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베들레헴, 초심의 자리 - 미가 5:2~5a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2 14:03
조회
6054
2004년 12월 19일(일) 오전 11:00  천안 살림교회

제목: 베들레헴, 초심의 자리

본문: 미가 5:2-5a


2002년 5월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을 때 유감스러웠던 것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을 방문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사실 그 시점은, 2000년 10월부터 시작된 제2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중봉기)와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초강경 진압작전의 여파가 채 사라지지 않은 시점이라 팔레스타인 땅을 밟을 수 있는지 그 자체가 불투명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불안하고 긴장감이 감도는 땅을 밟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는데, 그 탓에 통상 성지순례를 할 때 둘러보는 몇 군데를 들를 수가 없었습니다. 오며가며 커다란 콘크리트 장애물로 진입로가 완전히 봉쇄된 예리코를 바로 눈앞에 두고 지나쳐야 했고, 베들레헴 근처에는 아예 접근도 못했습니다.

바로 그 해 봄 베들레헴 예수님 탄생기념교회에 피신한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이스라엘군은 교회에 포격을 가해 거의 폐허로 만들어버리고, 베들레헴 전역에서 무참한 학살을 감행했습니다. 제가 팔레스타인 땅을 밟았을 때는 그 사태가 막 수습되고 있는 상황이었고, 거기에 머물고 있는 동안 이스라엘군이 베들레헴에서 철수를 한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군 철수 소문으로 베들레헴을 방문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목숨을 걸지 않는 한 방문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성지순례단 일행은 최대한 베들레헴 가까이 가서, 그러나 저 멀리 가물가물 보이는 길가 언덕에서 바라보며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그러나 정말 유감이었던 것은 베들레헴을 방문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유감스럽고 통탄스러운 일은 이 땅에 평화로 오신 메시아의 고향 베들레헴이 그 평화와는 상반된 갈등의 중심에 놓이게 된 현실이었습니다. '떡의 집', 베들레헴, 생명의 양식의 근원지인 베들레헴이 살육의 땅이 되어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평화의 시원지 바로 그 자리가 무참히 파괴되고, 죽어 가는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아비규환의 현장이 되고 만 사실이 통탄스러웠습니다. 내가 가보지 못해 내 육안에 베들레헴이 저 멀리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현실이 통탄스러운 것이 아니라, 저 베들레헴이 상징하는 이 땅의 평화가 그렇게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현실이 통탄스러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미가서의 본문은 평화의 시원지 베들레헴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사람이 나온다는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주께서 주신 능력을 가지고, 그의 하나님 주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의 떼를 먹일 것이다. 그러면 그의 위대함이 땅 끝까지 이를 것이므로, 그들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평화'가 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심으로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300년 전에 선포된 그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이 예수님의 탄생지, 곧 메시아의 고장이 된 것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차원만은 아닙니다. 예언 그대로 딱 떨어지게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비로소 베들레헴이 메시아의 고장이 된 것만은 아닙니다. 베들레헴이 메시아의 고장, 평화의 시원지가 된 것은 오랜 정신사적 전통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의미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사실 역사적으로는 확증하기 어렵지만), 그 이전에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는 의미를 이미 지니고 있었던 곳입니다.

베들레헴이 메시아의 고장이 된 것은 우선 그곳이 다윗 왕의 출신지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로 그 다윗의 고장에서 다시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아가 나올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어쩌면 아주 단순한 상관관계에서 비롯한 단순한 상상의 소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째서 예루살렘이 아니고 베들레헴일까 생각하면, 그 믿음은 단순한 상상의 소산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정작 다윗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고장은 베들레헴이라기보다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수많은 사연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다윗의 도성'으로 흔히 불립니다. 다윗이 처음으로 수도로 정했던 곳이고 다윗의 왕조가 그곳을 중심으로 그 역사를 이어갔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다윗이 입신양명을 한 곳이었고,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도성으로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 왕과 같은 위대한 정치가로서의 메시아를 그린다면 바로 그 예루살렘과 메시아의 출신지를 결부시키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농사꾼 예언자 미가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에서의 위대한 정치지도자요 군주로서 다윗 왕을 기억하기보다는, 베들레헴에서의 목동 다윗을 기억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 베들레헴이 메시아의 고장이 된 진짜 사연이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작은 고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대로 그 고장에서 태어난 다윗 역시 작은 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새의 여러 아들 가운데 가장 막내둥이였고, 그래서 예언자 사무엘이 설마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점지했으리라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인물이었습니다(삼상 16장). 오늘 본문에서 미가는 그 기억을 환기하고 있을 뿐 아니라 더 거슬러 올라가는 옛날의 일을 환기하고 있습니다.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함으로써 신학적으로 무한히 확장하여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으로까지 말하고 있는 셈인데, 사실은 그 이전에 그 베들레헴에 얽힌 옛 기억을 환기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 이것은 '베들레헴의 에브랏 가문의 거주지'라는 뜻입니다. '베들레헴의 에브랏 가문', 바로 다윗의 가문입니다. 미가는 그 가문이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도 작은 족속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성서 룻기는 어떤 면에서 바로 그 가문의 기원을 이야기해주는 책입니다. 에브랏 가문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이방인 며느리 룻이 일군 가문입니다. 에브랏 가문의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어 대가 끊어져 멸문지경에 이르렀을 때 현명한 어머니 나오미와 신실한 며느리 룻이 그 가문을 다시 일으켰습니다. 대를 잇지 못하고 죽은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질병', '기룐'/'황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실함으로 그 가문을 다시 세운 두 여인의 이름은 '나오미'/'기쁨', '룻'/'아름다움'(또는 '친구')였습니다. 그 이름들이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질병과 황폐의 상황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기쁨과 아름다움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룻기의 이야기요, 그렇게 해서 일구어진 가문이 바로 다윗이 속한 에브랏 가문 이야기입니다.

