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의 누룩 - 마가복음 8:14~21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2 13:35
조회
11466
2004년 8월 2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헤롯의 누룩
본문: 마가복음 8:14-21
올림픽과 같은 큰 국제대회가 열리면 으레 많은 일화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 가운데 하나, 제가 신문 귀퉁이에서 발견한 일화입니다.
미국올림픽위원회는 대회에 참가하면서 선수들에게 다른 나라 사람들을 자극할 수 있는 행동을 극도로 자제하도록 요청했다고 합니다. 이라크 전쟁으로 전세계에 만연해 있는 반미감정을 혹시라도 자극하는 일이 생길까 봐서였습니다. 그래서 미국 선수들은 승리의 순간에도 성조기를 흔드는 세리머니도 못하고 숨죽이며 자제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는 미국의 정치가들 때문에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조지 부시는 대선을 위한 텔레비전 캠페인에 올림픽을 이용했습니다. "이번 올림픽에는 자유를 찾은 두 국가가 더 참여했다"고 했다는데, 그 두 국가란 물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말합니다. 또 이라크 축구가 결승에 진출할 경우 아테네를 방문하겠다고 공언을 했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엄중 경고를 했습니다.
저는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순수하게 스포츠 정신으로 일관한 집단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 집단이 조지 부시에게 경고를 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노골적으로 올림픽을 정치적 이용 수단으로 삼는 것을 경고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찬사를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전쟁이라는 비참한 상황에서도 올림픽에 참가해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선수들의 몫이지, 결코 미국이나 조지 부시의 몫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착각하지 말라',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지 말라'는 경고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배의 욕망은 그렇게 눈을 멀게 합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보기 때문에 사태의 진실을 보지 못합니다. 아예 사태의 진실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유리한 대로 해석해서 사람들에게 선전하면 자기 몫이 아닌 것도 자기 몫으로 돌아오는 세상의 원리를, 여기에서 우리는 봅니다.
올림픽과는 상관이 없지만, 그리 멀지 않은 옛날의 또 다른 일화입니다. 18세기말 이집트를 점령했던 나폴레옹은 잠시 망상에 빠졌다고 합니다. 자신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이슬람권의 아시아를 완전히 지배함으로써 제2의 알렉산더가 되는 꿈을 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자신이 즐기는 포도주를 끊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환상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영국군의 압박 때문에 나폴레옹이 중동에서 패자가 되는 꿈을 접어야 했지만, 지배의 욕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파렴치하게 만드는지를 알려주는 일화입니다.
잠시동안이나마 나폴레옹의 환상은 교회가 유럽을 지배하던 중세 같으면 그야말로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교회의 권위를 부정했던 프랑스 시민혁명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지배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권력의 후안무치함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들 권력자들에게 종교적 신념이나 대의명분이 얼마나 하찮은 허울에 불과한 것인지 보여줍니다. 지배의 욕망, 권력의 야욕 앞에서는 그 어떤 고상한 것도 부차화 되고 누추하게 됩니다. 그런 야욕으로 불타는 사람들이 영웅으로, 위인으로 존경을 받는 한 진실이 숨 쉴 틈은 없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함께 공부하기도 했던,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언뜻 보면 참 아리송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만 떼어놓고 보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앞에서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행적, 그 가운데서도 굶주린 사람들을 먹인 두 차례의 사건, 그리고 앞뒤를 꾸미고 있는 두 사건 곧 벙어리를 낫게 한 사건과 눈먼 사람을 고친 사건을 유념할 때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오늘 말씀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듣게 하고 말하게 하고 보게 하는 예수님의 몫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귀로 듣고 있다고 해서 언제나 진실을 듣는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이 말을 하고 있다고 해서 언제나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눈을 뜨고 있다고 해서 언제나 진실을 제대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건의 현장에 있다고 해서, 어떤 일에 동참하고 있다고 해서 그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정말 필요한 것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째서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될까요? 오늘 말씀은 그 답의 단서를 보여줍니다.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 때문입니다. 같은 뜻의 말씀을 전하는 마태복음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누룩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누룩'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16:6). 누가복음은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이라고만 언급하고 있습니다(12:1). 그런데 그 누룩이 무엇을 뜻하는지 해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위선'이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서에 '위선' 또는 '외식'으로 번역된 이 말은,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겉치레' 정도보다 훨씬 강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그 말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또는 모르면서도 아는 척, 악하면서도 착한 척 하는 의식적인 불성실과 위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참과 거짓, 요구와 실재 사이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말로 모르는 '무명'(無明)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로 착각하는 상태입니다. 