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어둠 속에 비치다 - 요 1:1~14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1 18:31
조회
11457
2000년 12월 17일(일) 오전 11:00 천안 살림교회
제목: 빛이 어둠 속에 비치다
본문: 요한복음 1:1-14
복음서들을 보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시는 대로, 각기 복음서 기록자, 또는 공동체들이 처한 구체적 상황에 따라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초점이나 그 전달 방법은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크게 보아 공관복음서라 일컬어지는 마태, 누가, 마가 세 복음서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포함된 요한복음서가 차이가 납니다. 세 복음서는 대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어느 정도 사실적으로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세 복음서를 共觀福音書라 일컫습니다. 보는 눈이 대체로 공통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서들은 실제로 공통의 자료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서는 사실적 전달보다는 사색적이며 철학적인 성찰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대단히 논리적이고 일목요연한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 점은 요한복음의 기록자, 그가 속한 공동체가 다른 복음서들과는 다른 상황에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는 대림절의 셋째 주일을 지키고 있고, 8일 후면 예수님이 탄생하신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는 방식과 내용에 있어서도 복음서들은 모두 차이가 납니다. 유대교의 전통을 상당 부분 존중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의 성취'라는 점에서 강조하고자 그 예언의 성취를 학수고대하며 예언이 이루어질 조짐을 연구하고 있었던 동방박사들을 예수님이 탄생한 현장의 첫 증언자로 내세웁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 특별히 깊은 누가복음은 가장 별 볼일 없었던 양치기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가장 기뻐했다고 전합니다. 한편 민중과 더불어 삶을 살았던 예수님의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마가복음서 기자의 눈에는 아예 탄생 이야기와 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지 아예 탄생 이야기가 쏙 빠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 요한복음서에도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직접적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경우 그 이야기가 없다기보다는 앞의 복음서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의 탄생에 관해 전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 요한복음이 그 나름대로 전하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탄절 때마다 어린이들의 성극의 소재로 등장하고 있는 마태나 누가복음서의 탄생이야기가 '어린이 취향'이라고 한다면 요한복음의 탄생이야기는 '어른 취향'이라 할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전혀 탄생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지만, 그래서 어떻게 성극으로 형상화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를 되씹어볼 것 같으면 훨씬 심오하고도 총괄적으로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잘 함축해 주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이러한 특징은, 헬레니즘 문화권 안에서 그 영향을 크게 받고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의미를 전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됩니다. 아마도 시리아 지역이나 소아시아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공동체, 다시 말해 이방 문화권에 속해 그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의미를 전하고 있는 책이 요한복음입니다. 당시 그리스의 이원론적 철학은 영과 육을, 로고스와 사르크스를 가르고 로고스의 진정성을 추구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런 세계관에 익숙하고, 그 세계관에 따라, 그러나 정면으로 그와는 상반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말씀(로고스)이 육신(사르크스)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전제하에, 한마디로 오늘 본문 말씀은 창조되기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말씀이 어둠에 뒤덮인 이 세상에 참 빛으로 오시어 세상 만물에 참 생명을 주었다는 이야기로 예수님의 탄생을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말 그대로 예수님은 이 세상의, 이 역사의 어둠 속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참 빛으로 오신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오늘 요한복음서의 본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 빛을 전하기 위해 요한을 먼저 보냈고, 그리고 마침내 그 빛이 직접 사람들에게 비추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증언은 결국 사람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다른 말로 하면 어둠을 비추기 위해 빛을 밝혔지만 끝끝내 그 빛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 빛을 어둠이 다시금 삼키고 말게 한 사건을 예언하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은 매우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 절망적인 증언으로 머물지 않고 다시금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선포로 이어집니다.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고 합니다(12절). 그리고 나아가 그 특권을 받은 무리들, 곧 오늘의 우리가 있게 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사명을 다시금 일깨웁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합니다(14절).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초대 그리스도인 공동체, 구체적으로 요한의 공동체를 일컫는 말이요, 또 한편으로 바로 오늘의 우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역사는 어둠이 빛을 삼키고 만 것처럼 보이지만, 그 빛의 진가를 아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 빛은 다시 어둠을 이기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5절의 말씀대로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고 하는 진리의 말씀이 거짓이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졌고, 또 오늘 이 순간도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있는 한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신 날을 맞이하면서, 작고 보잘것없는 우리들이지만 우리가 그 참 빛을 전파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으로부터 이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우리 인간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12월 25일을 너무도 당연하게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로 생각하고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일이 정확하게 몇 월 며칠인지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대략 이 때쯤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해마저도 정확하게 추정하지 못해 B.C(주전) 4년으로 추정하는 것이 통설입니다. '주전(BC: before Christ) 4년에 주가 태어났다', 어폐가 있지요? 주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한다는 서력기원(AD: anno Domni)마저도 잘못 설정되어 4년의 착오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성서 자체가 예수님의 탄생을 혼란스럽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전 4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태복음이 전하고 있는 바에 따라, 헤롯대왕의 말년인 주전 4년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이 전하는 바에 따라 로마의 인구조사가 있었던 해로 볼 것 같으면 그 시기는 주후 6년에 해당합니다. 무려 10년이나 차이가 있습니다.
