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형제자매의 사랑, 환대의 윤리 - 히브리서 13:1~3[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7-26 17:22
조회
34241
2020년 7월 2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형제자매의 사랑, 환대의 윤리
본문: 히브리서 13:1~3



신약성서 가운데서 최고 수준의 헬라어를 구사하는 히브리서는 유대인의 전통에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제사 종교로서 유대교의 전통에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화해자로서 진정한 제사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그 의도는 단지 제사의 의미를 알기 쉽게 풀어 해설하고자 한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의미가 어떻게 우리의 삶 가운데서 구현되어야 하는지를 말하려는 데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그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더 깊은 내적 동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내적 위기에 응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무엇을 믿는 것인지 혼란스러워하고 회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믿음을 역설하고자 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뚜렷한 제의의 형식을 갖추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것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만 다른 사람들과 구별될 뿐 그것이 일상의 삶에서 갖는 의미를 실감하지 못하는 신앙의 위기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 참 뜻을 일깨우려는 데 근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히브리서의 결론 격에 해당하는 말씀의 첫 대목입니다. 이미 몇 차례 이 강단에서 그 의미를 나눈 적이 있지만 ‘성문 밖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히브리서 13장의 첫대목입니다. 그 첫대목은 이전의 장중한 설교의 성격을 띤 내용과 달리 이해하기 어려울 게 하나도 없는 말씀입니다. 본문말씀을 다시 확인해볼까요?

“계속하여 서로 사랑하십시오. 나그네 대접하기를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되, 여러분도 함께 갇혀 있는 심정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도 몸이 있으니, 학대받는 사람들을 생각하십시오.”

이후에 이어지는 말씀도 어려울 게 없는, 구체적인 생활윤리에 관한 내용입니다.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말씀, 돈에 매이지 말라는 말씀 등등입니다. 오늘은 1~3에 한정해 그 말씀의 뜻을 새기고자 합니다.
표준새번역본에 소제목이 붙은 것처럼,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가 무엇인지 그 내용을 구체적인 생활윤리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정한 제사장이라는 의미는 곧 이와 같은 삶의 윤리를 구현하는 데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삶의 윤리로 구체화되지 않은 신앙은 헛것입니다. 신앙이 전적으로 윤리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지만, 윤리로 구체화되지 않은 신앙은 진정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표준새번역 본문의 첫머리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계속하여 서로 사랑하십시오.” 청중을 눈앞에 두고 말하는 것으로 쉽게 말하는 형식으로 번역했지만, 개역성경은 원문 개념을 유념하여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형제자매/자매형제 사랑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이 말씀이 단지 수평적인 윤리 차원만을 함축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생활률, 곧 삶의 윤리의 대전제이지만 이것은 히브리서 안에서 독특한 성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비단 히브리서 안에서만은 아니고 신약성서 전반의 기조 안에서라고 해야겠지만, 히브리서 안에서 형제애의 개념은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성육신을 통해 사람들과 형제자매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한 분이신 아버지께 속합니다. 그러하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2:11)
가장 낮은 자리에 오신 예수님은 사람들과 더불어 형제자매 관계를 맺음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서 공평한 형제자매가 되게 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성서는 이렇게 그 ‘주’가 세속의 지배자들과 동일한 ‘주’를 뜻한다고 볼 수 없는 형제자매 관계를 강조합니다.