마치 누룩이 번지듯 모르는 사이에 번져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사람을 그런 위선의 상태, 아니 무지의 상태로 몰아넣는 것이 무엇일까요? 보십시오. 각기 복음서에 언급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공부를 적게 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헤롯 또는 권력층들, 이들은 공부를 많이 안 했을 수도 있지만 당시 일반민중들보다는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권세가들이니 학구적이지는 않다 하더라도 견문이 넓었을 것입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제사장들이니 공부를 하지 않았을 턱이 없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공부를 제일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들을 보고 진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무지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라 일컫고 있고, 제자들더러 모르는 사이 그들의 무지에 감염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아니 제자들보고 지금 그들과 같은 상태에 있다고 질책하십니다. 어째서 많이 듣고 많이 말하고 많이 보는 그 사람들을 보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처럼 말할까요?
그것은 그들이 진실을 보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보는 능력을 상실한 것은 그들이 아집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학식이 모자라 견문이 모자라 어두운 것이 아니라 아집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어두운 것입니다. 아집, 바로 자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보는 태도,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태도, 자기 지배 아래 모든 것을 두려는 태도입니다. 그런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면 진실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 한편의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고, 사람들의 모든 행위가 자신을 위해 봉사하는 것인 냥 착각합니다. 그러니까 얼토당토 않는 생각, 얼토당토 않는 발언들을 내뱉는 것입니다.
그 위험한 누룩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통탄해마지 않는 것은 당신을 가장 가까이서 따라다닌다는 제자들마저 그 누룩에 감염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앙을 갖고 있다면서도 자기욕망을 채우는 것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정말 해괴한 일을 전해 들었습니다. 얼마 전 브라질 유태인 모아실 페레이라 목사가 서울에서 '치유와 기적 재정축복 은사접목 한국 성회'를 열었습니다. 안수기도를 하고 나면 길이가 안 맞는 팔다리가 늘어나 균형을 이루고, 키가 자라고, 썩은 이빨 대신에 금이빨이 생기는 일이 벌어진다고 홍보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자기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증언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 병고를 겪는 사람이 없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나 있을 수 없는 그런 황당한 일이 어떻게 버젓이 신앙의 이름으로 횡행하고 있을까요? 이적을 바라고 그것이 자신의 욕구를 중촉시켜 주는 것을 신앙의 전부로 착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세계 지배의 욕망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 그 자체를 신앙으로 착각하는 것 또한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자기 중심의 지배 욕망으로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의 누룩'은 우리 곁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너무 극단적인 경우만을 예로 들어 말한 것 같지만, 정말 다양한 형태로 그 욕망은 우리를 맴돌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예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워 하셨을까요?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 또는 사두개파 사람들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제자들마저 그런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십니다. 당신과 삶을 함께 나눈 제자들마저 진실을 알지 못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진실을 보는 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진실을 듣는 귀가 열리기를 바랍니다. 진실을 말하는 말문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 것을 우상 섬기듯, 어떤 영웅을 떠받들 듯 섬겨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섬기는 것은 자기의 욕망을 예수께 투사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의 진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단지 예수를 섬기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예수의 믿음을 따르고 예수의 삶을 사는 것이 제자의 길이며,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불가능해 보일지 모르지만, 감히 예수의 삶을 살겠다고 나선 이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실을 망각한다면, 우리가 교회를 이룬 것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욕망 앞에서 내팽개쳐져버릴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진실로 예수의 믿음을 따르고 예수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헤롯의 누룩이 아니라 예수의 복음을 따르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제목: 헤롯의 누룩
본문: 마가복음 8:14-21
올림픽과 같은 큰 국제대회가 열리면 으레 많은 일화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 가운데 하나, 제가 신문 귀퉁이에서 발견한 일화입니다.
