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 요한복음 8:54~59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2 00:57
조회
8217
2002년 8월 18일(일) 오전 11:00 천안 살림교회
제목: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본문: 요한복음 8:54-59
지난 주간에는 한일 청년들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단 대전노회와 결연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교토교구 청년들과 우리 한국 청년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저는 노회 해외선교위원으로 되어 있어 그 모임을 내용적으로 꾸리는 역할을 맡았고, 덕분에 아주 분주한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그런 국제적 만남을 처음 경험한 것은 아니기에 저에게는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이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만난 청년들에게는 그 자체로 신선하고 경이로운 경험일 수 있고, 그리고 그 모임을 꾸리고 지켜보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신선한 만남의 효과가 늘 새삼스럽습니다. 특히 일본 사람들과의 만남은 불행했던 두 나라의 역사 때문에 늘 특별한 감회를 갖게 만듭니다. 마침 8.15일, 우리에게는 해방절 또는 광복절로, 그러나 일본에게는 종전기념일 내지는 패전기념일로 지켜지는 날이 끼어 있는 기간의 만남이어서 감회는 더욱 특별할 수도 있었습니다. 더욱이 두 나라 청년들의 만남의 주제가 '한일 공동 역사인식'이어서 그 의미는 확실히 더 특별했습니다.
이번에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한 한 청년은, 예전에 탑골공원에서 한 할아버지한테 마구 꾸중을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긴장을 하고 왔는데 너무나 따뜻한 만남이어서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또 역사인식의 문제로 청년들 사이에서 싸움이 붙으면 수도 적은데 어찌하나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해 좌중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사실 민간 차원에서의 만남은 늘 그렇습니다. 정부 대표자간의 만남에서 이해득실을 따지는 긴장감과 달리 이미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경험을 하기 때문에 편안하고 따뜻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간의 갈등을 극복하는 길은 역시 국가간 정부간 차원에서보다는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만남이 있을 때마다 새삼 확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늘 끊이지 않는 물음이 또한 제기됩니다. 민간 차원에서는 그렇게 잘 통하는데 국가적 차원에서 어째 그렇게 답답할까? 또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다시피 '일본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그렇게 친절한데 어째 '일본국민'은 많은 나라의 사람들에게 두려운 존재로 인식될까 하는 것과 같은 물음입니다.
이 물음은 한일간의 관계 또는 국가적 관계에서만 제기되는 문제만은 아닙니다. 한 사회 안에서 개인과 사회적 관계를 생각할 때도 똑같이 제기되는 물음입니다.
여러분, 얼마 전에 장상 총리 지명자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었습니다. 개인적 차원으로 말하면, 국회의원들이 총리 지명자를 심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 오히려 재 묻은 개가 똥 묻은 개 나무라는 격입니다. 아마도 제가 보기에는, 국회의원들의 상당수는 총리 지명자보다 훨씬 더 심각한 도덕적 결함을 지닌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약간 빗나간 듯한 말씀입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도덕성 때문에 부결되었다기보다는 사실상 총리지명자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부결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똑 같은 흠을 지닌 남성이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수행능력을 들어 동의안을 통과시켰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난 번 총리지명자 임명동의안이 도덕성 문제 때문에 부결된 사실은 순수하게만 바라볼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성을 이유로 부결한 그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잘 한 일입니다. 우리의 공직 사회에 요구되는 도덕성의 기준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지표를 확인해주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더 흠이 많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결정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이 사태에서 제가 주목하는 현상은 개인과 사회적 관계입니다. 우리가 일본사람들을 대할 때 느끼는 것처럼 개인적으로 선한데 집단적으로 악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면에 장상 총리 임명동의안 부결 사태에서처럼 개인적으로는 문제가 많지만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단에서는 거꾸로 옳은 결정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양이 이렇다고 보면, 우리에게 적잖은 혼란이 올 법도 합니다.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입니다. 그 고민을 한 마디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말로 표현했고, 그것을 그대로 책 제목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개인은 선할 수 있지만 그 개인들이 모인 사회는 결코 선할 수 없다, 그렇게 순진하게 낙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함축합니다. 그 반대의 측면에 대해 집중하지는 않았지만, 그 표현은 그 반대의 경우도 시사합니다. 선한 집단 안에 있는 개인들의 불의도 문제꺼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여간 이 말은 개인에게 요구되는 과제와 사회에 요구되는 과제가 다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짚어내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개인에게 아무리 선하게 살라고 가르쳐도 그럴 수 없는 사회적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종교적 가르침은 개인적 차원의 도덕적 교훈에 치중해 있습니다. '착하게 살아라. 그러면 좋은 세상이 된다', 이것이 대개의 종교적 가르침의 요지입니다. 인격의 변화 마음의 변화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결코 마음먹은 대로 그렇게 되지 않지요. 그래서 니버는 그와 같은 생각은 참 순진한 생각이라 말합니다. 사회적 관계에서는 다른 태도가 요구된다고 봅니다. 개인적 '윤리' 내지는 '도덕'과 구별되는 '정치'입니다. 사회적 관계에서는 선한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정치는 때로는 타협과 협상을 의미하기도 하고 때로는 투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서에서 악의 실체를 지칭할 때 '사탄'이라는 말도 사용하지만, 그와 함께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에베 2:2)라는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개인의 선한 의지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힘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상황은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말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는 상황입니다. 사실 교리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원죄'라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누구나가 죄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가 헤어나기 어려워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필연적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인 것입니다. 싹수가 노래 처음부터 글러먹은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현실입니다.