바로 그 대전제에서 오늘 본문말씀은 그 형제자매 사랑을 구체화하는 두 가지 교훈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것과 감옥에 갇혀 있거나 학대 받는 사람들을 그들과 같은 처지에서 대하라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맞아들이고 대접하라는 것, 곧 환대는 성서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그 제자들을 맞아들이는 것이 곧 당신을 맞이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0:40) 여기서 환대는 단순한 선행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환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고, 하나님을 맞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아예 더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말씀은 흥미롭게도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한 사례를 환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례가 연상됩니까? 아브라함의 이야기(창세 18장)와 롯의 이야기(창세 19장)가 금방 떠오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환기해볼까요?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자기 장막 문 어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앞에 웬 사람 셋이 자기 쪽을 향해 서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람들을 무조건 환대하고 극진히 대접합니다.
성서 기록은 이 세 사람이 주님이라고 밝혀 놓고 있는데, 아브라함이 이들이 주님이라는 것을 알고 모셨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기록자의 시선에서 그 정체를 알 뿐 정작 주인공은 그들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 과객일 뿐입니다. 사막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이었으니 행색이 그럴 듯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에 상관없이 이들을 환대하여 극진히 대접합니다. 그 손님들은 두 가지 소식을 전합니다. 사라가 아기를 갖게 될 것이라는 기쁜 소식과 소돔이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나그네를 극진히 모신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롯의 이야기를 볼까요? 이번에는 두 천사가 소돔 성 어귀에 있는 것을 보고 이들을 초대합니다. 이들 역시 나그네들일 뿐이었습니다. 이들은 길에서 묵겠다고 하는데, 롯은 극구 이들을 자기 집으로 모십니다. 그런데 밤중에 소동이 벌어집니다. 소돔 성 사람들이 두 사람을 내놓으라고 소동을 벌인 것입니다. 롯은 끝까지 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합니다. 그리고 롯 역시 이들에게 뜻밖의 소식을 듣습니다. 소돔 성이 멸망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롯과 그 가족은 소돔 성에서 벗어나 파멸을 면하게 됩니다.
소돔 성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심각하게 곡해되어 왔습니다. 소돔 성이 멸망하게 된 것이 성적 타락 때문이었다는 이해입니다. 동성애가 문제라는 해석입니다. 초기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인 필로가 그렇게 해석한 바람에 2천년 역사 동안 그렇게 곡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소돔의 죄악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에스겔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동생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다. 소돔과 그의 딸들은 교만하였다. 또 양식이 많아서 배부르고 한가하여 평안하게 살면서도,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들의 손을 붙잡아 주지 않았다.”(에스 16:49)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연대의 윤리가 무너진 것이 소돔의 죄악의 실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예언자의 해석과 입장을 같이합니다. 앞서 인용한 마태복음의 같은 문맥에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려라.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는 견디기가 쉬울 것이다.”(마태 10: 14~15)
무슨 뜻일까요? 타락의 실체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환대의 윤리가 무너져 내린 것이라는 사실을 함축합니다. 낯선 타인을 무조건 맞아들이는 환대의 윤리가 무너진 것이 소돔과 고모라 성의 그것보다 심각하다는 뜻입니다.
이웃사랑,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그 구체적인 태도로 나그네, 곧 타인을 무조건 맞이하라는 일깨워주고 있는 말씀이 어째서 나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논리로 둔갑할까요?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기 때문입니다. 편견 탓입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근거를 성서에서 찾는 이들은 문자주의적 성서이해에 기반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자기만의 세계관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성서본문을 요리조리 갖다 붙이고 있을 뿐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낯선 타인을 환대하라’ 그 대강령을 제대로 받아들인다면 있을 수 없는 해석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생각하라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생각하라는 것은 단지 정신적 태도, 마음의 차원에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실질적인 배려와 도움을 함축합니다. “여러분도 함께 갇혀 있는 심정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도 몸이 있는 사람이니, 학대받는 사람들을 생각해 주십시오.” 얼마나 생생한 권면입니까? 저마다 다가올 수 있는, 아니 빈번하게 경험하는 육체의 고통을 잘 알지 않느냐, 그 고통을 환기하며 타인의 고통을 같이 느끼라 말합니다.
성서의 세계 안에서 너무나 익숙한 말씀 아닙니까?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 곧 성육신 사건이 그 정점입니다. 하나님이 비천한 몸을 지닌 인간이 되셨다는 데서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출발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거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찌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말씀은 그 진실을 다시 환기합니다. 고통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진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근본이 되는 바탕입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기독교인들이 자기가 가진 것을 지키고, 다른 존재를 폭력적으로 부정하고 파괴하는 데 더 몰두하게 되었을까요? 요즘 제가 차별금지법 반대하는 분들과 대화하거나 종종 전화를 받다 보면 속이 터질 지경입니다. 차별금지법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한 줄도 들여다보지 않고 상대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도 들여다보지 않고 자기 입장만을 이야기하는 천박함과 몽매함에 경악합니다. 동성애가 어쩌고... 이슬람이 어쩌고... 그래서 교회가 위협을 받고.... 스테레오타입화된 주장이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외울 지경입니다.
이에 대해 분명하게 말합니다. 교회가 정말 걱정이라고. 교회가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니 걱정이요, 게다가 교회가 반인권세력으로 인식되어 젊은이들이 떠나니 또 걱정 아닙니까?
오늘 말씀은 우리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형제자매를 사랑하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십시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바로 그 사람의 처지에서 대하십시오.’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몇 주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도대체 어떻게 로마제국의 변방에서 시작된 복음의 씨앗이 그 제국의 세계관을 대체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습니까? 바로 그 복음을 삶으로 구현하였기 때문입니다. 교리에 매이고 교세에 의존한 탓이 아닙니다. 사랑의 복음을 전하고 그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믿음을 신실하게 따름으로,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존재 자체로 존중받고 공평한 삶을 누리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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