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아기 예수가 이집트로 간 까닭 - 마태복음 2:6~15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2 12:47
조회
8471
2003년 12월 25일(목) 오전 11:00  천안 살림교회

제목: 아기 예수가 이집트로 간 까닭

본문: 마태복음 2:6-15


또 만났습니다. 자주 만나 반갑고 기쁩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만난 뜻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함께 기뻐하며 그 뜻을 기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어른들은 주일도 아닌 오늘 우리가 다 함께 성탄축하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린 자녀들은 의문을 갖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휴일이기도 한데 그냥 신나게 노는 것이라면 모를까, 엊그제 예배드리고 내일 모레면 또 예배를 드릴텐데 오늘 굳이 또 예배를 드리는 까닭이 무엇일까, 아니 꼭 그래야만 할까 하는 의문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간이 지식을 쌓기 위한 공부시간과 같은 것이라면 굳이 우리가 다시 모여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학교에서 이미 진도 나간 과정을 다시 공부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렇게 공부하는 것과 같다면 우리는 12월 25일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이라고 기억하는 것으로 족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간 모르는 것을 배우기 위하여 다시 모인 것이 아닙니다. 또는 마치 지난 과정을 복습하듯이 알고 있는 지식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인 것은 한 사건을 기억하며 그 뜻을 기리기 위해서입니다. 지식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미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모인 뜻은 다름이 아닌 바로 '뜻'을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뜻, 그 의미를 되새기며 그 뜻을 따라 살기 위해 오늘 우리는 함께 모였습니다.    


성서에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지식을 확인하려고 할 것 같으면, 사실 성서는 그다지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현대적 지식에 비추어보면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들이 많거니와, 성서 그 자체 안에서도 똑 같은 사건을 놓고도 달리 설명할 뿐 아니라, 아예 모순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서를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그 '뜻', 그 '의미' 때문입니다. 성서의 말씀이 전하는 뜻 때문입니다. 성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사실을 담고 있어서 위대한 책이 아닙니다. 성서는 캐고 캐도 고갈되지 않은 금광처럼, 퍼마시고 마셔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뜻으로 충만해 있기에 위대한 책입니다.

매년 성탄절이 되면 되풀이하여 읽는 같은 말씀이지만, 우리가 사실을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 읽기에, 성서는 그야말로 우리에게 의미를 줍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탄생을 전하는 성서의 말씀은 서로 다릅니다. 탄생과 관련한 사실을 전하는 성서의 말씀들이 서로 다릅니다. 누가는 나사렛에 사는 요셉과 마리아가 로마총독의 인구조사를 받기 위해 조상들의 고향 베들레헴에 갔다가 마구간에서 태어나 다시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와 살았다고 전합니다. 그 탄생을 가장 기뻐한 사람들은 가난한 목동들이었습니다. 반면에 마태는 베들레헴에 사는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예수께서 태어나셨는데 그 사실을 안 헤롯 대왕이 자기 말고 또 다른 왕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여 어린아이들이 학살했고, 그래서 그 위험을 피하여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나사렛으로 가서 살았다고 전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고대하고 가장 기뻐했던 사람들은 동방의 박사들이었습니다.

두 이야기에서 일치하는 것은 딱 한 가지 사실 밖에는 없습니다. 태어난 아기 예수가 나사렛에서 살게 되었다는 사실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이야기가 사실일까요? 어느 이야기가 더 사실에 가까울까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 이야기들이 단순히 사실을 전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들에 등장하는 배경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모두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들입니다. 이미 해석된 이야기입니다. 서로 다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공통되는 점은 두 이야기 모두 세상 권력의 횡포 한 가운데 새로운 희망으로 아기 예수께서 탄생했다는 점입니다. 누가는 그 의미를, 로마제국 지배하의 갈릴리와 유대를 배경으로 하여 해명합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의 탄생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쁨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마태는 그 의미를, 헤롯대왕의 학정과 관련시켜 해명합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의 탄생은 마침내 예언이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어느 이야기가 사실에 가까우냐고 물으면 서로 다른 이야기의 성격을 해명하기 어렵지만, 이 이야기들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서로 다른 의미가 전혀 충돌하지 않습니다. 강조점은 다르지만 큰 뜻은 같은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 세계를 구원할 메시아로 아기 예수께서 오셨다는 점은 두 이야기에서 모두 공통됩니다.


지난 주일에는 누가복음의 말씀을, 오늘 성탄절에는 마태복음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마태는 철저하게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관점에서 아기 예수 탄생의 사건을 전합니다. 무슨 예언입니까?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아기 예수 탄생 이야기 처음부터 끝까지 구약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앞날을 내다보는 동방박사가 등장하는 까닭도 그 의도와 일치합니다.

