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의와 유다인 바울 - 로마서 9:1~5 (일본 제제교회 설교)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2 11:45
조회
8241
2003년 8월 24일(일) 日本 제제교회
제목: 하나님의 의와 유다인 바울
본문: 로마서 9:1-5
오요야마 목사님께서는 한국말을 할 줄 아시는데, 저는 아직 일본말을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러나 제가 일본어를 읽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 되었습니다.
20여년 전 대학생 시절부터 일본어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 초반 당시 군사독재정권하의 한국에서는 자유로운 언론 보도가 금지되었고, 보고싶은 책을 마음껏 볼 수도 없었습니다. 사상적으로 불온한(?) 책은 아예 출판이 금지되었고, 출판된 책들 가운데서도 금서가 된 책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어로 볼 수 없는 자료들을 보기 위해 일본어를 배웠습니다. 그 때 <세까이>(世界)지를 보고 거꾸로 한국상황을 이해하기도 했고 이와나미(岩波)서점에서 출판된 여러 책들을 통해 세계를 보는 눈을 넓히기도 했습니다.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을 알게 된 것도 일본어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일본어의 신세를 상당히 진 셈입니다.
아마도 그 인연 때문인 것 같습니다만, 이번 일본 방문은 두 번째이고 공교롭게도 방문할 때마다 일본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5년 전 토쿄 방문 때에는 우에노(上野)교회에서 설교를 하였고, 이번에는 이렇게 제제교회에서 설교를 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그리고 목사님과 교우 여러분께 먼저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내 동족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라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주장하고 있는 이야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유다인의 편협한 선민의식을 비판한 바울의 입장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느닷없이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요? 그렇게 강력하게 유다인들의 잘못된 선민의식을 질책하던 바울이 갑자기 '유다민족 찬양가'와도 같은 이 발언을 하고 있을까요?
바울의 이 고백은 오류에 빠진 자기 민족과의 강력한 연대의식을 드러냅니다. 바울이 일관되게 강조해 온 것은, 자기들만 옳고 따라서 자기들만 구원받는다는 배타적 선민의식, 그리고 결정론을 비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세계주의자였으며 보편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배타적 선민의식과 결정론을 비판하는 데서 자신은 그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입장을 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저주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여러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랍비의 한 기도문을 보면, "주여 내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는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했다던가요? 오늘도 그런 과오는 수없이 되풀이됩니다. 내가 옳으면 상대는 잘못되었다는 의식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재난을 겪는 것을 보면, 그 재난을 겪은 사람들을 동정하기에 앞서 내가 그 재난을 겪지 않은 것에 안도합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배타주의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것을 전한다는 강력한 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자기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또 한편으로 의식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주장도 자기가 인식하고 경험한, 이른바 '육신'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전한다지만 불가불 인간의 인식과 경험을 통해 설명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유다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따른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기 의를 내세우는 과오를 자기 자신도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너희와 다르다"는 '구별짓기' 내지는 '차별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기보다는 "나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도 그랬습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우리 모두 이른바 '육신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보면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내가 잘났다고, 나는 내가 구원받았다고 기고만장하지 않습니다. 나도 여러분과 똑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왜 여러분에게 낯선 이야기를 하는지 아십니까? 나는 구원받고 여러분은 멸망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구원의 길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이런 간절한 마음이 오늘 말씀에는 깊이 깊이 배어 있습니다. 유다인의 선민의식을 비판해 왔던 것은, 유다인이 미워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주를 선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복을 누리자고 하는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하는 이야기는 그 심정, 그 마음의 표현입니다.
오늘 말씀을 단 한마디로 집약하면, "하나님의 보편적 의를 향한 유다인 바울의 고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세계를 향한 민족 지성의 고뇌"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보편적 의를 추구하지만 여전히 민족과 나라의 테두리 안에서 존재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처지, 혹은 거꾸로 구체적인 민족과 나라의 테두리 안에서 존재하고 생각하지만 마땅히 보편적 구원과 의를 지향해야 하는 정황, 여기에서 나오는 고뇌입니다.
