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믿음 - 하박국 2:1~4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2 01:17
조회
8601
2002년 11월 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기다리는 믿음
본문: 하박국 2:1-4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배우는 말 가운데 하나가 "빨리 빨리!"라고 합니다. 한국에 온 외국인들만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의 사람들도 그 말에 익숙한 것 같습니다. 제가 외국에 많이 다녀보지는 않았지만, 몇 년 전에 중국에 갔을 때 북경공항의 직원들도 우리 한국 사람 일행을 보고 "빨리 빨리!"를 외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민족성 자체가 그래서 그렇다기보다는, 숨가쁜 우리 현대사에서 비롯된 습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계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급속한 근대화, 산업화를 이루었으니 빠른 속도가 미덕이 될 만하기는 합니다. 다른 나라가 200여 년 이상 걸친 것을 30-40년만에 이루었으니 그럴 만하기는 합니다. 그뿐이 아니지요. 근래에는 정보강국을 지향하다 보니, 도시국가인 싱가폴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세계 최초로 초고속 인테넷으로 전국이 연결된 유일한 국가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빠른 속도는 이 사회의 최상의 미덕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빠른 속도는 살아남기 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많은 혜택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돌이켜보면 그 빠른 속도 때문에 우리는 잃어버린 것 또한 많습니다. 다른 나라에 비해 뒤지지 않은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분야 가운데 하나가 토목공사기술과 건축기술이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토목공사와 건축공사는 어째 그렇게 부실공사가 많습니까? 자재도 감축하고 인건비도 감축하게 빨리빨리 공사를 서두르도록 하는 구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터넷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은 톡톡 튀는 창조성을 맘껏 발휘하는 반면 기다리는 미덕은 잃어가고 있습니다. 도무지 잠시라도 인내하는 것을 정말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기다릴 줄 모르는 심성은 사람을 가볍게 만들고, 그래서 깊은 진실을 깨닫기 어렵게 만듭니다. 모든 것을 서두르다가는 살아가는 삶 자체가 하나의 부실공사 부실 건축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기다리는 믿음, 인내하는 믿음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또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을 일컬어 '파수꾼'이라고 하는 것을 성서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파수꾼', 말 그대로 하자면 '망을 보며 지키는 사람'이지만 달리 뜻을 새기면 '기다리며 지키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에스겔 3장 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에스겔에게 이르기를,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고 하시면서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호와의 증인들도 이 말을 중요하게 사용하면서 자기들이 내는 책자의 이름을 아예 <파수꾼>'이라고 해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그들 나름의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하박국의 말씀은 하나님의 파수꾼 혹은 신앙의 파수꾼, 다시 말해 자리를 지키고 진실을 기다리는 사람의 역할과 태도를 아주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언자 하박국이 하나님과의 쟁론을 벌이는 가운데 나오는 이야기의 한 대목입니다.
예언자 하박국은 바빌론이 이스라엘의 심판자로서 나서게 된 상황을 못마땅해하며 하나님께 항의를 합니다. '도대체 이런 부당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뭇민족을 죽이고 못된 일만 일삼는 그들이 어떻게 재판관이 될 수 있습니까?' 하고 항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답변을 기다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전반부는 바로 그 하나님의 답변을 기다리는 하박국의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바국은 자신을 파수꾼에 비유하며, 밤을 새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지켜보는 파수꾼과 같은 심정과 자세로 하나님의 정의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응답을 내리십니다. "너는 누구나(달려가는 사람도)가 알아 볼 수 있도록 내가 알려 주는 것을 새겨 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일은 정한 때가 있어 그 일은 기필코 이루어진다고 하십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면 기어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박국이 불만스럽게 여기는 문제에 대해 답하십니다. 하나님이 지금은 바빌론을 들어 쓰시지만, 그의 마음은 교만하여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 자체를 옳게 여기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종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이와는 대조되는 의인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다'는 신학을 펼치게 한 근거가 되는 말씀이며,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앙적 가르침의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지금 당장 부딪히는 상황이 어찌되었든 하나님의 뜻이 기필코 이루어지고 만다는 믿음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함이 드러나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 하나하나를 마치 파수꾼과 같은 자세로 바르게 주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믿음, 곧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이루어진다는 믿음입니다. 비록 더디더라도 의는 이루어진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이 때로 더딜 수도 있고, 때로는 이미 드러난 하나님의 신실함을 사람이 깨닫는 데 더딜 수도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고 기다리는 사람은 그 의를 보겠지만, 조급히 구는 사람은 그 의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쉽게 망각합니다. 그 믿음의 태도를 쉽게 저버립니다. 하나님께로 부름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그리고 오늘 우리들도 이 사실을 쉽게 망각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빌론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초반에 예언활동을 하였던 하박국보다 뒤늦게, 바빌론이 멸망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에서 해방되었을 때 혼란한 상황 가운데서 예언활동을 하였던 예언자 말라기는 바로 그와 같은 상황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의 명령을 지키고, 만군의 주 앞에서 그의 명령을 지키며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단 말인가? 이제 보니 오히려 교만한 자가 복이 있고, 악한 일을 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재앙을 면한다!"(말라기 3:14-15)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개탄한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땅에 떨어져버린 현실, 정의가 발붙일 틈이 없는 듯이 보이는 현실을 두고 사람들은 그렇게 개탄합니다. 우리들도 수없이 그렇게 개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이 만일 그렇다면 어찌 될까요? 어디를 둘러봐도 하나님의 신실함, 하나님의 공의를 발견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라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절망감에 빠질 때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 하는 태도에 빠집니다. 얼마나 살벌한 세상입니까?