궁벽한 고을, 아슬아슬한 절망의 상황에서 희망으로 되살아난 한 가문, 그러나 여전히 미약한 가문, 그 가문의 후예 가운데 가장 어린 막내둥이이자 목동, 이것이 바로 '베들레헴의 다윗'이 갖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메시아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다윗'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다윗', '예루살렘의 메시아'가 아니라 '베들레헴의 메시아'는, 그와 같이 절망스러웠던 상황에서 기쁨을 일구어내는 존재를 말하며(룻기),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어 사람들에게 진정한 희망이 되는 존재(삼상 16:7)를 말합니다.


'베들레헴의 메시아'는 그 초심의 자리를 우리에게 환기시킵니다. 예루살렘의 다윗은 위대한 군주로 추앙 받기는 하지만 사실은 흠도 많았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정치권력의 암투에서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의 권력에의 야욕이 자초한 필연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의 다윗에게는 그러한 어두운 그늘이 없습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집안의 막내둥이로서 목동으로서 별 볼일 없어 보였을지 몰라도 그의 인물됨은 당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중심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삼상 16:7), 특히 눈이 아름답고 외모 또한 준수했다(16:12)고 했습니다. 그가 가진 조건에 아랑곳하지 당당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메시아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다윗이 사랑을 받았던 진짜 이유도 사실은 여기에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던 다윗, 보통의 일상을 살아가는 목동으로서의 다윗, 바로 그 다윗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바로 그 다윗의 고향,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추앙 받는 그 다윗의 초심의 자리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초심으로 돌아가자!" 내가 가진 의지가 흔들릴 때,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었는데 뭔가 잘못되어간다고 느낄 때 한결같이 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출발점을 환기하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의 삶의 근본 동기, 우리의 중심을 되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구초심'(首邱初心)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예기>(禮記)에 나오는 이야기로,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태어난 언덕으로 향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것을 일러 '인'(仁) 이라 한다고 말합니다. 근본을 향한 그 마음을 가지는 것이 곧 '인'(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 치고 처음부터 막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누구나 사람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다 좋은 뜻, 선한 동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것이 뒤틀려가고 있는데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들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항상 초심을 확인하고 그것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와는 정반대 되는 말입니다. 한번 먹음 마음이 사흘밖에 가지 못한다는 뜻인데, 그렇게 되면 일을 그르칩니다.  


이방인이 접근할 수 없는 베들레헴, 살육의 참극이 벌어지고, 이제는 유대인과 아랍인을 가르는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이 세워지고 있는 그 베들레헴은, 다윗의 초심의 자리로서, 메시아의 탄생지로서 그 의미를 무색케 하는 오늘 세계의 현실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 한다고 하는데 실상은 갈등과 전쟁으로 나타납니다. 명백히 잘못되었습니다. 평화를 위한다는 동기와 지금 그 현실은 너무나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들 모두가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바로 그 베들레헴에 다시 태어나실 수밖에 없습니다. 평화의 시원지가 아니라 갈등의 중심지로 돌변해버린 그곳에 다시 오셔서, 그게 아니라고 외치실 것입니다. 군화발자국 소리와 탱크 소리로 요란하고, 피비린내로 진동하는 그 베들레헴을 들판에서 양을 치는 목동들의 고장으로, 질병과 황폐의 고장을 기쁨과 아름다움의 고장으로 다시 돌려놓고자 하실 것입니다.

지금 2004년 저 팔레스타인의 베들레헴은 갈등과 고통으로 얼룩져 황폐해진 지금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태어나고 예수께서 태어나신 그 베들레헴은 기쁨과 아름다움, 평화를 의미합니다.

베들레헴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대림절 넷째 주일, 오늘 우리들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마음의 중심을 다시 확인하기를 바랍니다. 그 어떤 기대가 아니라 진정으로 이 땅의 평화, 이 땅의 기쁨, 이 땅의 아름다움, 나와 너 우리들 모두의 평화와 기쁨, 그리고 아름다움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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