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이제부터 사람을 낚을 것이다 - 누가복음 5:5-11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2 00:26
조회
8998
2002년 5월 5일(일) 오전 11:00  천안 살림교회

제목: 이제부터 사람을 낚을 것이다

본문: 누가복음 5:5-11


기억하시지요?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지난 주 말씀과 중복되면서 연이어집니다.

제가 작정을 했습니다. 목회를 오래 하신 목사님들께서는 목회자와 교우들간의 깊은 공감을 위해 종종 연속설교를 할 것을 권합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 말씀을 준비하면서부터 오늘 말씀을 연이어 함께 더 나누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지난 주일 예배가 끝나고 교우 가운데 한 분이 '절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 이르지 못하고 얕은 곳에서만 맴도는 세태를 개탄해야만 하는 상황이 40여 년 전이나 오늘이나 전혀 다르지 않은 사실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도 사실 그렇습니다. 수없이 절망을 합니다. 40여 년 전과 대비해서만 그럴까요? 성경공부를 하면서 수 차례 나누는 이야기이지만, 성경을 들여다보면서 2천년 전 3천년 전에 벌어졌던 일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는 현상을 확인할 때면 더더욱 절망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성서는 어쩌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의 역사를 전한다기보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의 흔적을 더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구원의 메시지인 것은 그 절망의 상황 가운데서도 언제나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역사를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거슬러지는 현실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되묻고 거기서 희망을 발견하는 사람들의 믿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갈 지(之)자' 걸음이지만, 절망적인 현실 가운데서 좌표를 잃지 않고 전진해나간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정치 사회적 현실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날마다 부정부패 사건을 접하면서 극도의 절망감을 갖습니다. '이 정권마저도 별 수가 없구나, 딴 놈이 정권을 잡아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꼭 그럴까요? 그래도 달라진 것들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최근의 부정부패는 과거 정권 치하에서의 구조적 정경유착에서 비롯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구조적 성격을 띠기보다는 인적 친분 관계에 의해 빚어진 사태들이라는 점에 달라졌습니다. 따라서 그 규모 면에서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축소되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예전 같으면 눈감아버릴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문제시되고 있는 것 자체가 달라진 상황입니다. 비교적 투명한 관료사회를 일찍 정착시킨 서구 국가들에서는 우리 돈으로 치면 1-2백만원 수준의 판공비를 잘못 사용하거나 단지 몇 만원의 출장비를 잘못 사용해서 시장이나 장관이 책임지고 사퇴를 하는 경우를 봅니다. 부정부패를 재는 척도가 점점 엄밀하고 예민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래도 변화로 인정하고 거기에서 희망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너무 궁색한가요? 단순히 정도의 차이를 간과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정도의 차이를 간과하지 않게 만드는 척도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바꿔 말하면 절망적 상황 가운데서도 희망의 좌표를 잃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바울이 고백했지요.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전 15:32). 날마다 절망하며 탄식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부활의 소망을 바라본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비록 우리들이 삶이 여전히 얕은 물가에서 맴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깊은 데 이르면 달라지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기대감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처음 부르신 장면을 전하고 있는 오늘 본문 말씀은 크게 두 가지의 초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우리가 함께 나눴던 "깊은 데로 나가거라" 하는 초점이 그 첫 번째요, 그러면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하는 초점이 그 두 번째입니다. 깊은 데 그물을 던지는 행위와 사람을 낚는 것이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내적으로 깊이 연관된 사건들입니다. 다시 한 번 환기하지만, 그 깊이에 도달한 사람, 그 깊이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인도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인도하는 것은 강압적인 힘이나 고집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뛰어들 수 있는 품이 있어야 하고 뛰어내릴 수 있는 밑바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깊은 데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 말씀과 사람을 낚을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 사이에는 하나의 극적인 반전의 계기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그 일행의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따라 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고, 두 배에 가득해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었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이렇게 뜻밖의 어획을 하였으면, '예수님 감사합니다!' 큰 소리를 외쳐야 할 것 같은데, 베드로는 전혀 뜻밖의 반응을 보입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이 황당한 고백, 이 고백이 의미하는 바가 도대체 뭘까요? 베드로의 이와 같은 반응은, 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의 두려움입니다. 쉽게 말하면 경이감이지만, 그 경이감을 넘어선 경외감입니다. 모든 믿음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자신의 상식과 능력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이에 대한 경외감입니다. 그 깊이를 깨닫고 자신을 온전히 비우는 태도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상식적인 차원에서, 고기잡이로 치자면 목수 출신인 예수님보다 베드로가 훨씬 나을 것입니다. 고기잡이에 잔뼈가 굵어온 사람입니다. 베드로와 그 친구들은 고기잡이의 비결을 알만큼 다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그 상식을 벗어나는 사건이 눈앞에서 펼쳐졌습니다. 거기에서 이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가 헛살았습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하는 말뜻이 그것입니다.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이 고백은 말 그대로 떠나달라는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사태를 두고 어쩔 줄 몰라하는 베드로의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의 상식을 뛰어 넘어선 그 차원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베드로와 그 친구들은 이제 뭘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 처합니다.

