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찾으나 - 고전 1:18~25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1 19:19
조회
9344
2001년 4월 29일(일) 오전 11:00  천안 살림교회

제목: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찾으나

본문: 고린도전서 1: 18-25


함께 읽은 오늘 말씀은, 여러 분파(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로 갈라져 다투고 있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그 모든 분파를 가르는 것이 인간적, 세상적 지혜의 소산이라는 것을 밝히며 그것의 허망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공동체가 분열되는 것은 유익하지 않으므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당면한 과제에 대한 교훈을 뛰어 넘습니다. 그 당면한 현안 문제를 해결하는 교훈을 가르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어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적인 메시지,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기쁨의 근원이 되는지를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미처 다 읽지 못한 26절이하에도 계속 이어지는 장황한 말씀으로 구성된 오늘 말씀은, 단도직입적으로 우리가 믿는 구원의 도의 성격을 말하는 데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십자가의 도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에 불과하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요 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어엎는 역설의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 세상적 지혜의 허망함을 말하고, 그 세상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조하는 것으로 오늘 말씀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그 세상적 지혜를 추구하는 대표적 집단으로 유대인과 그리스인을 말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구한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이 구하는 표적과 그리스인이 구하는 지혜, 이 두 가지는 모두 당시의 세상을 지배하고 좌우하는 통념이요 가치관이며, 동시에 사도 바울이 보기에 잘못된 가치관을 말합니다.


유대인이 구하는 표적이란 무엇일까요? 표적은 곧 눈으로 드러난 기적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표적을 구하는 태도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에 띄게 뭔가를 해주기를 기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인간들 자신의 주장과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하나님의 능력을 눈으로 보이게 드러내달라는 요구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태도요, 하나님을 자신의 욕구충족 수단으로 삼는 태도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이와 같은 표적을 구한다는 것은, 그들이 겉으로 볼 때 진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자신들의 가치관과 전통에 따라 하나님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고 있는, 일종의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과는 뭔가 다른 것, 특별한 것, 획기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기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삶의 권태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적극적인 충동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일상의 삶에서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일상의 삶의 의미를 망각하는 데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기대 심리를 우리의 개인적 삶에서나 사회적 삶에서 자주 경험합니다. 예컨대, 최근 대우 노동자 폭력 진압 사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그러한 심리의 한 반영입니다. 두들겨 패고 피가 터지니까 여기저기서 사람들은 그 사건에 대해 관심을 기울입니다. 특별한 돌출적인 '표적'이 일어나니까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 돌발적인 폭력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 행해지는 시장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폭력성은 여전히 우리 삶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대우 노동자들이 경찰의 폭력에 얻어맞지 않았더라도 이미 그들은 폭력의 희생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획기적이고 깜짝 놀랄 만한 사태가 발생해서야 사람들은 사건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한 특이한 표적을 통해서야 사건을 바라보게 되면, 언제나 사태의 본질을 놓치기 십상입니다. 그 현상만 놓고 옳으니 그르니 갑론을박할 뿐, 도도히 일상의 삶을 지배해 온 과정의 본질을 놓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갈구하는 것도 같은 경우입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부르짖고 특별히 뜨거운 '은사의 체험'을 하지만, 그것이 일상의 삶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나 갈증을 느낍니다. 특별한 경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보면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상에 의미를 둘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일상의 삶에서 우리를 변화시키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상의 삶은 늘 무의미하고 따분하게 되는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의 기대심리가 갖고 있는 함정은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표적을 구하는 유대 바리새인들을 향해 질타했습니다(마가 8:11-13 // 누가 11:29-32 // 마태 12:38-42). 표적을 보지 못할 것이다(마가), 아니면 표적을 보여 줄 것이 있다면 요나의 표적 이외에는 없다(마태 / 누가), 바로 예수님 자신의 삶을 겨냥하여 죽을 몸이 죽지 않을 몸으로 변화는 삶의 관계의 변화, 곧 부활 이외에는 다른 표적을 기대할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말해 '삶의 변화'입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무슨 표적을 구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인들이 구하는 지혜란 무엇일까요?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리스인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요, 이성을 신뢰하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잘못된 지혜로서의 그리스인들이 추구하는 지혜란, 한마디로 실천이 없는 종교, 실천이 없는 사변적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종교나 사상도 그 실천적 의의를 스스로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실천과 무관한 지혜나 사상을 가르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지혜가 정말로 인간의 삶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실천적 의의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암만 논리가 맞고, 그 자체로 이치가 부합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인간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사상이나 지혜가 많습니다. 거창한 사상이나 지혜 차원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사고방식에서 그런 경우를 우리는 쉽게 경험합니다.