요즘 김용옥 선생이 <논어>를 강의하면서, 역사의 공자를 조명하느라 역사의 예수에 비추어 강의한 내용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교계의 일각에서 문제를 삼으니까, '이제 기독교 이야기는 안 하겠다'고 해 버렸지만, 제가 강의를 들어보고 책을 읽어 본 바로는, 김용옥 선생의 이야기는 그다지 놀랄 만한 이야기가 전혀 아닙니다. 제가 평소에 성서연구 시간에 하는 이야기들하고 큰 차이가 없습니다. 공자를 역사적으로 재조명하기 위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른 역사의 예수 연구 방법을 원용해 이야기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런 이야기로 그리스도교 신앙이 무너질 것도 아니고, 그런 이야기로 무너질 신앙이라면 그 신앙은 지켜야 할 가치도 별로 없는 것입니다.
실증적인 역사적 사실을 확인해, 실증적 차원에서 성서의 기록이 부정확하다고 지적하는 것은 성서가 증언하는 신앙 자체가 허위라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실증적인 차원에서 확인되기 어렵거나, 또는 확인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모순되는 것으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의 탄생 기점을 그와 같이 특별한 역사적 사건과 결부시켜 이해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왜 굳이 마태가 포악한 헤롯대왕의 유아학살 사건과 예수님의 탄생과 결부시켰느냐, 왜 굳이 누가가 로마의 인구조사 사건과 예수님의 탄생을 결부시켰느냐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마가가 그런 것처럼, 한 어린 아이의 탄생, 그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 간과해 버릴 수도 있는데, 한 어린 아이의 탄생을 중요하게 다루면서 그 사건을 특정한 역사적 사건과 결부시킨 복음서 기록자의 의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형성하는 하나의 단초입니다. 마태와 누가가 설정한 탄생 시점은 무려 10년이라는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헤롯대왕의 폭정, 로마의 치밀한 식민지 지배전략, 한마디로 권력에 의해 민중이 짓밟히는 상황입니다. 물론 헤롯대왕 시절 유아학살 사건이 있었느냐, 로마의 인구조사가 어떤 형태로 진행되었느냐 하는 것도 실증적인 역사를 규명하는 차원에서는 또 하나의 논란거리입니다. 그 이야기는 이 자리에서 더 자세하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바로 그 권력에 의해 민중이 짓밟히는 상황에서 예수께서 희망으로, 빛으로 탄생했다고 보는 관점, 해석자의 안목입니다.