이런 정황은 어쩌면 바울 시대보다도 오늘 우리들의 시대에 훨씬 심각할지도 모릅니다. 국가와 민족의 경계가 오늘만큼 확실한 때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지구화 시대 또는 세계화 시대를 말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근대적인 국가와 민족의 경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태어나기 전에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각자 일본인으로 또는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일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커다란 의혹의 시선을 받기에 충분하며, 그래서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정황을 엔도 슈사쿠(遠藤周作)는 그의 소설 <깊은 강>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미츠코가 신부지망생 오오츠를 향해 던지는 질문입니다. "당신, 일본인 맞죠? 일본 사람인 당신이 유럽의 기독교를 믿다니 나는 오히려 역거움마저 들어요" 이 물음에 오오츠는 "나는 유럽의 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변명합니다. 일본에서는 그러한 물음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제기되고 그리스도인은 거기에 대한 자각적인 대답을 찾아야 하는 형편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와 같은 의혹과 변명의 상황은 한국에서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낯선 상황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네 명 가운데 한 명은 기독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그 물음과 응답이 불필요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은 그 문제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에서 재이적하여 한국인이 되어야 한다." 마치 오늘 바울의 이야기처럼 기독교의 보편성을 부정하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의 참뜻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기독교가 사실은 서구의 특수한 기독교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기독교의 보편성을 제대로 받아들인, 주체적인 한국의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고뇌에 빠진 우리들에게 바울의 고뇌는 과연 어떤 빛을 던져주고 있을까요? 우리의 성급한 마음은 항상 단순하고 명쾌한 답을 기대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바울의 입장을 따라 보편적인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 것을 버려야 할 것인지, 아니면 오늘 본문 표면에 나타난 바울의 입장처럼 오히려 자기 것을 더 철저히 지켜야 할 것인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감을 갖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의 깊은 동기를 들여다보면서 하나의 결론을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은 단순 명쾌한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의를 이루기 위해 헌신했던 바울의 위대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철저한 유다인이면서도 세계의 모든 민족의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보편적 의를 위해 과감히 나섰다는 데 바울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처럼 그토록 강렬한 민족적 자의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하나님의 의를 위해 그 누구보다도 헌신한 것이, 우리가 새삼 주목하는 바울의 위대성입니다. 바울은 단순히 민족주의에서 보편주의 또는 세계주의로 전향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철저한 유다인이었기에,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유다인의 유산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고 또 역으로 유다인의 유산 가운데 무엇이 하나님의 의를 방해하는지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다인의 유산 가운데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민족적 가치라면 그저 맹목적으로 숭배하던 국수주의자에서,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성숙한 민족애를 바탕으로 하는 보편주의자 또는 세계주의자로 전환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바울의 전향은 단순한 전환이 아니라 질적인 전환이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거듭남이었습니다. 바울이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눈이 어두어졌다가 그 눈에서 비늘이 떨어짐으로서 다시 보게 되었던 경험은 그가 새로운 안목,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음을 전하는 극적인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가 새삼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바로 이 사실입니다.
구체적으로 그와 같은 거듭남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일본인과 한국인은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공동의 목표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 곧 모든 차별과 장벽을 넘어선 공존의 세계, 평화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한국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목표를 추구하는 방법은 다를 수 있습니다. 일본과 한국은 같은 점도 많고 다른 점도 많습니다.