소위 인간의 이성에 대한 최고의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된 근대의 과학적 지식, 기술적 지식들이 그러한 단면을 잘 드러냅니다. 이성 / 합리성에 대한 신뢰는 역으로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대상을 갈라내어 그것을 무가치하게 여깁니다. 감성적인 여성을 깔아뭉개는 태도나, 명시적인 논리로 해명되지 않은 전통은 모두 미신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 똑똑하게 자기를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몸으로만 말하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들로 보는 태도, 그런 것이 다 이성적 가치를 중심에 둔 사고방식의 소산입니다.

과학기술의 측면에서 말하면, 과학기술은 무조건 인간의 복지를 위해 기여할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 왔습니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문명의 이기가 발달해 과연 인간이 더 편해지고 안락한 삶을 누리게 되었는가 돌이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문명의 이기의 발달은 많은 사람을 일자리에서 몰아냄으로써 그들의 삶의 안정을 빼앗아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사람들은 그 이기에 적응하느라 허덕입니다.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하지 않았다면, 여러분 고달프게 밤새워야 할 일이 없습니다.'

쟁쟁한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경제학의 원리만큼 또 허구적인 과학이 없습니다. 경기변동을 예측하고 주식시세를 예측하는 데는 탁월한 경제학적 / 경영학적 지식은, 기업이 파산해 자기의 목숨을 버려야 하는 중소기업가의 아픔에 대해, 일자리를 잃어 당장 가족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가장의 고통에 대해, 아니 끊임없이 정상을 향해 달려야 하고 최소한 현상유지라도 해야 하는 우리의 생의 논리를 해명하는 데는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상화된 계량적 수치를 산출하고 그에 따라 경기변동은 예측할지언정, 계량적 수치로 환원되지 않는 구체적 인간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절대적인 삶의 방편으로 삼고 있는 과학적 지식은 이처럼 무력하기 짝이 없는 허상에 불과합니다. 그 과학이 추구하는 이성을 그래서 '도구적 합리성'이라 일컫습니다. 그 자체로는 앞 뒤 아귀가 딱 떨어지게 맞지만, 정작 인간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인간을 구원하는 데는 정작 쓸모없는 합리성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너무 고차원적인 이야기만 했나요? 우리의 상식적 수준에서 말하면, 세상의 질서와 제도가 요구하는 합리적 수순을 따라 더 많은 학력과 지식을 누리고 더 많은 재물을 누리는 것이 인생의 기쁨의 전부, 아니 그 본질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인이 추구하는 지혜'의 허상이 그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요즘의 '합리성'이라는 말 대신에 '영적' / '이데아적' 지혜를 추구했습니다. 현실은 허상 내지는 불완전하고 거꾸로 완전한 이상 세계는 피안의 영적 세계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해명될 수 없는 모순투성이의 현실이 아니라, 완벽한 질서가 조화를 이루는 이데아의 영적 세계를 추구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 들어 온 것이 영지주의입니다. 육체를 지닌 인간의 삶은 허망하니 영적 지혜의 세계에 도달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그럴듯한 구원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육신의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바라보려 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끈질기게 싸운 것이 바로 그 영지주의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요한복음의 선언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 역시 불가피하게 그리스적 지혜의 개념들을 사용하면서도, 영육이 동시에 깃든 존재로서 몸을 강조하고 그 몸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구원은 엉뚱한데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몸을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의 삶 가운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몸의 현실, 일상의 현실을 피해감으로써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새롭게 변화시켜감으로써 구원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역설합니다. "유대 사람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하되,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전합니다. 