마태복음의 아기 예수 탄생 이야기는 누군가를 연상시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모세입니다. 탄생, 박해, 망명, 귀환의 여정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와 예수가 우연히도 사실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인물을 유형적으로 대비시킴으로써 그 의미를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소개할 때 '꼭 누구 같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쉽게 이해합니다. 마치 그런 방식입니다. 개인적 인물로서 모세와 예수가 비슷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역할에 초점이 있습니다. 백성을 구하는 해방자로서의 역할입니다.

헤롯 대왕의 유아학살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한 사연이 등장하는 까닭은 그와 같은 모세의 행보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 삶의 의미를 해석하려는 의도입니다. 물론 예수께서 그 부모와 이집트로 피신한 일을 사실 그대로 믿는 전통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집트 카이로에 가면 유대교의 예레미아 기념 회당 바로 옆에 기독교의 예수 피난 기념교회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역사적 사실보다는 메시아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행보에서 갖는 이집트 피신의 의미입니다.  


성서에서 이집트의 의미는 언제나 이중적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이집트는 항상 이중적입니다. 나일 강을 젖줄로 삼는 이집트는 풍요의 땅입니다. 나일 강 줄기를 제외한 90%의 지역이 황량한 사막이기는 하지만, 나일강 일대는 풍요의 땅입니다. 이집트의 찬란한 문명은 그 풍요에 힘입은 것입니다. 그 이집트는 팔레스타인 지역 사람들에게 위기 시에는 비빌 언덕이 됩니다. 마치 어머니 대지와 같은 역할을 해줍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그 후손들이 기근을 맞아 먹을 것을 찾으러 간 곳이 이집트 땅입니다. 그러나 그 풍요의 땅이 언제나 너그러운 것은 아닙니다. 그 풍요의 땅은 자신이 먹여 살려주는 대가를 받습니다. 목숨을 살려주었으므로 삶 전체를 요구합니다. 그 풍요의 땅은 그 땅에 의존하는 사람들에게 종이 되기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그 풍요의 땅에서 사는 것은 노예로서 순종하는 삶을 의미할 뿐입니다.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해야만 했던 사연은 노예로서 삶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자유인으로서 해방된 삶을 원했기에 모세는 그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였습니다. 이집트는 피난처일 수는 있지만 영원히 머물 땅은 아니었습니다.

풍요는 일시적으로 허기진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만 그 풍요가 인간의 꿈을 영원히 충족시켜주지는 못합니다. 풍요에의 갈망은 인간을 점점 그 노예로 만들어갑니다. 자연의 위협이 두려웠던 인간은 문명을 건설함으로써 그 자연의 위협을 피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거꾸로 이제는 인간 스스로가 만든 문명이 인간을 위협합니다. 고도의 물질문명을 이루었지만, 거꾸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이 살아갑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입장에서 풍요의 땅 이집트가 마치 그런 것과 같습니다. 성서 이야기에서 이집트가 갖는 상징적 의미입니다.

이집트로 피신했지만 그곳에서 곧 발길을 돌린 예수의 행보는 모세의 출애굽을 연상시킵니다. 아기 예수 탄생의 사건을 전하는 마태는 의도적으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호세 11:1). 이 예언서의 인용문은 해방사건의 기원, 곧 출애굽 사건을 회상하는 말이요, 동시에 아기 예수의 탄생이 다시 이 땅에서 재현되어야 할 해방의 사건을 의미한다는 해석입니다. 지금 마태는, 아기 예수의 탄생이 노예의 땅에서 자유인의 땅으로의 해방을 의미하는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성탄절을 기리는 뜻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세계에서 성탄절은 해방의 축제라기보다는 풍요의 축제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오늘 세계에서 성탄절 기간은 가장 중요한 소비의 축제 기간이 되었습니다. 예컨대, 세계 전체 자원의 70%을 소비하는 미국에서는 추수감사절과 성탄절 사이 4주 동안 한 해에 팔리는 상품의 40%가 팔린다고 합니다. 이 점에서 성탄절 특수는 경기를 좌우하는 아주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기 예수 탄생의 기쁨을 함께 나누자는 그 마음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풍요의 축제를 벌이는 동안 진정한 성탄의 의미를 망각해버린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해방의 사건을 기리는 해방의 축제로서의 성탄절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노예의 길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을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풍요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을 기뻐하는 격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될 일입니다.

성탄절 12월 25일은 본래 동지로서 로마의 태양신 아폴론의 축제일이었습니다. 밤이 짧아지고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일을 로마인들은 태양신 아폴론의 축제일로 지켰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일이 12월 25일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아폴론의 축제 대신에 그리스도 탄생의 축제일로 그 날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로마의 세계 대신에 그리스도의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혹시 이름만 그리스도 탄생 축제일 뿐 '또 다른 신'의 축제일로 성탄절을 지키고 있지는 않을까요?


오늘 우리가 이 예배를 드리는 뜻을 분명히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의미를 기리고 있습니다. 종의 집에서 자유인의 길로 해방시키신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세계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해방된 자유인의 축제로 다시 회복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이 시간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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