마태나 누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이지만, 요한이 전하는 오늘 본문 말씀도 그 나름의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원론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세계관을 회피하지 않고 바로 그 세계관의 틀에 따라 정면으로 예수의 삶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은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탄절로 지키는 12월 25일이, 진짜 예수님이 탄생한 날이냐, 그렇다면 그 시점이 몇 년에 해당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이해된 예수 탄생의 의미, 예수님의 삶의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12월 25일이 역사적으로(실증적 의미에서) 확인된 탄생일이기 때문에 그 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날이 되었든 탄생의 의미를 특별히 되새겨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12월 25일 성탄절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지키고 있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가 사실은 로마인들이 태양신의 축제일로 지켰던 것인데 그날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기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2월 25일이란 고대 서양에서 동짓날로 지켰던 때입니다. 동지는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로서 바로 이날 이후부터는 밤의 길이와 낮의 길이가 역전되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하면 어둠을 나타내는 밤이 이제 서서히 힘이 약화되고 빛을 나타내는 낮이 기운을 차리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이 날을 태양신을 기리는 축제일로 지켰던 것인데, 이 날을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주님께서 탄생하신 날로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연한 사건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오심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태양신의 축제를 뒤바꾼 사건이 아니라, 바로 그 태양신을 받드는 이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인간의 현실을 참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바꾼 사실을 나타내는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이 세상을 지배해 왔던 거짓 신, 거기에서 정당화의 근거를 찾았던 권력을 이기고 참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께서 이제 이 세상을 몸소 지배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러 오묘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안식일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유래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고대 근동 사람들에게 제7일이란 악신들이 판을 치는 날이기 때문에 몸을 조심해서 일을 하지 않고 쉬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인들은 바로 이 날을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날로 바꿔 하나님의 통치를 과시했습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중요한 상징인 십자가야말로 바로 이러한 뒤바꿈의 역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란 한마디로 갈등과 불화의 상징이었습니다. 죄인들을 처형하는 사형틀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인간들 사이의 다툼과 불화의 상징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구원의 상징이요, 화해와 평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 그리고 우리 가운데 오신 그 그리스도를 기리고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오늘 이 순간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바로 이처럼 세상의 뒤바꿔짐을 의미합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때때로 빛이 어둠에 가리워진 듯이 보이는 때도 있지만, 결국 빛은 어둠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빛을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떠한 순간에도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됨의 의미는, 그 소망의 빛을 전하는 데 있습니다.*
제목: 빛이 어둠 속에 비치다
본문: 요한복음 1:1-14
복음서들을 보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시는 대로, 각기 복음서 기록자, 또는 공동체들이 처한 구체적 상황에 따라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초점이나 그 전달 방법은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크게 보아 공관복음서라 일컬어지는 마태, 누가, 마가 세 복음서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포함된 요한복음서가 차이가 납니다. 세 복음서는 대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어느 정도 사실적으로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세 복음서를 共觀福音書라 일컫습니다. 보는 눈이 대체로 공통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서들은 실제로 공통의 자료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서는 사실적 전달보다는 사색적이며 철학적인 성찰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대단히 논리적이고 일목요연한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 점은 요한복음의 기록자, 그가 속한 공동체가 다른 복음서들과는 다른 상황에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는 대림절의 셋째 주일을 지키고 있고, 8일 후면 예수님이 탄생하신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는 방식과 내용에 있어서도 복음서들은 모두 차이가 납니다. 유대교의 전통을 상당 부분 존중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의 성취'라는 점에서 강조하고자 그 예언의 성취를 학수고대하며 예언이 이루어질 조짐을 연구하고 있었던 동방박사들을 예수님이 탄생한 현장의 첫 증언자로 내세웁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 특별히 깊은 누가복음은 가장 별 볼일 없었던 양치기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가장 기뻐했다고 전합니다. 