이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는, 표적을 구하고 지혜를 찾는 이들에게는 거리낌이 되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우선 십자가는 하나님마저도 자신을 부정하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십자가 이전에 하나님께서 인간 예수의 몸을 입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자기부정 행위입니다. 전지전능하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하나님께서 평범한 인간의 일상으로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그 인간의 몸을 입은 것만으로도 부족해 모든 것이 끝장이 나는 십자가의 죽음에 하나님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하나님의 자기부정은 그 절정에 이릅니다. 이것은 오직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고만 믿던 유대인들에게는 도무지 비위에 맞지 않고 가당치 않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부정하다니!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을 자신의 욕망 충족 수단으로 삼고, 그 하나님을 뭔가 '깜짝쇼'를 벌여줄 것으로 기대해마지 않아 왔던 사람들의 태도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마저도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거부했는데, 하물며 너희들이 옳은 것을 추구한다면서 똘똘 뭉친 자신의 욕망, 어느 순간 일확천금을 노리는 그 기대심리를 버릴 수 없다니!', '그러고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뭔가 특별한 기회나 능력에 자신을 맡기려는 기대 속에서 살아가기보다는, 지금까지 소홀히 여겨왔던 일상의 삶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돌이켜보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마저도 똑같이 우리와 더불어 우리가 사는 삶 가운데서 고통과 기쁨을 느끼고 있는 현실, 그 현실을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십자가는 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진 사건을 의미합니다. 아귀가 맞지 않는 불의한 현실에서, 불의한 세상에서 의를 이루는 것은 그 현실을 피해 사색하고 사변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의를 이루는 길은 자신의 몸뚱어리를 그 현실에 내던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루기 위해서는 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앞 뒤 아귀가 맞지 않는 현실에서의 역설적 진실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그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분명, 합리적 이치를 따지고 타당성을 따지는 그리스인에게는 어리석은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 지혜로운 방법이 있었을텐데!' '이를테면, 보다 더 대중적인 방법으로 더 많은 추종자를 모으든지, 아니면 그 추종자 수야 어찌 되었든 정치권력을 장악하든지 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었을텐데. 그 시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하게 굴기는!' 하는 것이 그리스인들의 눈에 비췬 십자가의 도였습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이길 만한 힘을 갖추는 것이 앞 뒤 논리가 맞습니다. 그것이 힘센 사람과 약한 사람으로 나누어져 있는 세계 질서 내에서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이치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지켜야 하고 거기에 더 많은 것을 쌓아야, 약한 사람의 처지에 떨어지지 않고 그 현실을 피해갈 수 있습니다. 더 많은 힘을 갖는 것이 이상적인 모형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은 끊임없이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 이상이 허구라는 것을 증명해 보여주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약함도 강함도 없는 구원의 세계는, 지금 현실의 약함을 피해 가는 데서가 아니라 약한 것의 가장 약한 나락으로까지 나를 버리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증언합니다. 현재의 질서 안에서 해명되지 않은 모순덩어리를 그대로 두고 지금 드러난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세계를 강화하는 것, 지금 모순으로 가득찬 육체의 현실을 내버려두고 영적 세계를 추구하는 것은 결단코 구원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십자가의 길은 보여줍니다.