미국올림픽위원회는 대회에 참가하면서 선수들에게 다른 나라 사람들을 자극할 수 있는 행동을 극도로 자제하도록 요청했다고 합니다. 이라크 전쟁으로 전세계에 만연해 있는 반미감정을 혹시라도 자극하는 일이 생길까 봐서였습니다. 그래서 미국 선수들은 승리의 순간에도 성조기를 흔드는 세리머니도 못하고 숨죽이며 자제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는 미국의 정치가들 때문에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조지 부시는 대선을 위한 텔레비전 캠페인에 올림픽을 이용했습니다. "이번 올림픽에는 자유를 찾은 두 국가가 더 참여했다"고 했다는데, 그 두 국가란 물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말합니다. 또 이라크 축구가 결승에 진출할 경우 아테네를 방문하겠다고 공언을 했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엄중 경고를 했습니다.
저는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순수하게 스포츠 정신으로 일관한 집단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 집단이 조지 부시에게 경고를 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노골적으로 올림픽을 정치적 이용 수단으로 삼는 것을 경고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찬사를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전쟁이라는 비참한 상황에서도 올림픽에 참가해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선수들의 몫이지, 결코 미국이나 조지 부시의 몫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착각하지 말라',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지 말라'는 경고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배의 욕망은 그렇게 눈을 멀게 합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보기 때문에 사태의 진실을 보지 못합니다. 아예 사태의 진실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유리한 대로 해석해서 사람들에게 선전하면 자기 몫이 아닌 것도 자기 몫으로 돌아오는 세상의 원리를, 여기에서 우리는 봅니다.
올림픽과는 상관이 없지만, 그리 멀지 않은 옛날의 또 다른 일화입니다. 18세기말 이집트를 점령했던 나폴레옹은 잠시 망상에 빠졌다고 합니다. 자신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이슬람권의 아시아를 완전히 지배함으로써 제2의 알렉산더가 되는 꿈을 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자신이 즐기는 포도주를 끊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환상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영국군의 압박 때문에 나폴레옹이 중동에서 패자가 되는 꿈을 접어야 했지만, 지배의 욕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파렴치하게 만드는지를 알려주는 일화입니다.
잠시동안이나마 나폴레옹의 환상은 교회가 유럽을 지배하던 중세 같으면 그야말로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교회의 권위를 부정했던 프랑스 시민혁명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지배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권력의 후안무치함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들 권력자들에게 종교적 신념이나 대의명분이 얼마나 하찮은 허울에 불과한 것인지 보여줍니다. 지배의 욕망, 권력의 야욕 앞에서는 그 어떤 고상한 것도 부차화 되고 누추하게 됩니다. 그런 야욕으로 불타는 사람들이 영웅으로, 위인으로 존경을 받는 한 진실이 숨 쉴 틈은 없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함께 공부하기도 했던,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언뜻 보면 참 아리송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만 떼어놓고 보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앞에서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행적, 그 가운데서도 굶주린 사람들을 먹인 두 차례의 사건, 그리고 앞뒤를 꾸미고 있는 두 사건 곧 벙어리를 낫게 한 사건과 눈먼 사람을 고친 사건을 유념할 때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오늘 말씀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듣게 하고 말하게 하고 보게 하는 예수님의 몫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귀로 듣고 있다고 해서 언제나 진실을 듣는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이 말을 하고 있다고 해서 언제나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눈을 뜨고 있다고 해서 언제나 진실을 제대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건의 현장에 있다고 해서, 어떤 일에 동참하고 있다고 해서 그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정말 필요한 것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째서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될까요? 오늘 말씀은 그 답의 단서를 보여줍니다.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 때문입니다. 같은 뜻의 말씀을 전하는 마태복음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누룩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누룩'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16:6). 누가복음은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이라고만 언급하고 있습니다(12:1). 그런데 그 누룩이 무엇을 뜻하는지 해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위선'이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서에 '위선' 또는 '외식'으로 번역된 이 말은,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겉치레' 정도보다 훨씬 강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그 말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또는 모르면서도 아는 척, 악하면서도 착한 척 하는 의식적인 불성실과 위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참과 거짓, 요구와 실재 사이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말로 모르는 '무명'(無明)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로 착각하는 상태입니다. 