한편 민중과 더불어 삶을 살았던 예수님의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마가복음서 기자의 눈에는 아예 탄생 이야기와 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지 아예 탄생 이야기가 쏙 빠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 요한복음서에도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직접적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경우 그 이야기가 없다기보다는 앞의 복음서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의 탄생에 관해 전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 요한복음이 그 나름대로 전하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탄절 때마다 어린이들의 성극의 소재로 등장하고 있는 마태나 누가복음서의 탄생이야기가 '어린이 취향'이라고 한다면 요한복음의 탄생이야기는 '어른 취향'이라 할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전혀 탄생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지만, 그래서 어떻게 성극으로 형상화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를 되씹어볼 것 같으면 훨씬 심오하고도 총괄적으로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잘 함축해 주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이러한 특징은, 헬레니즘 문화권 안에서 그 영향을 크게 받고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의미를 전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됩니다. 아마도 시리아 지역이나 소아시아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공동체, 다시 말해 이방 문화권에 속해 그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의미를 전하고 있는 책이 요한복음입니다. 당시 그리스의 이원론적 철학은 영과 육을, 로고스와 사르크스를 가르고 로고스의 진정성을 추구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런 세계관에 익숙하고, 그 세계관에 따라, 그러나 정면으로 그와는 상반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말씀(로고스)이 육신(사르크스)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전제하에, 한마디로 오늘 본문 말씀은 창조되기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말씀이 어둠에 뒤덮인 이 세상에 참 빛으로 오시어 세상 만물에 참 생명을 주었다는 이야기로 예수님의 탄생을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말 그대로 예수님은 이 세상의, 이 역사의 어둠 속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참 빛으로 오신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오늘 요한복음서의 본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 빛을 전하기 위해 요한을 먼저 보냈고, 그리고 마침내 그 빛이 직접 사람들에게 비추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증언은 결국 사람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다른 말로 하면 어둠을 비추기 위해 빛을 밝혔지만 끝끝내 그 빛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 빛을 어둠이 다시금 삼키고 말게 한 사건을 예언하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은 매우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 절망적인 증언으로 머물지 않고 다시금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선포로 이어집니다.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고 합니다(12절). 그리고 나아가 그 특권을 받은 무리들, 곧 오늘의 우리가 있게 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사명을 다시금 일깨웁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합니다(14절).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초대 그리스도인 공동체, 구체적으로 요한의 공동체를 일컫는 말이요, 또 한편으로 바로 오늘의 우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역사는 어둠이 빛을 삼키고 만 것처럼 보이지만, 그 빛의 진가를 아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 빛은 다시 어둠을 이기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5절의 말씀대로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고 하는 진리의 말씀이 거짓이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졌고, 또 오늘 이 순간도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있는 한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신 날을 맞이하면서, 작고 보잘것없는 우리들이지만 우리가 그 참 빛을 전파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으로부터 이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우리 인간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12월 25일을 너무도 당연하게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로 생각하고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일이 정확하게 몇 월 며칠인지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대략 이 때쯤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해마저도 정확하게 추정하지 못해 B.C(주전) 4년으로 추정하는 것이 통설입니다. '주전(BC: before Christ) 4년에 주가 태어났다', 어폐가 있지요? 주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한다는 서력기원(AD: anno Domni)마저도 잘못 설정되어 4년의 착오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성서 자체가 예수님의 탄생을 혼란스럽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전 4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태복음이 전하고 있는 바에 따라, 헤롯대왕의 말년인 주전 4년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이 전하는 바에 따라 로마의 인구조사가 있었던 해로 볼 것 같으면 그 시기는 주후 6년에 해당합니다. 무려 10년이나 차이가 있습니다.
요즘 김용옥 선생이 <논어>를 강의하면서, 역사의 공자를 조명하느라 역사의 예수에 비추어 강의한 내용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교계의 일각에서 문제를 삼으니까, '이제 기독교 이야기는 안 하겠다'고 해 버렸지만, 제가 강의를 들어보고 책을 읽어 본 바로는, 김용옥 선생의 이야기는 그다지 놀랄 만한 이야기가 전혀 아닙니다. 제가 평소에 성서연구 시간에 하는 이야기들하고 큰 차이가 없습니다. 공자를 역사적으로 재조명하기 위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른 역사의 예수 연구 방법을 원용해 이야기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런 이야기로 그리스도교 신앙이 무너질 것도 아니고, 그런 이야기로 무너질 신앙이라면 그 신앙은 지켜야 할 가치도 별로 없는 것입니다.