여러분, 그래도 세상이 그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나의 욕망의 한계를 벗어난 공의를 믿기 때문입니다. 내게 손해가 되고 내게 고통스럽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어떤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마음 자세가 있기에 그래도 세상은 그렇게 살벌하지 않고 살 만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모든 공의의 근원인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으라고 역설합니다. 정말 절망스러운 상황이지만, 나는 그 믿음을 지키겠다는 예언자의 결의요 고백입니다.
우리는 그 기다리는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기다리는 것은 믿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그 사람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사람이 제대로 되기를 기다리는 것 역시 그 사람이 제대로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기다려야 할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서두를 때는 반드시 일을 그르치게 되어 있습니다. 부실공사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저는 우리의 교회를 생각하면서 그 기다리는 믿음의 의미를 깊이 생각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조급한 마음이 수도 없이 오락가락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 동요를 막을 수 있는 믿음을 바랍니다. 비록 작은 무리이지만, 우리들 가운데 그 믿음이 두터워지기를 바라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신실함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믿음이 확고해지기를 원합니다. 그 믿음은 무조건 기다린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파수꾼처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주시하고 그 일어나는 일에 대비하는 가운데 생겨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기다리는 믿음, 그 믿음으로 희망을 바라는 우리들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제목: 기다리는 믿음
본문: 하박국 2:1-4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배우는 말 가운데 하나가 "빨리 빨리!"라고 합니다. 한국에 온 외국인들만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의 사람들도 그 말에 익숙한 것 같습니다. 제가 외국에 많이 다녀보지는 않았지만, 몇 년 전에 중국에 갔을 때 북경공항의 직원들도 우리 한국 사람 일행을 보고 "빨리 빨리!"를 외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민족성 자체가 그래서 그렇다기보다는, 숨가쁜 우리 현대사에서 비롯된 습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계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급속한 근대화, 산업화를 이루었으니 빠른 속도가 미덕이 될 만하기는 합니다. 다른 나라가 200여 년 이상 걸친 것을 30-40년만에 이루었으니 그럴 만하기는 합니다. 그뿐이 아니지요. 근래에는 정보강국을 지향하다 보니, 도시국가인 싱가폴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세계 최초로 초고속 인테넷으로 전국이 연결된 유일한 국가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빠른 속도는 이 사회의 최상의 미덕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빠른 속도는 살아남기 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많은 혜택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돌이켜보면 그 빠른 속도 때문에 우리는 잃어버린 것 또한 많습니다. 다른 나라에 비해 뒤지지 않은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분야 가운데 하나가 토목공사기술과 건축기술이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토목공사와 건축공사는 어째 그렇게 부실공사가 많습니까? 자재도 감축하고 인건비도 감축하게 빨리빨리 공사를 서두르도록 하는 구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터넷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은 톡톡 튀는 창조성을 맘껏 발휘하는 반면 기다리는 미덕은 잃어가고 있습니다. 도무지 잠시라도 인내하는 것을 정말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기다릴 줄 모르는 심성은 사람을 가볍게 만들고, 그래서 깊은 진실을 깨닫기 어렵게 만듭니다. 모든 것을 서두르다가는 살아가는 삶 자체가 하나의 부실공사 부실 건축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기다리는 믿음, 인내하는 믿음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또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을 일컬어 '파수꾼'이라고 하는 것을 성서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파수꾼', 말 그대로 하자면 '망을 보며 지키는 사람'이지만 달리 뜻을 새기면 '기다리며 지키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에스겔 3장 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에스겔에게 이르기를,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고 하시면서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호와의 증인들도 이 말을 중요하게 사용하면서 자기들이 내는 책자의 이름을 아예 <파수꾼>'이라고 해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그들 나름의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하박국의 말씀은 하나님의 파수꾼 혹은 신앙의 파수꾼, 다시 말해 자리를 지키고 진실을 기다리는 사람의 역할과 태도를 아주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언자 하박국이 하나님과의 쟁론을 벌이는 가운데 나오는 이야기의 한 대목입니다.