버리는 길, 저 바닥 끝까지 나를 낮추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진정한 강함입니다.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거꾸로 이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강함입니다.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약해 보이고 무모하게 어리석어 보이는, 그 하나님의 '진정한 강함'을 따르고 '진정한 지혜'를 따르는 길은, 사람들의 상식을 거슬러야 하기 때문에 고통의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길이 고난의 길, 고통의 길일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거꾸로 사람들이 상식으로 여기는 그 길, 표적을 구하고 지혜를 찾는 길이 과연 기쁨과 쾌락의 길일까, 반문하는 데서 찾아집니다. 상식으로 통용된다고 해서 그것이 늘 편하고 늘 기쁜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여러분, 스스로 우리 일상의 삶을 돌이켜 보십시오. 우리들 가운데 예외는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살아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피땀을 흘려야 하고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얼마나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상식의 세계에서 그 고단함을 잊게 해주는 것은 눈에 보이고 손에 쥐어지는 보상입니다. 그러나 그 보상에 대한 기대심리의 충족은 한이 없습니다.

이제 다시 묻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거리끼고 어리석어 보이는 그리스도의 길이 과연 지루하고 고단한 과정일 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에도 고난이 있는가 하면 기쁨이 있습니다. 이리저리 재어야 하고, 여기저기 걸거쳐야 하는 번거로움을 벗어버린 단순한 삶의 기쁨이 있습니다.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기꺼이 선택한 삶을 통한 나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기쁨, 즐거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교리적 전제 때문에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러나 간혹 우리는 주변에서 자기 소신껏 거추장스러운 모든 것을 벗어버린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고 동경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갈증하는 갈망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그러한 상태를 '모든 피조물이 속으로 신음하며 탄식하고 있지만, 사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게 될 날을 고대한다'고 말했습니다. 나 하나만이 아니라 온 피조물이 함께 누릴 자유와 기쁨을 말한 것입니다.    

제가 사는 게 별거 아니지만, 단순히 촌구석에 산다는 그 사실을 딱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불편하게 사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거꾸로 복잡한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이 딱해 보입니다.

어떤 삶이든 기쁨과 고난은 동시에 따르기 마련입니다. 고난만 있는 삶, 기쁨만 있는 삶은 없습니다. 요는, 가치의 문제입니다. 어떤 삶을 따르든 중심 가치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길어졌습니다. 이제 결론을 내릴 때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의 길은 상식을 거스른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기쁨을 누리는 길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 사실을 확인하고, 어떻게든 그 삶을 구현하고자 애쓰는 공동체입니다. 상식적으로 지배되고 있는 질서와 가치관과 결별하고 전혀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근본적 대안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들은, 모든 피조물은 아귀가 맞지 않는 현실의 세계와 절연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믿고 거기로부터 오는 진정한 기쁨을 미리 맛볼 수 있는 여러 시도들을 할 수 있습니다. 불완전하지만, 또한 아직 완전한 하나님 나라와 결코 동일시할 수 없지만, 우리가 굳이 교회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힘의 지배질서를 구축한 로마제국이 별볼일 없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두려워해 박해를 한 까닭이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엄연히 로마의 힘의 지배질서가 구축된 도시 한가운데 일상에서, 그 질서의 원리와는 전혀 상반된 삶의 원리,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저력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광야의 수도자 집단도 아니오, 특별히 힘으로 무장된 무장세력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일상의 삶 한복판에서 새로운 삶을 일군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의 관리나 군인으로 봉사하기도 하고, 또한 상인으로 노예주로, 또는 반대로 노예로, 가난한 사람들로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또한 그것을 굳이 피해가지도 않고 바로 그 삶 한 복판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따랐던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힘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한결같이 철저한 의식으로 무장된 결사체가 아닙니다. 어떤 일을 효율적으로 추구하는 활동단체도 아닙니다. 일상에서 저마다의 일을 담당하면서도 잠시라도 뜻을 함께 나누고 의미있는 삶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친교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에서 우리의 일상을 뒤바꾸는 조용한 혁명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내가 변하고 더불어 사회가 더불어 변화해간다는 확신이 생길 때 우리는 참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도 바로 그 기쁨을 확인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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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