로 대접하였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시행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사회선교사 제도를 시행하기 위한 첫 단계로, 사회선교사 신규교육 과정에 참여한 지원자들과 운영에 책임을 맡고 있는 관계자들이 2박3일간 우리 교회에서 함께 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도움을 주신 교우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과연 ‘살림’교회가 맞다”고 했을 때 기쁨이 컸습니다.
그 일정이 끝나고 다음날 17일(목) 아침 저는 서울에 가서 청와대 앞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관계자들과 더불어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 사망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그리고 비정규직 철폐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어 오후에 기독교회관 한국기독교회협의회 총무실에서 김용균씨 어머니와 만나는 자리에 함께 하였습니다.
김용균씨 어머니는 내내 눈물을 머금은 채 절절히 호소했습니다. ‘그 예쁘고 착한 아들 용균이가 죽은 바로 그 자리에서 먼저 이미 11명이 죽었다. 이건 연쇄살인 아닌가. 회사가 원망스럽고 나라가 원망스럽다. 용균이에 앞서 11명이 죽었는데도 그냥 넘어간 가족들도 원망스럽다. 누군가 나서주는 분들이 있었더라면 용균이는 죽지 않았을 텐데... 처음에는 누구도 믿을 수 없었지만, 함께 해주시는 분들이 있어 여기저기 호소하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아들은 갔지만, 더는 다른 이들은 저 같은 아픔을 겪지 않고 살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도움을 바란다.’ 이런 취지의 간절한 호소였습니다. 그 마음 충분히 공감한다며 같이 뜻을 모으자고 하면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어머니의 절절한 호소를 들으면서,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로서, 유족으로서 한계를 넘어서는 어머니의 모습을 봤습니다. ‘회사가 원망스럽고, 나라가 원망스럽고, 이전 희생자들의 가족이 원망스럽다.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자식들이 그런 험한 일을 당해봐야 안다.’고 했을 때, 오히려 한 어머니로서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그분의 모습을 봤습니다. 그 원망은 그저 한 개인으로서 삭여야 하는 탄식이 아니라 사회를 향해, 세상을 향해 외치는 절절한 호소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들은 갔지만, 더는 다른 이들은 저 같은 아픔을 겪지 않고 살기를 바란다.’고 했을 때, 그분의 목소리는 지금까지의 모든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의 원한까지도 풀고자 하는 결의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 원망이 탄식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원망을 쌓이게 만드는 사회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결의로, 세상을 향한 외침으로 바뀐 것입니다. 기존의 상식으로 볼 때 불가능했던 것이 가능한 것으로 바뀌는 전환입니다.
일찍이 민중신학자 서남동 목사님은 ‘한(恨)과 단(斷)의 변증법’을 이야기했습니다. 민중의 쌓인 한이 증오와 보복의 악순환이 아닌, 세상의 변혁을 위한 원동력이 되는 이치를 말한 것입니다. 쌓인 한에서 비롯되는 악순환을 끊는 ‘단’(斷)은, 쌓인 한을 안으로 삭이는 것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원한을 낳는 사회구조를 진정으로 변화시킬 때만이 악순환의 ‘단’(斷)은 비로소 가능합니다. 서남동 목사님은 교회가 한의 사제로서 바로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초월의 경험은 단지 내면에서 일어나는 어떤 실존적 사건이 아닙니다. 사람들과의 일상적인 삶의 관계 안에서, 역사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저 한 개인으로 머물러 있던 사람이, 그저 나만의 일상적 행복만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있던 사람이, 나를 넘어서는 세계를 발견하고 모두가 더불어 진정한 삶을 누리는 희망을 발견할 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김용균씨의 어머니는 광장에서 외쳤습니다. “내 아들 하나 예쁘고 착하게 키워놓으면 뭐합니까? 그렇게 허망하게 죽어가는데...”

사회가 그 호소에 응답할 때, 교회가 그 절규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불가능을 넘어서는 희망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조금씩 바뀌어나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 진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일깨워 준 그 진실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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