민족으로서 일본과 한국은 모두 강한 선민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민족이든 그 나름의 선민의식을 갖고 있겠지만, 일본이나 한국의 선민의식은 순수 혈통주의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아마도 일본이나 한국이나, 오랜 세월 동안 동일한 지역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해 왔기 때문에 그와 같은 혈통주의에 입각한 선민의식이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이나 한국은 각기 단일민족의 유구한 전통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일본은 물론이려니와 한국 역시 단일민족의 역사만은 아닙니다. 일본의 경우 홋가이도와 오키나와는 전혀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도 고대에는 북방의 여러 민족들이 다양하게 뒤섞였습니다. 순수혈통의 단일민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상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단일민족의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면, 다양성을 억압하고 많은 차별을 낳습니다. 그 전통과 문화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떤 대상을 단일민족의 범주에 억지로 짜 맞추는가 하면, 끝내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에는 배제하고 맙니다.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을 포함한 외국인 문제, 한국에서의 외국인 문제, 그리고 소수자들의 문제는 그 현실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그 어떤 형태의 선민의식이든 극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바울이 비판하였던 선민의식은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일본인이나 한국인에게도 해당됩니다.
일본과 한국은 다른 점도 많습니다. 그것은 역사적 경험의 차이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일본은 국체가 해체된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한국은 여러 차례 왕조의 교체와 수없이 많은 외부의 침략에 시달렸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경험의 차이 때문에 때로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때로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일본과 한국은 다른 점들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국체의 위기 또는 국체의 해체 경험이 없는 일본은 타민족또는 타국가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진지하게 물을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내부적으로 아주 강력한 집단의식 또는 공공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수 없는 국체의 위기를 겪은 한국은 계속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물을 수 있는 기회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한편 빈번한 고통은 극단적인 생존의 논리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공공의식은 박약한 편입니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개성은 어떤 면에서는 부정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긍정적이기도 합니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진지하게 묻지 못하는 집단주의는 극복되어야 합니다. 반면에 높은 공공의식은 우리들에게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는 극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개인주의는 옹호되어야 합니다. 개인의 주체성 위에 진정한 공공성이 확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비교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그렇게 일본과 한국은 서로 교차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자신의 특성을 잘 이해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특성 또한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편적 의를 향한 유다인 바울의 고뇌'에서, 우리는 각자의 선 자리를 분명히 인식하면서 보편적 의를 추구해나가야 하는 과제를 새삼 깨닫습니다. 그래서,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 일본 사람과 저 한국 사람이 이렇게 만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들 모두가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몫을 감당하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세계인으로서 함께 장벽을 넘어 평화를 이루기를 기원합니다.*
제목: 하나님의 의와 유다인 바울
본문: 로마서 9:1-5
오요야마 목사님께서는 한국말을 할 줄 아시는데, 저는 아직 일본말을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러나 제가 일본어를 읽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 되었습니다.
20여년 전 대학생 시절부터 일본어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 초반 당시 군사독재정권하의 한국에서는 자유로운 언론 보도가 금지되었고, 보고싶은 책을 마음껏 볼 수도 없었습니다. 사상적으로 불온한(?) 책은 아예 출판이 금지되었고, 출판된 책들 가운데서도 금서가 된 책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어로 볼 수 없는 자료들을 보기 위해 일본어를 배웠습니다. 그 때 <세까이>(世界)지를 보고 거꾸로 한국상황을 이해하기도 했고 이와나미(岩波)서점에서 출판된 여러 책들을 통해 세계를 보는 눈을 넓히기도 했습니다.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을 알게 된 것도 일본어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일본어의 신세를 상당히 진 셈입니다.
아마도 그 인연 때문인 것 같습니다만, 이번 일본 방문은 두 번째이고 공교롭게도 방문할 때마다 일본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5년 전 토쿄 방문 때에는 우에노(上野)교회에서 설교를 하였고, 이번에는 이렇게 제제교회에서 설교를 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그리고 목사님과 교우 여러분께 먼저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내 동족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라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주장하고 있는 이야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유다인의 편협한 선민의식을 비판한 바울의 입장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느닷없이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요? 그렇게 강력하게 유다인들의 잘못된 선민의식을 질책하던 바울이 갑자기 '유다민족 찬양가'와도 같은 이 발언을 하고 있을까요?
