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농부가 봄을 맞이하듯이 - 마태복음 25: 1~13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2 00:11
조회
11213
2002년 2월 24일(일) 오전 11:00  천안 살림교회

제목: 농부가 봄을 맞이하듯이

본문: 마태복음 25: 1-13


지난 겨울이 유난히 따뜻하고 짧았다 하지만, 그래도 겨울은 겨울입니다. 새 봄의 훈기가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계절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따스한 볕과 훈훈한 바람, 그리고 대지를 적시며 생명들을 되살아나게 하는 봄비를 보며 우리는 확실히 우리에게 봄이 다가왔다는 것을 느낍니다.

제가 살고 있는 시골집 마당을 들러 보면 그 봄의 기운을 더욱 실감합니다. 가장 먼저 봄소식을 알리는 것으로, 벌써 두 세 주 전부터 움을 틔우기 시작한 상사화 싹이 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튤립 싹이 두터운 땅을 뚫고 나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겨우내 찬바람에 시달려 잎파리 끝이 누렇게 된 보리 싹들도 새 기운을 받고 쑥쑥 자라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벌써 나비가 나르는 것까지 마당에서 목격했습니다.

아마도 한 두어 주가 더 지나고 나면 이 교회당 안에도 봄기운이 물씬 돌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교우들께서는 예배중 조는 경우가 흔치는 않습니다만, 아마도 나른해지는 몸 때문에 졸음과 싸우는 분들이 한 분 두 분 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때는 봄이 완연해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하여간, 늘 되풀이되며 찾아오는 계절의 변화이지만 그 때마다 우리는 새삼스러운 감회와 느낌을 갖습니다. 우리 교우 가정들은 한 가정을 제외하고는 농삿일과는 직접적으로 관계없지만, 특별히 농삿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봄은 일년 농사를 시작하기 위한 여러 일들로 잔뜩 분주해지는 절기입니다. 모든 일에 다 정해진 때가 있는 법입니다만, 농삿일만큼 정해진 때가 중요한 일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정월 보름 어간이 되면 해충을 방제하기 위하여 논밭 두렁을 태우는 일에서 시작하여, 확연하게 봄기운이 감돌면 논밭에 거름을 뿌리고 땅을 가는 일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 파종할 씨앗을 손질하여 뿌리게 됩니다. 그 다음은 웃거름 작업과 잡초 제거, 그리고 여러분이 다 아는 대로 적절하게 작물을 가꾸어야만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때 그때마다 해야 할 일들 가운데 어느 것 한 가지만이라도 소홀히 하게 되면 한해 농사는 영 그르치게 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상식입니다.        

하다 못해 우리가 가정에서 화분 하나 가꾸는 것도 제때 제때를 맞추지 못하면 낭패를 보기 일쑤입니다. 봄볕이 따뜻하다고 해서 성급하게 아예 밖에 내 놓았다가는 꽃샘추위에 동해를 입기 십상이요, 봄이 다 되었는데도 실내에만 둘 것 같으면 웃자라기만 해 식물이 힘이 없고 꽃을 볼 수 없게 됩니다. 물을 제때에 주지 못하거나 거름을 해 주지 않아도 안 되고, 분갈이를 해 주지 않아도 화분 가꾼 보람이 없게 됩니다. 하여간,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로 확인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다 때가 있고 그 때에 맞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야만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와 같은 사실을 새삼 확인합니다. 우리의 신앙 역시 그때 그때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헛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말씀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로 알려져 있는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열 처녀가 있었는데 다섯은 미련했고 다섯은 슬기로웠다고 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은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은 준비하지 못한 반면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잔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함께 준비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밤중에 결혼식을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 경우에 신부들은 횃불을 준비해 신랑이 올 때까지 춤을 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여기서 말하는 등잔은 말 그대로 등잔이 아니라 횃불이었을 것이고, 여기에 사용된 기름은 올리브로 만든 기름이었다고 합니다.