아마도 그렇게만 생각하면 참 절망적입니다. 싹수가 처음부터 노랗다고 한 것보다는 위안이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절망적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전통적 신학은 분명한 하나의 답변을 제시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찌할 도리가 없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은 정말 감사할 일입니다. 이 사실이 인간들이 현실적으로, 보편적으로(필연적으로가 아니라) 지닌 한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거부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 현실을 가장 진솔하게 들여다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생각하며 엉뚱한 결론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다 소용없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상황에서는 개인적인 도덕도 소용없고 사회적인 정치도 소용없어집니다.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의 윤리적 불감증 사회 정치의식의 결여는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도덕만으로 정치만으로 충족되지 않는 것을 신앙으로 충족한다는 분명한 대안을 갖고 있는데, 그 신앙만으로도 다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 다음에는 어떤 대안이 있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 신앙은 숙명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렸듯이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라고 외치면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희망적인 인식을 말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신앙은 언제나 근본적인 자리, 원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신앙은, 개인도 보이고 사회도 보이고 나아가 자연도 보이는 근원적인 자리로 되돌아갈 것을 일깨웁니다.
뚱딴지 같은 본문 말씀, 오늘 저의 긴 서두와 비교해도 뚱딴지 같고 오늘 본문 말씀 자체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은 뚱딴지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모든 인식의 근원이 되는 자리를 환기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유대인들과의 또 하나의 논쟁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권위를 말씀하시는 데 아브라함과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었고,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게 될 것을 즐거워하였고 마침내 보고서 기뻐하였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서두에 유대인들이 말한 것처럼 '귀신들렸다', 곧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에 충분한 말씀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당장 반문합니다. "당신은 아직 나아가 쉰도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여러분은 이 말씀의 뜻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우리 기독교인들은 너무 쉬운 답변을 갖고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한 분이므로 태초부터 계셨으니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사실을 믿는 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요? 제가 보기에는 그래서 '정통'이라는 소리를 들을지 몰라도 내 삶이 변화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교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훨씬 심오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믿는 그 하나님과 더불어 있는 생명을 말합니다. 태초의 그 하나님의 순수성을 지니고 있는 예수님 그 자신, 그리고 생명 자체의 심원함을 말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신앙의 언어요 상징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늘의 과학적 인식으로도 해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 하나하나를 생각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명은 단순히 1-2대에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또는 실험실에서 갑자기 형성된 것도 아닙니다. 요즘 유전자공학이 발달해서 실험실에서도 생명이 탄생하는 일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조차 생명의 원리를 벗어나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 이 세상의 그 어떤 생명도 머나먼 근원을 갖고 있습니다. 생명 하나에 온 우주가 들어있다는 말은 종교적 상징언어일 뿐 아니라 과학적 사실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고 그렇게 깨닫고 있는 사실을 아버지를 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계보의 시조로서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나의 날을 보게 될 것을 즐거워하였고 마침내 보고서 기뻐하였다"는 것도 아브라함이 1세기의 예수를 미리 알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거기서 희망을 가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근원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 근원의 자리에 서면 세상이, 사람이 어떻게 보일까요? 생명의 소중함을 실감하지 않겠습니까?