바울의 이 고백은 오류에 빠진 자기 민족과의 강력한 연대의식을 드러냅니다. 바울이 일관되게 강조해 온 것은, 자기들만 옳고 따라서 자기들만 구원받는다는 배타적 선민의식, 그리고 결정론을 비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세계주의자였으며 보편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배타적 선민의식과 결정론을 비판하는 데서 자신은 그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입장을 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저주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여러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랍비의 한 기도문을 보면, "주여 내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는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했다던가요? 오늘도 그런 과오는 수없이 되풀이됩니다. 내가 옳으면 상대는 잘못되었다는 의식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재난을 겪는 것을 보면, 그 재난을 겪은 사람들을 동정하기에 앞서 내가 그 재난을 겪지 않은 것에 안도합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배타주의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것을 전한다는 강력한 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자기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또 한편으로 의식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주장도 자기가 인식하고 경험한, 이른바 '육신'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전한다지만 불가불 인간의 인식과 경험을 통해 설명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유다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따른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기 의를 내세우는 과오를 자기 자신도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너희와 다르다"는 '구별짓기' 내지는 '차별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기보다는 "나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도 그랬습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우리 모두 이른바 '육신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보면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내가 잘났다고, 나는 내가 구원받았다고 기고만장하지 않습니다. 나도 여러분과 똑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왜 여러분에게 낯선 이야기를 하는지 아십니까? 나는 구원받고 여러분은 멸망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구원의 길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이런 간절한 마음이 오늘 말씀에는 깊이 깊이 배어 있습니다. 유다인의 선민의식을 비판해 왔던 것은, 유다인이 미워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주를 선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복을 누리자고 하는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하는 이야기는 그 심정, 그 마음의 표현입니다.
오늘 말씀을 단 한마디로 집약하면, "하나님의 보편적 의를 향한 유다인 바울의 고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세계를 향한 민족 지성의 고뇌"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보편적 의를 추구하지만 여전히 민족과 나라의 테두리 안에서 존재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처지, 혹은 거꾸로 구체적인 민족과 나라의 테두리 안에서 존재하고 생각하지만 마땅히 보편적 구원과 의를 지향해야 하는 정황, 여기에서 나오는 고뇌입니다.
이런 정황은 어쩌면 바울 시대보다도 오늘 우리들의 시대에 훨씬 심각할지도 모릅니다. 국가와 민족의 경계가 오늘만큼 확실한 때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지구화 시대 또는 세계화 시대를 말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근대적인 국가와 민족의 경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태어나기 전에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각자 일본인으로 또는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일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커다란 의혹의 시선을 받기에 충분하며, 그래서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정황을 엔도 슈사쿠(遠藤周作)는 그의 소설 <깊은 강>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미츠코가 신부지망생 오오츠를 향해 던지는 질문입니다. "당신, 일본인 맞죠? 일본 사람인 당신이 유럽의 기독교를 믿다니 나는 오히려 역거움마저 들어요" 이 물음에 오오츠는 "나는 유럽의 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변명합니다. 일본에서는 그러한 물음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제기되고 그리스도인은 거기에 대한 자각적인 대답을 찾아야 하는 형편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와 같은 의혹과 변명의 상황은 한국에서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낯선 상황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네 명 가운데 한 명은 기독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그 물음과 응답이 불필요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은 그 문제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에서 재이적하여 한국인이 되어야 한다." 마치 오늘 바울의 이야기처럼 기독교의 보편성을 부정하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의 참뜻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기독교가 사실은 서구의 특수한 기독교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기독교의 보편성을 제대로 받아들인, 주체적인 한국의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고뇌에 빠진 우리들에게 바울의 고뇌는 과연 어떤 빛을 던져주고 있을까요? 우리의 성급한 마음은 항상 단순하고 명쾌한 답을 기대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바울의 입장을 따라 보편적인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 것을 버려야 할 것인지, 아니면 오늘 본문 표면에 나타난 바울의 입장처럼 오히려 자기 것을 더 철저히 지켜야 할 것인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감을 갖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의 깊은 동기를 들여다보면서 하나의 결론을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은 단순 명쾌한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의를 이루기 위해 헌신했던 바울의 위대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철저한 유다인이면서도 세계의 모든 민족의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보편적 의를 위해 과감히 나섰다는 데 바울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처럼 그토록 강렬한 민족적 자의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하나님의 의를 위해 그 누구보다도 헌신한 것이, 우리가 새삼 주목하는 바울의 위대성입니다. 바울은 단순히 민족주의에서 보편주의 또는 세계주의로 전향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철저한 유다인이었기에,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유다인의 유산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고 또 역으로 유다인의 유산 가운데 무엇이 하나님의 의를 방해하는지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다인의 유산 가운데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민족적 가치라면 그저 맹목적으로 숭배하던 국수주의자에서,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성숙한 민족애를 바탕으로 하는 보편주의자 또는 세계주의자로 전환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바울의 전향은 단순한 전환이 아니라 질적인 전환이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거듭남이었습니다. 바울이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눈이 어두어졌다가 그 눈에서 비늘이 떨어짐으로서 다시 보게 되었던 경험은 그가 새로운 안목,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음을 전하는 극적인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가 새삼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바로 이 사실입니다.