하여간 횃불만 덜렁 들고 있는 미련한 처녀 다섯과 횃불과 기름을 다 같이 들고 있는 슬기로운 처녀 다섯이 있었는데, 신랑들이 밤늦게까지 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들 깜박 잠이 들었는데, 신랑이 왔으니 마중 나가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타고 있던 횃불은 꺼져가고 있고 상태였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미리 준비한 기름으로 연료를 보충하여 신랑들을 맞아 잔치에 들어갔지만,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구하러 간 사이에 문이 닫혀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신랑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 예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언제 오실지 항상 대비하고 있으라는 종말론적 신앙의 자세를 일깨워 주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서두에서 '하늘 나라'는 이와 같은 것이라고 말문을 열었는데, 결론에서 '그날'과 '그때'를 말함으로써 하늘 나라의 도래와 주님의 재림을 동일시하는 종말론적 성격을 분명히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달란트의 비유나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서 이와 같은 종말론적 성격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사실, 우리 한국 교회에서 일어났던 종말론적/말세론적 신앙운동이 지닌 문제점 때문에 종말론적 신앙 자체를 위험시하기도 합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 일어난 많은 종말론적 신앙운동이 비성서적일 뿐 아니라 반사회적이어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 도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신앙 자체를 위험시하는 경향이 없잖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날'과 '그때'를 기다리는 종말론적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요, 바로 그 신앙 때문에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참된 종말론적 신앙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이와 같은 종말론 신앙의 참된 모습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항상 깨어 준비하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예전에도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어떤 집회에서, 성서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가장 부러운 사람이 누구냐고 했더니 젊은이들의 답변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다가 마지막 순간에 구원받은 강도라고 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평생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마지막 순간의 선택으로 구원받기를 바라는 기대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예수 믿으라'고 하면, '지금까지 별 탈 없이 그럭저럭 살아 왔는데 앞으로도 그럭저럭 살다가 죽기 전에 예수 믿으면 되지' 하는 이야기들도 합니다.

그러나 죽고 사는 일이 제 마음대로 됩니까?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떤 시대에도 인생사가 그렇거니와 더욱이 오늘의 시대는 누구나 항상 위험에 처할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베크는 말하기를, 현대문명은 발전하면 할 수록 구조적으로 위험요소를 더욱 가중시키는, 한마디로 '위험사회'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통찰입니다. 어쩌다 재수 없으면 위험한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는 누구든 '구조적'으로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요새 흔히 하는 말로 '인명은 제차'라는 말도 하지 않습니까? 자동차는 '악마의 선물'이라고도 합니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든 것이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도구 역할을 하게 된 것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기가 죽을 날을 예측하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구원받을 준비를 해야지' 하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하며 무모한 일입니다.

종말론적 신앙이란 그와 같은 안일한 삶의 자세, 신앙의 자세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이 그때를 알 수 없기에 언제든 그때가 오더라도 아무런 문제없이 그때를 맞이할 수 있는 준비태세를 갖추는 신앙입니다. 한 순간 한 순간,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는 신앙입니다. '이때 못한 것 저때 하지, 그때도 못하면 또 다른 때 하지'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못하면 좀이 쑤셔 견디지 못하며, 내 가까이 있는 사람이 바른 삶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면 안타까워 견디지 못하는 신앙이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집도 팔고 논밭도 팔아 그 돈을 엉뚱한 데 바쳐 엉뚱한 사람만 살찌우며 하늘만 쳐다보며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종말론적 신앙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 때를 예측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언제든 그때가 오더라도 거리낌이 없도록 준비하는 자세가 바로 종말론적 신앙의 자세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1-12절은 말합니다.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라는 신앙이요,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간구하는 신앙의 참된 자세입니다. 우리는 그 날이 속히 오도록 절박한 심정으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첫걸음은 우리에게 주어진 한 순간 한순간, 하루하루를 깨어 있는 자세로 임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미래에 대한 소망을 상실해 버린 오늘 세상의 현실,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세속적 욕망과 신앙을 곧바로 일치시켜버리고 있는 오늘의 교회의 상황에서, 이와 같은 종말론적 신앙을 재확인하는 것은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 모두가 깨어,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이 교회가 활기에 넘치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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