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저거 하나 잘못되면 모두가 잘못된다는 심정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저는, 개인들의 살아가는 방식과 사회 내지는 집단이 존재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윤리와 정치가 구별되는 현실적 상황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그렇게 구별된 것만은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으로 구별되고 정치로 구별되는 것은 방편상으로 구별될 뿐이지, 신음하는 생명의 해방, 구원을 위한 목적에서 한 가지입니다. 일본 사람의 삶의 고통과 한국 사람의 삶의 고통이 근본적으로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지구상의 그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람은 차이보다 공통점을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차이를 무시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차이를 절대화하여 차별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민족간의 고통, 나라간의 고통, 집단간의 고통은 그 차이를 절대화하고 차별화의 근거로 삼은 데서 비롯됩니다. '모두가 인간이다', '모두가 생명이다' 하는 근원적 생각은 개인적 차원에서든 집단적 차원에서든 차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린ㄴ 거기서 비롯된 현실적 고통을 이기기 위해 현실적 지혜를 필요로 합니다. 윤리와 도덕을 정치와 구별해보는 것도 그런 현실적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화되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회혁명으로 인간 자체가 변화된다고만 고정해서도 안 되며, 도덕적 인격적 변화로 사회의 변화가 이뤄진다고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든 인간의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해방의 길, 구원의 길, 곧 희망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신앙은 바로 그 희망의 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의 날을 볼 것을 즐거워하였고, 마침내 보고서 즐거워했다"는 것은 그 희망을 지켰다는 것을 말합니다. 끊임없는 유랑의 생활을 한 아브라함이었지만, 그의 삶을 지탱한 것은 그 희망이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계셨다는 것은, 사람들이 단지 한 계보상의 시조로 고정해놓은 인물의 한계를 넘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정작 하시고 싶은 말씀은, "너희가 절대시하는 아브라함 이 가졌던 그 믿음, 그 희망을 내가 더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 희망을 찾아나서는 무리들입니다.
그 희망을 바라보는 사람들로서 또 다시 새로운 결단을 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이 시간 기원합니다.*
제목: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본문: 요한복음 8:54-59
지난 주간에는 한일 청년들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단 대전노회와 결연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교토교구 청년들과 우리 한국 청년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저는 노회 해외선교위원으로 되어 있어 그 모임을 내용적으로 꾸리는 역할을 맡았고, 덕분에 아주 분주한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그런 국제적 만남을 처음 경험한 것은 아니기에 저에게는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이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만난 청년들에게는 그 자체로 신선하고 경이로운 경험일 수 있고, 그리고 그 모임을 꾸리고 지켜보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신선한 만남의 효과가 늘 새삼스럽습니다. 특히 일본 사람들과의 만남은 불행했던 두 나라의 역사 때문에 늘 특별한 감회를 갖게 만듭니다. 마침 8.15일, 우리에게는 해방절 또는 광복절로, 그러나 일본에게는 종전기념일 내지는 패전기념일로 지켜지는 날이 끼어 있는 기간의 만남이어서 감회는 더욱 특별할 수도 있었습니다. 더욱이 두 나라 청년들의 만남의 주제가 '한일 공동 역사인식'이어서 그 의미는 확실히 더 특별했습니다.
이번에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한 한 청년은, 예전에 탑골공원에서 한 할아버지한테 마구 꾸중을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긴장을 하고 왔는데 너무나 따뜻한 만남이어서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또 역사인식의 문제로 청년들 사이에서 싸움이 붙으면 수도 적은데 어찌하나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해 좌중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사실 민간 차원에서의 만남은 늘 그렇습니다. 정부 대표자간의 만남에서 이해득실을 따지는 긴장감과 달리 이미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경험을 하기 때문에 편안하고 따뜻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간의 갈등을 극복하는 길은 역시 국가간 정부간 차원에서보다는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만남이 있을 때마다 새삼 확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늘 끊이지 않는 물음이 또한 제기됩니다. 민간 차원에서는 그렇게 잘 통하는데 국가적 차원에서 어째 그렇게 답답할까? 또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다시피 '일본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그렇게 친절한데 어째 '일본국민'은 많은 나라의 사람들에게 두려운 존재로 인식될까 하는 것과 같은 물음입니다.