구체적으로 그와 같은 거듭남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일본인과 한국인은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공동의 목표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 곧 모든 차별과 장벽을 넘어선 공존의 세계, 평화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한국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목표를 추구하는 방법은 다를 수 있습니다. 일본과 한국은 같은 점도 많고 다른 점도 많습니다.
민족으로서 일본과 한국은 모두 강한 선민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민족이든 그 나름의 선민의식을 갖고 있겠지만, 일본이나 한국의 선민의식은 순수 혈통주의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아마도 일본이나 한국이나, 오랜 세월 동안 동일한 지역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해 왔기 때문에 그와 같은 혈통주의에 입각한 선민의식이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이나 한국은 각기 단일민족의 유구한 전통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일본은 물론이려니와 한국 역시 단일민족의 역사만은 아닙니다. 일본의 경우 홋가이도와 오키나와는 전혀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도 고대에는 북방의 여러 민족들이 다양하게 뒤섞였습니다. 순수혈통의 단일민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상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단일민족의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면, 다양성을 억압하고 많은 차별을 낳습니다. 그 전통과 문화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떤 대상을 단일민족의 범주에 억지로 짜 맞추는가 하면, 끝내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에는 배제하고 맙니다.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을 포함한 외국인 문제, 한국에서의 외국인 문제, 그리고 소수자들의 문제는 그 현실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그 어떤 형태의 선민의식이든 극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바울이 비판하였던 선민의식은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일본인이나 한국인에게도 해당됩니다.
일본과 한국은 다른 점도 많습니다. 그것은 역사적 경험의 차이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일본은 국체가 해체된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한국은 여러 차례 왕조의 교체와 수없이 많은 외부의 침략에 시달렸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경험의 차이 때문에 때로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때로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일본과 한국은 다른 점들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국체의 위기 또는 국체의 해체 경험이 없는 일본은 타민족또는 타국가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진지하게 물을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내부적으로 아주 강력한 집단의식 또는 공공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수 없는 국체의 위기를 겪은 한국은 계속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물을 수 있는 기회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한편 빈번한 고통은 극단적인 생존의 논리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공공의식은 박약한 편입니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개성은 어떤 면에서는 부정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긍정적이기도 합니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진지하게 묻지 못하는 집단주의는 극복되어야 합니다. 반면에 높은 공공의식은 우리들에게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는 극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개인주의는 옹호되어야 합니다. 개인의 주체성 위에 진정한 공공성이 확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비교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그렇게 일본과 한국은 서로 교차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자신의 특성을 잘 이해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특성 또한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편적 의를 향한 유다인 바울의 고뇌'에서, 우리는 각자의 선 자리를 분명히 인식하면서 보편적 의를 추구해나가야 하는 과제를 새삼 깨닫습니다. 그래서,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 일본 사람과 저 한국 사람이 이렇게 만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들 모두가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몫을 감당하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세계인으로서 함께 장벽을 넘어 평화를 이루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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