실증적인 역사적 사실을 확인해, 실증적 차원에서 성서의 기록이 부정확하다고 지적하는 것은 성서가 증언하는 신앙 자체가 허위라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실증적인 차원에서 확인되기 어렵거나, 또는 확인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모순되는 것으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의 탄생 기점을 그와 같이 특별한 역사적 사건과 결부시켜 이해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왜 굳이 마태가 포악한 헤롯대왕의 유아학살 사건과 예수님의 탄생과 결부시켰느냐, 왜 굳이 누가가 로마의 인구조사 사건과 예수님의 탄생을 결부시켰느냐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마가가 그런 것처럼, 한 어린 아이의 탄생, 그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 간과해 버릴 수도 있는데, 한 어린 아이의 탄생을 중요하게 다루면서 그 사건을 특정한 역사적 사건과 결부시킨 복음서 기록자의 의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형성하는 하나의 단초입니다. 마태와 누가가 설정한 탄생 시점은 무려 10년이라는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헤롯대왕의 폭정, 로마의 치밀한 식민지 지배전략, 한마디로 권력에 의해 민중이 짓밟히는 상황입니다. 물론 헤롯대왕 시절 유아학살 사건이 있었느냐, 로마의 인구조사가 어떤 형태로 진행되었느냐 하는 것도 실증적인 역사를 규명하는 차원에서는 또 하나의 논란거리입니다. 그 이야기는 이 자리에서 더 자세하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바로 그 권력에 의해 민중이 짓밟히는 상황에서 예수께서 희망으로, 빛으로 탄생했다고 보는 관점, 해석자의 안목입니다.
마태나 누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이지만, 요한이 전하는 오늘 본문 말씀도 그 나름의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원론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세계관을 회피하지 않고 바로 그 세계관의 틀에 따라 정면으로 예수의 삶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은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탄절로 지키는 12월 25일이, 진짜 예수님이 탄생한 날이냐, 그렇다면 그 시점이 몇 년에 해당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이해된 예수 탄생의 의미, 예수님의 삶의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12월 25일이 역사적으로(실증적 의미에서) 확인된 탄생일이기 때문에 그 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날이 되었든 탄생의 의미를 특별히 되새겨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12월 25일 성탄절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지키고 있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가 사실은 로마인들이 태양신의 축제일로 지켰던 것인데 그날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기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2월 25일이란 고대 서양에서 동짓날로 지켰던 때입니다. 동지는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로서 바로 이날 이후부터는 밤의 길이와 낮의 길이가 역전되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하면 어둠을 나타내는 밤이 이제 서서히 힘이 약화되고 빛을 나타내는 낮이 기운을 차리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이 날을 태양신을 기리는 축제일로 지켰던 것인데, 이 날을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주님께서 탄생하신 날로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연한 사건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오심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태양신의 축제를 뒤바꾼 사건이 아니라, 바로 그 태양신을 받드는 이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인간의 현실을 참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바꾼 사실을 나타내는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이 세상을 지배해 왔던 거짓 신, 거기에서 정당화의 근거를 찾았던 권력을 이기고 참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께서 이제 이 세상을 몸소 지배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러 오묘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안식일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유래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고대 근동 사람들에게 제7일이란 악신들이 판을 치는 날이기 때문에 몸을 조심해서 일을 하지 않고 쉬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인들은 바로 이 날을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날로 바꿔 하나님의 통치를 과시했습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중요한 상징인 십자가야말로 바로 이러한 뒤바꿈의 역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란 한마디로 갈등과 불화의 상징이었습니다. 죄인들을 처형하는 사형틀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인간들 사이의 다툼과 불화의 상징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구원의 상징이요, 화해와 평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 그리고 우리 가운데 오신 그 그리스도를 기리고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오늘 이 순간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바로 이처럼 세상의 뒤바꿔짐을 의미합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때때로 빛이 어둠에 가리워진 듯이 보이는 때도 있지만, 결국 빛은 어둠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빛을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떠한 순간에도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됨의 의미는, 그 소망의 빛을 전하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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