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단순한 진실 - 누가복음 10:21~24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2 13:38
조회
8532
2004년 9월 1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단순한 진실

본문: 누가복음 10:21-24


두 주에 걸쳐 한 교우와 신앙 문제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지난주일 이야기를 하는 중에 이런 이야기를 던졌습니다. "교회도 학교처럼 여러 단계가 있다면, 우리 교회는 암만 봐도 대학교나 대학원입니다." 제가 헤아려 듣건대, 이런 뜻인 것 같습니다. 유치원 같은 데 가면 먹을 것도 주고, 또 각 단계마다 재미거리가 있어 그것을 '미끼' 삼아 사람들을 유인하는 법인데, 우리 교회는 그렇게 '미끼'를 던지는 데 인색하고 그저 다들 스스로 성숙해지기만을 요구한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제가 웃으면서 그 이야기를 받아 넘겼지만, 순간 머리가 '띵!'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서로 엇갈리는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르면서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하나는 '살림교회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우 이야기는 '고급 학교' 다녀서 좋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뭔가 '미끼'를 던져야 사람들이 몰릴 것 아니냐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한 가지 든 생각이 '사람이면 누구나 바라는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에 소홀했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목사로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였습니다. 과연 '미끼'를 던져야 할까요? '달란트 시장'도 열고, '경품'을 곁들인 시상도 하고 해야 할까요? 물론 우리 교우가 말한 '미끼'란 그런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저 나름대로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더 가까이 가야겠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더 잘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저의 결론은 여전히 '정도'를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 '그리스도'가 빠져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만 그 진실에 접근하는 데 조금 더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인데 며칠 전 한 일간지(<한겨레신문> 2004. 9. 9)에 한국교회 유명 목사들의 설교 비평에 관한 기사가 대문짝 만하게 나왔습니다. 교계신문도 아니고 일반 일간지 한 면을 거의 다 차지했습니다. 이 사회가 교회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사실, 달리 말하면 이 사회에서 교회가 음으로 양으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비평자의 시선에서 나름대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목사들의 설교도 없지는 않았습니다만, 대부분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대형교회들의 목사 설교 대부분이 신학의 부재, 교회중심주의, 역사의식의 빈곤, 개인주의 등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그래서 유감스럽게도 비평의 대상이 된 설교들 대부분이 현실에 영합할 뿐 진정한 예언의 목소리가 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어쨌든 목사로서 섬뜩한 비평이 아닐 수 없었는데, 어째서 그런 평가를 받아야 했을까요? 그 비평 대상 가운데는 제가 직접 들어보거나 읽어본 설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설교도 있었는데, 대개 어떠하리라는 것은 예상이 됩니다. 아마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성서를 강조하고 예수를 강조하는 설교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신학의 부재라는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지나치게 현실 영합적인 까닭 때문일 것입니다. 성서를 말하고 복음을 말하고 예수를 말하지만, 오늘 이 세상을 변화시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 그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하고자 했던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까닭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 세계를 지배하는  가치관이 성서의 용어로 포장되었을 뿐 그 진수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있으되, 그 예수는 '영웅'으로서의 예수, '스타'로서의 예수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시는 씨앗으로서 복음, 세상을 새롭게 하는 누룩으로서 복음이 사라지고 각자의 욕망만이 그럴싸한 '신앙의 상품'으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큰 기둥 가운데 하나는 역사의식입니다. 이 땅의 역사 안에 하나님께서 개입해 들어오신다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있는 현실을 그대로 용인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은  이 세계의 현실이 바뀌도록 기도하게 만들고 그 현실이 바뀌도록 헌신하게 만듭니다. 그런 믿음, 그런 역사의식이 실종된 것이 문제입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내린 결론 역시 '정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복음으로 안내하는 말씀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 정말 예수 그리스도로 안내하는 말씀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 묻고 묻지 않으면 순식간에 정도의 궤도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추구하는 신앙, 복잡한 것 같지만 전혀 복잡하지 않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군더더기를 떨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오히려 복잡한 것은 이 세상이요, 그 세상과 영합하는 교회들입니다. 세간의 비판을 받는 많은 교회들이 아주 단순한 메시지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단순한 메시지 이면에는 복잡한 기제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가수 하나가 뜨는 데 얼마나 복잡한 시스템이 작동하는 지 대개 알지요? 그와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순진한 개척교회 목사들은 밤낮 교회성장 세미나 등을 쫓아다닙니다. 가면 "기도 열심히 하라" "전도 열정을 가져라" 등등의 강사들의 '비결'을 듣습니다. 그 자리에 있을 때는 다 될 것 같은데 돌아오면 안 됩니다. 규모의 논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메커니즘이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은 쏙 빼놓고 목사 한 사람의 헌신성만 강조하니까, 그걸 모르는 개척교회 목사들은 자책하며 가슴에 멍이 드는 것입니다.

