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같음과 다름: '쉬볼렛' '시볼렛' - 삿 12: 5~6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2 00:04
조회
10048
2002년 1월 27일(일) 오전 11:00  천안 살림교회

제목: 같음과 다름 - '쉬볼렛' '시볼렛'

본문: 사사기 12: 5-6


성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어쩌다 나오는 게 아니라 사실은 맨 이상한 이야기들 천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본 본문도 이상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우리에게 상당히 낯선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사시대 소위 '길르앗과 에브라임 사이의 내전'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의 한 대목입니다. 사사시대 하면, 우리는 쉽게 이상화해서 이해합니다. 모든 지파가 평등하게 살아가면서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긴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회체제의 기본 성격, 그것도 왕조시대에 비교해 볼 것 같으면 맞는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들여다보면 그 시대라고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변의 나라들과 전혀 다른 성격의 나라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 때문에 수없이 많은 위기에 봉착해야 했던 시대가 바로 사사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그 위기를 불러일으킨 요인 가운데 하나가 지파 공동체 내부의 갈등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사건은 바로 대표적인 내부적 갈등 가운데 하나인 길르앗과 에브라임의 전쟁입니다. 그래도 이 전쟁은 국지적 전쟁이었습니다만, 사사기 19장이하의 내용이 가 전하는 바를 따르면 온 이스라엘과 베냐민 지파와의 전면적인 내전을 벌어야 했던 상황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후대의 역사가들, 특히 왕권을 옹호했던 역사가들이 삽입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왕이 없던 사사시대에 그렇게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민족내부가 일사분란하게 통제될 수 있는 왕권체제가 정당한 것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삽입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후대 왕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단순한 가필이라기보다는, 아마도 상당 부분 실제 상황을 반영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사사시대가 그야말로 '순결한' 이상적 공동체 시대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사건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사사 입다입니다. 잘 알다시피 사사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민족들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는 상황에서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선 군사적 지도자들입니다.  입다도 그러한 사사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입다는 길르앗이라는 사람이 창녀 몸에서 얻은 아들이라 전해지고 있어 그 출생부터 흥미를 끄는 인물입니다. 또 암몬군과 싸울 때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 준다면 전투에서 끝나고 집으로 갔을 때 자신을 처음 마중 나온 사람을 번제물로 바치겠다고 서원한 일로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기 외동딸이 나와 그 외동딸을 번제물로 바쳤다는 이야기가 성서에는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번제물로 드려질 뻔했다가 구출된 사건과 비교하면, 아무런 구원의 손길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끝내 번제물로 드려진 입다의 딸의 처지는 매우 흥미로운 관심거리이기도 합니다. 가문을 이어야 하는 아들은 구출되고 가문을 잇는 것과 상관없는 딸은 희생제물로 드려지는 것이 정당화되는 맥락을 우리는 다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초점은 그게 아니기에, 그저 주인공 입다와 관련된 이야기의 하나라는 사실만 언급하고 넘어갑니다.


하여간 요단강 동편의 길르앗 출신인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 노릇을 할 때의 일입니다. 그가 암몬군을 격파하고 났을 때 에브라임의 장정들이 그를 찾아와서 항의를 했습니다. 항의의 내용은, "네가 암몬군을 쳐부수었다는데 어째서 우리 에브라임 사람들은 부르지 않고 너만 공을 세웠느냐? 참 섭섭하다! 우리도 끼워 주었으면 함께 공을 세울 수 있었는데 그럴 수가 없는 일이다. 네 일족을 다 불에 태워 죽여 버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항의 정도가 아니라 아예 협박을 하면서 선전포고를 한 셈이었습니다. 그러자 입다가 대답합니다. "야!  내가 같이 싸우자고 이야기할 때는 꿈적도 안 하던 놈들이 이제 내가 목숨을 걸고 싸워 이겨놓고 나니까 허튼 소리하는 것 아냐!" 하면서 에브라임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화가 난 입다는 길르앗 사람들을 불러모아 곧바로 에브라임 사람들과 싸워 무찔렀습니다.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 시비인 것 같은데, 곧바로 내전으로 치닫게 된 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평소에 입다가 속해 있던 길르앗 사람들은 질시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역사적 연원을 오늘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12지파 가운데 독자적인 지파의 하나로 인정받지 못했던 길르앗 사람들은 므나쎄와 에브라임 사이의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인 것이라고 성서 본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의 주장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길르앗 사람들은 가문의 혈통도 불확실한 사생아 집단과 같은 무리로 여겨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시원찮은 무리 가운데 한 놈이 나타나서 공을 세웠다고 하니까 아마도 순수 혈통, 전통을 자부하고 있던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시비의 이유가 되고, 여기에 평소에 수모를 당했던 길르앗 사람들은 발끈해서 '요 참에 이 놈들을 싹쓸어 버리자' 해서 극한의 유혈사태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재미있는 일화가 등장하는데, 바로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길르앗 사람들이 요단강 어귀를 지키고 있다가 도망치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붙잡아놓고 불신검문을 합니다. '쉬볼렛'이라는 발음으로 아군과 적군을 가릅니다. '이삭' 또는 '급류'를 의미하는 이 단어의 발음이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쉬볼렛'이라고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고, 그와 달리 '시볼렛'이라고 하면 에브라임 사람이라고 단정해 그 사람을 잡아 죽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죽인 사람이 무려 사만이천명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인구를 생각할 때 그 인원이 그대로 사실은 아니겠지만, 대규모의 유혈 참극이 벌어졌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발음의 차이를 놓고 적군과 아군의 차이를 구별하는 전법은 이 때만이 아니라 중세 시대 유럽에서도 흔히 있었고 2차 대전중에도 유럽의 접경지대에서는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우리로서는 그 미묘한 차이를 알 수 없는 단어의 발음의 차이가 생과 사의 갈림길을 나타내는 지표가 된 사건입니다. 이 '차이'가 뭐길래 도대체 생과 사의 가늠자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까? 물론 전투의 상황이었으니 그것은 기발한 전술의 한 방편이었다고 인정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전투가 벌어지기 이전에 이 두 집단 사이에는 이미 화합할 수 없는 차이를 갖고 있었고, 발음은 그것을 입증하는 근거로 역할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잘 아는 이야기 있지요. 우리 나라에서는 지금 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의 차이가 문제가 되고 있지요. 그런데 예전에 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이 만나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경상도 사람의 입에서 "뭐꼬?" 하는 튀어나왔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전라도 사람이 이 말을 못 알아듣고 "'뭐꼬'가 뭣이다냐?"라고 했다고 그래요. 그랬더니 다시 경상도 사람이 "'뭣이다냐'가 뭐꼬?" 하고 소리치고 결국은 두 사람이 "'뭐꼬'가 뭣이다냐?", "'뭣이다냐'가 뭐꼬?"를 놓고 다투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원래 전승은 경상도 사람과 함경도 사람이 다투는 이야기입니다. "'뭐꼬'가 무시기?" "'무시기'가 뭐꼬?"했다는 것이지요. 그 이야기를 제가 살짝 바꿨습니다.