마치 누룩이 번지듯 모르는 사이에 번져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사람을 그런 위선의 상태, 아니 무지의 상태로 몰아넣는 것이 무엇일까요? 보십시오. 각기 복음서에 언급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공부를 적게 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헤롯 또는 권력층들, 이들은 공부를 많이 안 했을 수도 있지만 당시 일반민중들보다는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권세가들이니 학구적이지는 않다 하더라도 견문이 넓었을 것입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제사장들이니 공부를 하지 않았을 턱이 없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공부를 제일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들을 보고 진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무지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라 일컫고 있고, 제자들더러 모르는 사이 그들의 무지에 감염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아니 제자들보고 지금 그들과 같은 상태에 있다고 질책하십니다. 어째서 많이 듣고 많이 말하고 많이 보는 그 사람들을 보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처럼 말할까요?
그것은 그들이 진실을 보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보는 능력을 상실한 것은 그들이 아집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학식이 모자라 견문이 모자라 어두운 것이 아니라 아집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어두운 것입니다. 아집, 바로 자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보는 태도,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태도, 자기 지배 아래 모든 것을 두려는 태도입니다. 그런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면 진실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 한편의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고, 사람들의 모든 행위가 자신을 위해 봉사하는 것인 냥 착각합니다. 그러니까 얼토당토 않는 생각, 얼토당토 않는 발언들을 내뱉는 것입니다.
그 위험한 누룩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통탄해마지 않는 것은 당신을 가장 가까이서 따라다닌다는 제자들마저 그 누룩에 감염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앙을 갖고 있다면서도 자기욕망을 채우는 것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정말 해괴한 일을 전해 들었습니다. 얼마 전 브라질 유태인 모아실 페레이라 목사가 서울에서 '치유와 기적 재정축복 은사접목 한국 성회'를 열었습니다. 안수기도를 하고 나면 길이가 안 맞는 팔다리가 늘어나 균형을 이루고, 키가 자라고, 썩은 이빨 대신에 금이빨이 생기는 일이 벌어진다고 홍보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자기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증언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 병고를 겪는 사람이 없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나 있을 수 없는 그런 황당한 일이 어떻게 버젓이 신앙의 이름으로 횡행하고 있을까요? 이적을 바라고 그것이 자신의 욕구를 중촉시켜 주는 것을 신앙의 전부로 착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세계 지배의 욕망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 그 자체를 신앙으로 착각하는 것 또한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자기 중심의 지배 욕망으로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의 누룩'은 우리 곁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너무 극단적인 경우만을 예로 들어 말한 것 같지만, 정말 다양한 형태로 그 욕망은 우리를 맴돌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예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워 하셨을까요?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 또는 사두개파 사람들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제자들마저 그런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십니다. 당신과 삶을 함께 나눈 제자들마저 진실을 알지 못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진실을 보는 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진실을 듣는 귀가 열리기를 바랍니다. 진실을 말하는 말문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 것을 우상 섬기듯, 어떤 영웅을 떠받들 듯 섬겨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섬기는 것은 자기의 욕망을 예수께 투사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의 진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단지 예수를 섬기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예수의 믿음을 따르고 예수의 삶을 사는 것이 제자의 길이며,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불가능해 보일지 모르지만, 감히 예수의 삶을 살겠다고 나선 이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실을 망각한다면, 우리가 교회를 이룬 것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욕망 앞에서 내팽개쳐져버릴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진실로 예수의 믿음을 따르고 예수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헤롯의 누룩이 아니라 예수의 복음을 따르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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