살림교회는 그런 것들에 의존하지 않고 교회다운 교회 한번 일궈보자는 교회입니다. 예수를 믿고, 또한 사람들을 믿어보자는 교회입니다. 사람을 믿어보자는 말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다른 어떤 것에 현혹되지 않고 예수를 믿음으로써 거듭날 수 있는지 믿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믿음이 없다면 오늘 당장 해산합시다! 너무 과격했나요? 목사가 여러분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이런 소리도 못하겠지요?

살림교회는 '대중적 스타 가수'가 아니라, 진지한 '언더그라운드 가수'로서 그 진가를 인정받는 교회이기를 원합니다. 그런 존재가 배곯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멀국이 아니라 진국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란하지 않아도 그 맛을 보고 사람들이 찾는 음식집과 같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느낄 때 뿌듯하지 않습니까? 그런 뿌듯함으로 살아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에는 '예수의 감사 기도'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쁨에 넘쳐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기뻤을까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총명한 사람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예수께서 감사를 드린 '이 일'이 무엇인지는 바로 앞(17-20)에 나오는 대로, 사탄을 물리친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파송을 받았던 일흔두 사람이 파송 결과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께서 감사드린 일은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사탄이 무력하게 무너진 사건입니다. '대적하는 자' '고발하는 자'라는 뜻을 지닌 '사탄'은 하나님의 뜻, 예수 그리스도의 길과 다른 세상의 지배 원리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섬김의 길이었다면 사탄의 길은 지배의 길이었습니다. '사탄이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일', 그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던 그 지배의 욕망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무너진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일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께 감사드린 사연은 단지 그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사건의 진실을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내 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예수께서는 더더욱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지혜 있고 총명한 사람'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신 사실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지혜 있고 총명한 사람'은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와 지식에 능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밑지지 않는 영악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이며 그 권력자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철부지 어린아이들'은 그 세상에 물들지 않은 순진한 사람들입니다. 때묻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영악한 세상의 지배원리에 능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지혜 있고 총명한 사람'은 세상의 지배 원리에 능하지만 하늘의 일에는 무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도무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철부지 어린아이'는 세상의 지배 원리에는 무지하지만 하늘의 뜻에는 밝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을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이들 앞에서 사탄은 무력해집니다. 암만 화려한 권세도 무력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께 감사드린 일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같은 말씀을 전하는 마태복음의 말씀은 바로 그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분명하게 전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바로 오늘 말씀에 이어지는 마태의 해석입니다. 세상 권세의 유혹, 대적하는 사탄을 물리치고 나면 그렇게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무거운 짐을 털어 버리고 가볍게 걷는 길입니다. 아주 단순한 진실입니다.


흔히 생각하기를 세상 권세를 떨쳐버리면 남루하고 초라하게 사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고통을 억지로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남루해 보이고 초라해 보이는 것들의 소중함을 아는 것입니다. 작고 하잘 것 없어 보이는 것들의 진가를 아는 것입니다. 전혀 유명하지 않은 바로 내 곁의 형제와 이웃의 소중함을 아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정치와 경제를 좌우하며 거드름을 피우는 콧대 높은 백인을 선망하는 것이 아니라 저 후미진 공장, 저 귀퉁이 시골 농장에서 일하는 까무잡잡한 이방인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저 그랜드캐니언이나 금강산만이 아니라 내 집 앞의 작은 공원, 내가 늘 지나치는 논둑 길과 들판의 진가를 아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생활의 발견, 삶의 발견입니다.

하찮아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의 진가를 알 때, 그 진가가 사람들에게 인정될 때, 세상은 변화됩니다. 우리는 그 단순한 진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그 단순한 진실이 진실로 위대하다고 믿는 교회입니다.

그 단순한 진실을 깨달음으로 그리스도의 길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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