이 물음은 한일간의 관계 또는 국가적 관계에서만 제기되는 문제만은 아닙니다. 한 사회 안에서 개인과 사회적 관계를 생각할 때도 똑같이 제기되는 물음입니다.
여러분, 얼마 전에 장상 총리 지명자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었습니다. 개인적 차원으로 말하면, 국회의원들이 총리 지명자를 심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 오히려 재 묻은 개가 똥 묻은 개 나무라는 격입니다. 아마도 제가 보기에는, 국회의원들의 상당수는 총리 지명자보다 훨씬 더 심각한 도덕적 결함을 지닌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약간 빗나간 듯한 말씀입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도덕성 때문에 부결되었다기보다는 사실상 총리지명자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부결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똑 같은 흠을 지닌 남성이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수행능력을 들어 동의안을 통과시켰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난 번 총리지명자 임명동의안이 도덕성 문제 때문에 부결된 사실은 순수하게만 바라볼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성을 이유로 부결한 그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잘 한 일입니다. 우리의 공직 사회에 요구되는 도덕성의 기준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지표를 확인해주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더 흠이 많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결정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이 사태에서 제가 주목하는 현상은 개인과 사회적 관계입니다. 우리가 일본사람들을 대할 때 느끼는 것처럼 개인적으로 선한데 집단적으로 악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면에 장상 총리 임명동의안 부결 사태에서처럼 개인적으로는 문제가 많지만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단에서는 거꾸로 옳은 결정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양이 이렇다고 보면, 우리에게 적잖은 혼란이 올 법도 합니다.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입니다. 그 고민을 한 마디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말로 표현했고, 그것을 그대로 책 제목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개인은 선할 수 있지만 그 개인들이 모인 사회는 결코 선할 수 없다, 그렇게 순진하게 낙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함축합니다. 그 반대의 측면에 대해 집중하지는 않았지만, 그 표현은 그 반대의 경우도 시사합니다. 선한 집단 안에 있는 개인들의 불의도 문제꺼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여간 이 말은 개인에게 요구되는 과제와 사회에 요구되는 과제가 다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짚어내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개인에게 아무리 선하게 살라고 가르쳐도 그럴 수 없는 사회적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종교적 가르침은 개인적 차원의 도덕적 교훈에 치중해 있습니다. '착하게 살아라. 그러면 좋은 세상이 된다', 이것이 대개의 종교적 가르침의 요지입니다. 인격의 변화 마음의 변화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결코 마음먹은 대로 그렇게 되지 않지요. 그래서 니버는 그와 같은 생각은 참 순진한 생각이라 말합니다. 사회적 관계에서는 다른 태도가 요구된다고 봅니다. 개인적 '윤리' 내지는 '도덕'과 구별되는 '정치'입니다. 사회적 관계에서는 선한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정치는 때로는 타협과 협상을 의미하기도 하고 때로는 투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서에서 악의 실체를 지칭할 때 '사탄'이라는 말도 사용하지만, 그와 함께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에베 2:2)라는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개인의 선한 의지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힘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상황은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말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는 상황입니다. 사실 교리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원죄'라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누구나가 죄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가 헤어나기 어려워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필연적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인 것입니다. 싹수가 노래 처음부터 글러먹은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현실입니다.
아마도 그렇게만 생각하면 참 절망적입니다. 싹수가 처음부터 노랗다고 한 것보다는 위안이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절망적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전통적 신학은 분명한 하나의 답변을 제시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찌할 도리가 없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은 정말 감사할 일입니다. 이 사실이 인간들이 현실적으로, 보편적으로(필연적으로가 아니라) 지닌 한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거부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 현실을 가장 진솔하게 들여다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생각하며 엉뚱한 결론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다 소용없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상황에서는 개인적인 도덕도 소용없고 사회적인 정치도 소용없어집니다.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의 윤리적 불감증 사회 정치의식의 결여는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도덕만으로 정치만으로 충족되지 않는 것을 신앙으로 충족한다는 분명한 대안을 갖고 있는데, 그 신앙만으로도 다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 다음에는 어떤 대안이 있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 신앙은 숙명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렸듯이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라고 외치면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희망적인 인식을 말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신앙은 언제나 근본적인 자리, 원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신앙은, 개인도 보이고 사회도 보이고 나아가 자연도 보이는 근원적인 자리로 되돌아갈 것을 일깨웁니다.