아마도 상식의 차원에서 판단했다면, 애초부터 깊은 데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설령 고기도 못잡는 마당에 궁하니까 그 말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저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보였을 것입니다. '이 사람 이상한 사람일세' 생각하면서 '고맙수다!' 정도로 인사를 했겠지요. 만일 그랬다면 그들은 여전히 삶의 깊이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상식적 잣대를 고집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바짝 엎드렸으며 다른 친구들도 두려워했습니다. 내가 안다고 생각해 왔던 것,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지금까지 얕은 물이 전부인 것으로 알았는데, 저 깊은 물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고 하십니다. '너희가 내 앞에서 그 존재의 깊이, 삶의 깊이를 알고 어찌할까 두려워했다면, 이제 너도 다른 사람 앞에서 그 깊이를 깨우치게 할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사로잡은 바와 같이 이제 너도 다른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제가 어렸을 때 그런 장난을 많이 쳤지만, 깊은 물을 만나야 돌이라도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바닥이 훤히 보이는 웅덩이에 돌을 던지고 마음이 일어납니까? 흙탕물이나 튕길 터인데 뭐하러 던지겠습니까? 그러나 깊은 물에 돌을 던지고 나면 '풍덩' 가라앉는 소리도 오묘하지만 그 파장 또한 오묘합니다. 그래서 길 가다가 깊은 물을 만나면 아무 이유없이 돌이라도 한 번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너무 새파랗고 깊게 보이면 지레 겁을 먹기도 합니다. 저 깊은 곳에 뭐가 있을까라는 기대와 더불어 나마저 빨려 들어갈 것 느낌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함께 이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느꼈던 경외감을 그렇게 비유할 수 있겠지요.

