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 21:28~32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1 19:02
조회
9284
2001년 4월 1일(일) 오전 11시 천안 살림교회

제목: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본문: 마태복음 21:28-32


지난주에 이어 계속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예수님의 비유, 곧 '두 아들의 비유'는 잘 알려져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도 별로 복잡할 게 없는 아주 명쾌한 비유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표준 새 번역 성서>를 따르면,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맏아들더러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싫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 놓고 나서 후회가 되어 그 아들은 포도원에 나가 일을 합니다. 반면에 둘째 아들에게도 똑같은 말을 하였는데, 그 아들은 "예, 가겠습니다, 아버지!" 해놓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혹 지금 <개역 성경>을 보고 있는 분이 있다면, 그 본문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개역 성경>에는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바뀌어 있습니다. 등장하는 순서는 맏아들 둘째 아들 순 그대로이지만, 그 역할은 바뀌어 있습니다. 맏아들은 가겠다고 대답해놓고 가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고, 둘째 아들은 가지 않겠다고 해놓고 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어느 사본을 대본으로 삼아 번역했느냐에 따라 생긴 것입니다. <표준 새 번역> 난외주에도 나오지요? 다른 고대 사본에는 이렇게(개역의 내용처럼) 되어 있다는 해설이 나옵니다. 제가 집에 가지고 있는 여러 종류의 성서를 다 대조해 봤더니 다 제 각각입니다.

그 역할이 뒤바뀐 것이 메시지의 결정적 차이를 낳지는 않습니다. 그 두 아들 이야기만으로 비유가 끝났다면 아마도 결정적 차이를 지니고 있겠지만, 다른 이야기가 함께 붙어 있어 의미맥락상 결정적 차이를 낳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의 맥락으로 보나, 성서 전반의 맥락으로 보나 오늘 본문은 보다 더 오래된 고대의 사본을 따른 <개역 성경>의 번역이 더 잘 어울립니다. 순전히 본문의 논리적 맥락으로 보면, 먼저 결과적으로 거부한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재차 그 다음 아들에게 요청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먼저 요청을 받은 아들이 순종을 했다면 굳이 그 다음 아들에게는 요청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먼저 거절당했다면 다음 순서로 넘어가는 것은 필연적인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서가 전반적으로 '둘째 아들'이 인정받는 동기를 강조하고 있다는 맥락에서 봐도,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요청을 처음에는 거부했으나 결과적으로 요청을 따랐다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것은 곧바로 이어지는 내용(31-32절)하고도 잘 어울립니다. 그 내용은, 바로 오늘 비유의 사실상의 초점을 설명해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후대의 성서 사본들이 그 역할을 뒤바꿔놓은 것은, 아마도 '순종의 미덕'을 강조하는 교회의 전통이 자리를 잡고, 더불어 기독교인/교회가 이제 '맏아들 의식'을 갖게 된 상황과 관련된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제 우리는 이 비유의 맥락이 무엇인지, 무엇을 말하는지, 함께 말씀의 뜻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그런데 이 비유를 듣는 사람은 유대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었습니다(23절). 이 비유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을 정화하고 난 후, 다음 날 다시 성전에 들어와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께 대드는  상황입니다.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당신이 그러고 다니느냐?' 하고 따지는 상황입니다. 바로 그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오늘 말씀의 비유를 던지면서 묻고 있습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표준 새 번역 성서>를 따르면 '맏아들'이 되고, <개역 성경>을 따르면 '둘째 아들'이 됩니다. 하여간 처음에 아버지의 요청을 거절했으나, 결국 아버지의 뜻을 따른 사람이 옳습니다. 처음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지 않은 것은 잘못되었지만, 곧바로 그것을 반성하고 결국 아버지의 말을 따른 것이 옳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 행실로는 순종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거들먹거리지도 않는 듯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 옳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 입으로만 "주여, 주여!"를 외치는 것보다 삶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런 정도의 판단은 사실 초등학생, 유치원생에게서도 가능할 겁니다. 질문 자체만 놓고 보면 그렇게 쉽고 그렇게 간단한 물음입니다. 비유의 주인공들 가운데서 "누가 옳으냐?"하는 것은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던진 의도는 그렇게 간단하고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단순히 객관적 판단을 요구하는 의도를 지닌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는, 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에게 그 비유를 통한 물음을 '자신들의 문제'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의 모든 비유의 성격 자체가 밋밋한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청중들에게 삶의 도전이 되는 도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 상황 역시 도발적이고 역동적입니다. 그 앞 뒤 맥락을 잘 들여다보십시오.