예언자 하박국은 바빌론이 이스라엘의 심판자로서 나서게 된 상황을 못마땅해하며 하나님께 항의를 합니다. '도대체 이런 부당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뭇민족을 죽이고 못된 일만 일삼는 그들이 어떻게 재판관이 될 수 있습니까?' 하고 항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답변을 기다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전반부는 바로 그 하나님의 답변을 기다리는 하박국의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바국은 자신을 파수꾼에 비유하며, 밤을 새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지켜보는 파수꾼과 같은 심정과 자세로 하나님의 정의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응답을 내리십니다. "너는 누구나(달려가는 사람도)가 알아 볼 수 있도록 내가 알려 주는 것을 새겨 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일은 정한 때가 있어 그 일은 기필코 이루어진다고 하십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면 기어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박국이 불만스럽게 여기는 문제에 대해 답하십니다. 하나님이 지금은 바빌론을 들어 쓰시지만, 그의 마음은 교만하여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 자체를 옳게 여기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종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이와는 대조되는 의인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다'는 신학을 펼치게 한 근거가 되는 말씀이며,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앙적 가르침의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지금 당장 부딪히는 상황이 어찌되었든 하나님의 뜻이 기필코 이루어지고 만다는 믿음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함이 드러나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 하나하나를 마치 파수꾼과 같은 자세로 바르게 주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믿음, 곧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이루어진다는 믿음입니다. 비록 더디더라도 의는 이루어진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이 때로 더딜 수도 있고, 때로는 이미 드러난 하나님의 신실함을 사람이 깨닫는 데 더딜 수도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고 기다리는 사람은 그 의를 보겠지만, 조급히 구는 사람은 그 의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쉽게 망각합니다. 그 믿음의 태도를 쉽게 저버립니다. 하나님께로 부름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그리고 오늘 우리들도 이 사실을 쉽게 망각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빌론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초반에 예언활동을 하였던 하박국보다 뒤늦게, 바빌론이 멸망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에서 해방되었을 때 혼란한 상황 가운데서 예언활동을 하였던 예언자 말라기는 바로 그와 같은 상황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의 명령을 지키고, 만군의 주 앞에서 그의 명령을 지키며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단 말인가? 이제 보니 오히려 교만한 자가 복이 있고, 악한 일을 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재앙을 면한다!"(말라기 3:14-15)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개탄한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땅에 떨어져버린 현실, 정의가 발붙일 틈이 없는 듯이 보이는 현실을 두고 사람들은 그렇게 개탄합니다. 우리들도 수없이 그렇게 개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이 만일 그렇다면 어찌 될까요? 어디를 둘러봐도 하나님의 신실함, 하나님의 공의를 발견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라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절망감에 빠질 때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 하는 태도에 빠집니다. 얼마나 살벌한 세상입니까?
여러분, 그래도 세상이 그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나의 욕망의 한계를 벗어난 공의를 믿기 때문입니다. 내게 손해가 되고 내게 고통스럽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어떤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마음 자세가 있기에 그래도 세상은 그렇게 살벌하지 않고 살 만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모든 공의의 근원인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으라고 역설합니다. 정말 절망스러운 상황이지만, 나는 그 믿음을 지키겠다는 예언자의 결의요 고백입니다.
우리는 그 기다리는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기다리는 것은 믿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그 사람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사람이 제대로 되기를 기다리는 것 역시 그 사람이 제대로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기다려야 할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서두를 때는 반드시 일을 그르치게 되어 있습니다. 부실공사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저는 우리의 교회를 생각하면서 그 기다리는 믿음의 의미를 깊이 생각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조급한 마음이 수도 없이 오락가락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 동요를 막을 수 있는 믿음을 바랍니다. 비록 작은 무리이지만, 우리들 가운데 그 믿음이 두터워지기를 바라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신실함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믿음이 확고해지기를 원합니다. 그 믿음은 무조건 기다린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파수꾼처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주시하고 그 일어나는 일에 대비하는 가운데 생겨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기다리는 믿음, 그 믿음으로 희망을 바라는 우리들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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