'그 경외감을 가진 네가 이제 다른 사람에게도 그 경외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전하신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다!', 진정으로 사람을 이끌리게 만드는 것은 알고 있고 의식하고 있는 차원이 전부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평가할 때 종종 '잔머리 잘 굴린다'는 말을 합니다. 꼼수가 다 보이는 생각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을 이해하기는 쉽지만, 그런 사람에게 잘 끌리지는 않는 법입니다. 자기 스스로는 애써 잔머리를 굴리지만, 그게 다 드러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생각을 다 들여다봅니다. 그러니까 결국 잔머리에 능한 사람은 대개 그 잔머리에 자신이 걸려 넘어집니다. 남들이 다 아는 꼼수를 부리고 있으니, 그것을 이용해 그 사람을 넘어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크레믈린'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만,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뭔가 알 듯 모를 듯한 깊이가 느껴지는 사람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 사람만의 어떤 기품을 사람들은 용납하게 됩니다. 저 사람에게는 뭔가가 있다는 기대감과 함께 그에게 이끌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낚을 수 있는 깊이를 가진다는 것은 그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낚는다는 것은, 먼저 사람을 낚고자 하는 그 사람에게 깊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 사람을 낚는다는 것은, 내가 대하는 상대에게도 그 깊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내가 파악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상대를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들에게 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남들이 알지 못한 그 어떤 것을 지니고 있듯이 상대 또한 그와 같은 깊이를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주님!" 하며 무릎을 꿇었던 것과 같은 자세입니다. 상대의 깊이를 인정하는 태도는 진정한 인격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것은 상대의 뜻을 존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교 신학자 마르틴 부버는 사람의 관계를 세 가지 형태로 나눴습니다. '나와 그것'과의 관계, '나와 그이'와의 관계, 그리고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나와 그것'과의 관계는 나와 물질적 대상과의 관계입니다. 물질적 대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기계적입니다. 그저 관조하는 관찰자의 시선일 뿐입니다. '나와 그이'와의 관계는 그보다 한 단계 발전한 형태입니다. 그러나 그 경우 역시 나는 제3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인격의 관계, 말 그대로 '관계'는 '나와 너' 사이에 형성됩니다. 상대를 인격으로 대할 때 나 역시 진정한 인격으로 등장합니다. 피상적인 관찰자의 시선을 넘어 진정한 교류가 형성되고 서로의 인격의 변화가 가능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 수없이 많은 표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인격적 호칭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3자 혹은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나와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고 나를 변화시키는 존재로 인식하는 방식입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것은 그렇게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누군가 그랬지요. 캬바레에서 신나게 함께 춤을 췄는데, 다음날 우연히 알고 보니 터미널 식당 아줌마였다고. 그래서 서로 시선을 피했다고. 인격적인 관계는 그렇게 껍데기로만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깊이의 차원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겉모양이 어떻든 그 사람의 내면을 존중하고 그 사람의 뜻을 존중하며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낚는다는 것의 두 번째 차원입니다.

오늘은 마침 어린이주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린이를 대할 때, 코흘리개, 떼쟁이, 말썽꾸러기, 철부지로만 보면 언제나 우리들은 어린이를 무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어린들 앞에서 할 말은 "애들은 가라!" 하는 말뿐입니다. 그러나 그 어린이 역시 누군가의 부속물이기 이전에 하나의 생명이고 또 그 안에 앞으로 어찌 펼쳐질지 모르는 깊은 꿈을 가진 존재라고 바라보면 어린이라 해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 무한한 잠재적 가능성과 그 품은 뜻을 인정하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내가 그 뜻을 높이 샀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별 볼 일 없어 보여도 그 품은 뜻을 높이 사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진정로 사람을 낚기 위해서는 상대의 뜻을 높이 사야 합니다. 이것이 깊이의 차원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사람을 낚을 수 있을 때, 세상의 변화의 기초가 마련됩니다. 이 교회가 그렇게 사람을 낚을 수 있을 때 이 세상이 변합니다. 교회는 표면적인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결속된 집단도 아니오, 기능적 목적집단도 아닙니다. 진정으로 깊이의 차원에서 서로 만나고 거듭나기를 원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과 깊이 만나고 사람과 사람이 깊이 만나는 데서 자신이 변화되고 세상이 변화되기를 원하는 공동체입니다. 그 깊이의 차원을 상실한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무슨 혁혁한 사업으로 그 존재의의를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자기만족적인 울타리 안에 갇혀 있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받은 은혜를 감사히 알기 때문에 그 은혜를 나누기 위해서, 그리고 세상에 복음을 펼치기 위해 많은 일들을 해야 하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아니 그와 더불어 자신의 변화와 관계의 변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교회생활, 신앙생활이라면 우리는 정말 그 깊이의 차원을 깨닫고 있는 것인지를 의심해봐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 그 차원에 이르지 못했다고 절망하지 맙시다. 그 차원을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희망의 징표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그 희망을 다시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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