우선 저 앞에서 예수님은 성전정화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성전 뜰에서 눈먼 사람들과 절름발이들을 고쳐주었습니다. 그 때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화가 나서 예수님께 덤벼들었다고 했습니다(21:16). 그리고 다음날 다시 나타나서는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고, 다시 성전에 들어와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 때 다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타나 따지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그러고 다니느냐?'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고 거꾸로 질문을 던집니다. '세례가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그들은 답을 하지 못합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답하면 세례 요한을 믿지 않았던 자신들을 질책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답하면 '무슨 소리하느냐?'고 항변할 무리들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답을 하지 못하는 그들을 보고 예수님은, '그렇다면 나도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답합니다. 대단한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입니다.

그런 분위기 가운데서 예수님은 오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비유를 말하기에 앞서 도발적인 문제를 던집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우리도 평상시에 누군가로부터 "여러분은 /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는 물음부터 받으면 긴장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공방전을 벌이느라 긴장되어 있는 상황에서 더더욱 그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질문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비유를 들려주고 너무나도 뻔히 답이 나올 수 있는 물음을 던진 것입니다. 답은 예상한 대로 즉각 튀어 나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처음 던진 물음입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물음입니다. 그것은 '그 비유의 상황은 곧 너희들의 상황을 두고 한 말이다. 너희들 스스로 한 번 돌이켜 보아라.' 하는 뜻입니다. '너희들이 대답은 잘 하지만, 너희 삶은 어떤지 생각해 봤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러한 의중은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피곤하게 소모적인 논쟁의 상황에 머물러 있고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성전정화 사건 이후 예수님은 더 이상 우회로를 찾지 않습니다. 정면으로 정곡을 찌릅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옳은 길을 보여 주었으나.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았으며, 그를 믿지 않았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객관적으로, 일반적으로 옳은 것이 무엇인가를 놓고 사제들 및 장로들과 논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문제를 짚기 위해 그 비유를 말했다는 것을 확인시켜줍니다. '너희들이 다 옳고 너희들이 스스로 의인이라 생각하며, 세리와 창녀는 인간쓰레기로 취급하여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갈 사람들은 너희가 아니라 바로 그 세리와 창녀들이다.'는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가 굳이 비유에서 결과적으로 옳았던 아들이 둘째 아들이라고 보는 결정적인 이유도 이 말씀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오늘 말씀에서는 첫째냐 둘째냐 중요한 것은 아니고,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지만 의롭지 못한 사람'과 '의롭다 여김을 받지 못하지만 진정으로 의로운 사람'이 대비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비유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 비유의 상황, 그리고 그것을 통한 물음이 그 청중의 상황과 직결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물음은, 이 비유를 읽고 있는 오늘 우리들에게 던져진 물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나와 상관없는 어떤 물음이나 과제에 대해서는 쉽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것이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라고 하면 곤혹스러워합니다. 마치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와 같습니다. 쥐들이 고양이를 피하기 위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면 좋겠다는 의견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이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면 난감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봉착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사는 것은 이런 것이다."하고 답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너는 정말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물음에 "나는 이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하는 답변은 쉽지 않습니다.

전혀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그러나 최소한 '이렇게 살려고 노력한다' 하는 대답은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물음은 최소한 그러한 정도의 대답이라도 할 수 있는 우리들의 자세를 요구합니다.

그 물음을 안고 그 물음에 대해 답을 찾으려는 생각을 떨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그런 물음마저 갖지 않고 그저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다고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마치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태도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혀 예기치 못했던 다른 사람들이 먼저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당황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물음을 안고 살아가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구원에 이를 뿐 아니라 뜻밖의 다른 사람들 역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 안에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물음을 늘 안고 살아감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이 시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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