또 있지요? 제가 언젠가 이야기했던가요? 여러분 '국수'와 '국시'의 차이를 압니까? 국수는 '밀가루'로 만들고 국시는 '밀가리'로 만듭니다. 밀가루는 '봉투'에 담겨져 있고 밀가리는 '봉다리'에 담겨져 있습니다. '봉투'는 '혓바닥'으로 침을 발라 붙이고 '봉다리'는 '샛바닥'으로 침을 발라 붙입니다. '혓바닥'은 '목구멍'으로 밥을 넘기고 '샛바닥'은 '목구녕'으로 밥을 넘깁니다. '목구멍'은 '똥구멍'으로 통하고 '목구녕'은 '똥구녕'으로 통합니. 또 알지요, '학교'와 '핵교'의 차이? 학교는 '다니고' 핵교는 '댕긴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웃을 수 있는 까닭은 그 두 말이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똑 같은 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둘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란 없습니다. 다만 발음상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이 둘의 차이를 모르고 자기가 사용하고 있는 것만 알고 있고 그것만이 제대로 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하나는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없어져야 할 것이 되고 그래서 자기 것을 강요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동일하되 발음상의 표현상의 차이라는 것을 알면, 그 차이는 우리의 모국어를 훨씬 풍부하게 해 주는 것들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 발음에는 저러저러한 기질과 풍토가 반영되어 있겠고, 이 발음에는 이러이러한 기질과 풍토가 반영되어 있겠거니 인정하니까 싸워야 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와 같은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알고 보면 다르지 않은데 그 외관을 보고 다르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다르니 상종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럴 경우 그 상종하지 못할 사태를 해결하는 방법은 다른 한편이 어느 한편과 같아지는 방법입니다. 어느 하나가 '표준말'이 되면 어느 하나는 '사투리'가 됩니다. 어느 하나가 '중심'이 되면 어느 하나는 '주변'이 됩니다. 어느 하나가 '정상'이면 어느 하나는 '비정상'이 됩니다. 이러한 통념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생각이요 질서입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과 같은 극단의 상황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오늘 세계질서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 또한 그렇습니다. 유대인이나 아랍이나 모두 아브라함이라는 한 조상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 기독교인도 즐겨 쓰는 히브리어 '샬롬'(SLM)과 아랍어 '이슬람'(SLM)이 같은 말이라는 사실, '알라'가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표준으로 하나를 배척해버리고 맙니다.

겉으로 드러나기에 다르지만 하나의 근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차이는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또 다른 측면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는 일률적으로 재단할 수 없습니다. 누구는 이런 사연 때문에 이렇게 살아가고 또 누구는 저런 사연 때문에 저렇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모습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옳고 그름도 없고, 어떻게든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 정당화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보편적 가치 기준이 있을 수 없고 그것이 허구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인간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삶의 방식을 추구해야 하고, 진정한 삶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추구합니다. 신앙이라는 것도 다름 아닙니다. 우리 삶의 중심적 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의 과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삶의 다양한 방식과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은, 언젠가는 상대화될 수 있고 또 다른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을 절대적인 것인 냥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공통되고 누구에게나 추구되어야 할 어떤 것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함께 추구해야 할 가치 함께 누려야 할 삶의 방식을 추구하되, 그것을 추구하는 방식의 상대적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것입니다. '쉽볼렛'이나 '십볼렛'이나 모두 마찬가지로 '흐르는 물(굽류)'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고 의사소통할 수 있으면 그것을 한 가지로 알아야지, 발음이 다르다고 그것이 전혀 다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표준으로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무모함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친구로서, 가난한 사람들에 복음을 전하는 이로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정상'과 '중심'이라는 하나의 기준 때문에 내몰렸던 이들을 복권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를 때와 달리 정말 가난한고 병든 사람을 치료해줬을 때, 그들에게 '가라!'고 하신 말씀, '따르라!'가 아니라 '가서 제사장에게 네가 낳았음을 보이라!'고 한 말씀의 의미를 우리는 의미심장하게 봐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인정입니다. '너를 끼어 주지 않았던 그 사회에 가 권리를 찾으라'는 선언입니다. 소위 정상인들이 생각했던 유일한 잣대가 유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웅변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자기만의 기준과 자기만의 아성 때문에 마땅히 인정해야 할 또 다른 존재 또 다른 삶의 측면을 외면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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