뚱딴지 같은 본문 말씀, 오늘 저의 긴 서두와 비교해도 뚱딴지 같고 오늘 본문 말씀 자체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은 뚱딴지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모든 인식의 근원이 되는 자리를 환기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유대인들과의 또 하나의 논쟁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권위를 말씀하시는 데 아브라함과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었고,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게 될 것을 즐거워하였고 마침내 보고서 기뻐하였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서두에 유대인들이 말한 것처럼 '귀신들렸다', 곧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에 충분한 말씀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당장 반문합니다. "당신은 아직 나아가 쉰도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여러분은 이 말씀의 뜻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우리 기독교인들은 너무 쉬운 답변을 갖고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한 분이므로 태초부터 계셨으니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사실을 믿는 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요? 제가 보기에는 그래서 '정통'이라는 소리를 들을지 몰라도 내 삶이 변화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교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훨씬 심오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믿는 그 하나님과 더불어 있는 생명을 말합니다. 태초의 그 하나님의 순수성을 지니고 있는 예수님 그 자신, 그리고 생명 자체의 심원함을 말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신앙의 언어요 상징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늘의 과학적 인식으로도 해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 하나하나를 생각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명은 단순히 1-2대에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또는 실험실에서 갑자기 형성된 것도 아닙니다. 요즘 유전자공학이 발달해서 실험실에서도 생명이 탄생하는 일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조차 생명의 원리를 벗어나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 이 세상의 그 어떤 생명도 머나먼 근원을 갖고 있습니다. 생명 하나에 온 우주가 들어있다는 말은 종교적 상징언어일 뿐 아니라 과학적 사실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고 그렇게 깨닫고 있는 사실을 아버지를 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계보의 시조로서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나의 날을 보게 될 것을 즐거워하였고 마침내 보고서 기뻐하였다"는 것도 아브라함이 1세기의 예수를 미리 알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거기서 희망을 가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근원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 근원의 자리에 서면 세상이, 사람이 어떻게 보일까요? 생명의 소중함을 실감하지 않겠습니까?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저거 하나 잘못되면 모두가 잘못된다는 심정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저는, 개인들의 살아가는 방식과 사회 내지는 집단이 존재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윤리와 정치가 구별되는 현실적 상황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그렇게 구별된 것만은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으로 구별되고 정치로 구별되는 것은 방편상으로 구별될 뿐이지, 신음하는 생명의 해방, 구원을 위한 목적에서 한 가지입니다. 일본 사람의 삶의 고통과 한국 사람의 삶의 고통이 근본적으로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지구상의 그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람은 차이보다 공통점을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차이를 무시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차이를 절대화하여 차별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민족간의 고통, 나라간의 고통, 집단간의 고통은 그 차이를 절대화하고 차별화의 근거로 삼은 데서 비롯됩니다. '모두가 인간이다', '모두가 생명이다' 하는 근원적 생각은 개인적 차원에서든 집단적 차원에서든 차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린ㄴ 거기서 비롯된 현실적 고통을 이기기 위해 현실적 지혜를 필요로 합니다. 윤리와 도덕을 정치와 구별해보는 것도 그런 현실적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화되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회혁명으로 인간 자체가 변화된다고만 고정해서도 안 되며, 도덕적 인격적 변화로 사회의 변화가 이뤄진다고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든 인간의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해방의 길, 구원의 길, 곧 희망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신앙은 바로 그 희망의 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의 날을 볼 것을 즐거워하였고, 마침내 보고서 즐거워했다"는 것은 그 희망을 지켰다는 것을 말합니다. 끊임없는 유랑의 생활을 한 아브라함이었지만, 그의 삶을 지탱한 것은 그 희망이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계셨다는 것은, 사람들이 단지 한 계보상의 시조로 고정해놓은 인물의 한계를 넘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정작 하시고 싶은 말씀은, "너희가 절대시하는 아브라함 이 가졌던 그 믿음, 그 희망을 내가 더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 희망을 찾아나서는 무리들입니다.
그 희망을 바라보는 사람들로서 또 다시 새로운 결단을 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이 시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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