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 사도행전 17:22~31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2 15:31
조회
8809
2005년 6월 12일(일) 오전 11:00  천안 살림교회

제목: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본문: 사도행전 17:22-31


우리는 종종 민주주의의 상징으로서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 아테네의 여러 장소와 그 기능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아크로폴리스는 신전이 서 있는 언덕으로, 지금도 훼손된 모습이기는 하지만 완벽한 조형미를 자랑한다는 파르테논 신전이 서 있습니다. 아크로폴리스는 성소로서 권위를 상징하는 장소인 셈입니다.

사실 민주주의의 상징이라 할 만한 장소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이 아니라 그 아래 남서쪽으로 펼쳐져 있는 아고라 광장입니다. 시장과 행정기관이 자리잡은 아고라 광장에는 항상 사람들이 바글거렸고 그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날마다 토론을 즐겼다고 합니다(행17:17). 그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무엇이나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행 17:21). 심오한 진리에 관해 논쟁을 하는가 하면 정사를 논하고, 아마도 일상사의 모든 것을 논하였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바로 이 광장에서 아테네 사람들과 논쟁을 벌입니다.

아크로폴리스 언덕과 아고라 광장 사이에는 하얀 대리석의 언덕이 있습니다. 아레오스파고스(개역성서의 '아레오바고') 언덕입니다. 그곳에서 시비를 가리는 재판이 열렸던 까닭에 아레오바고 법정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아고라 광장에서 벌어진 바울과 아테네 사람들의 논쟁은 결말을 짓기가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자의인지 타의인지 알 수 없지만 바울은 아레오바고 언덕으로 올라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오늘날 그 언덕에 오르면 그 때(주후 51년) 바울이 그 자리에서 했던 이야기가 대리석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사도행전의 본문 말씀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바울의 아테네 선교는 실패한 경우라고 말해왔습니다. 그 결과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본문은 아레오바고 법정의 판사인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부인, 그리고 그 밖의 익명의 몇 사람이 신자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실패'의 원인을 두 가지 측면에서 말합니다. 먼저 아테네 사람들이 철학과 이성으로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사도행전은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전해 들었을 때에는 더러 비웃었다"(17:32)고 전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그들의 철학과 이성에 대응해 그것을 '정복'하려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그 철학과 이성에 호응하여 '변증'하려 했던 바울의 선교방법에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철학과 이성을 뛰어넘는 '은사집회'를 하지 않고 사람들의 생각을 자극하는 설교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선생의 말을 다시 듣고 싶소"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바울의 설교가 사려 깊은 아테네 사람들을 자극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마도 그들 가운데 소수의 사람만이 아주 신중하게 바울의 가르침을 수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흔히 바울의 아테네 선교를 실패라고 말하지만, 과연 그렇게 실패로 단정할 수 있을까요? 그와 같은 평가는 선교의 성패를 그 결과의 양적 규모로만 판단하는 데서 비롯된 것일 뿐입니다. 아레오바고 언덕에서의 바울의 설교는 두 가지 차원에서 기존의 종교 내지는 신앙과는 구별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고, 그 성격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의미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성서의 전통에 익숙한 유대인들과 달리 전혀 다른 사고의 전통을 가진 그리스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방식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바울은 정복주의적 관점에서 그리스 문화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전통과 사고방식을 존중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의 의미를 해명하려고 했습니다. 이 점은 정복주의적인 근대의 기독교 선교활동과 오늘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전도활동을 반성하게 해줍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그리스인들에게서나 유대인들에게 공통되는 종교인식 내지는 신앙의 인식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그저 기독교라는 이름 그 자체만으로 정당성을 갖는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유대인이든 누구나 동시에 빠지는 종교적 함정을 뛰어넘어 진정한 구도의 과정으로서 종교 내지는 신앙을 역설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오늘날 미국의 기독교인이든 아랍의 무슬림이든 동시에 범하는 과오,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동시에 범하는 과오를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해 줍니다.

신들의 언덕이요 권위의 상징으로서 아크로폴리스와 시민들의 광장이자 언덕으로서 민주주의의 상징인 아고라와 아레오바고의 대비되는 의미처럼,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기존의 권위적인 가르침과는 명백히 대조되는 새로운 차원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 가르침을 따른 사람들의 양적 규모에 따라 성패를 판가름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진정으로 사람을 살리는 신앙의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진가를 평가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과연 무엇을 극복하고자 했으며 무엇을 지향했을까요?

첫째로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의 풍부한 종교심을 존중합니다. 아테네에는 수많은 신들의 상과 신전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격분했다고 합니다(17:16). 바울이 아테네 시민들을 보고 종교심이 많다고 한 것은 그렇게 많은 우상들을 섬기는 것을 보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을 보고 비아냥거리는 투로 종교심이 많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아테네 시민들의 종교심을 칭찬합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섬기는 신들 가운데는 '알지 못하는 신'도 있었습니다. 정작 아테네 시민들에게는 그 사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이 보기에 알지 못하는 대상을 향해 열어두고 있다는 것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있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로 아는 데서는 진정한 신앙이 형성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지식을 전부라고 착각하면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알지 못하는 세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 진리에 이르는 출발점입니다.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에게서 그 진정한 신앙의 가능성, 참 진리에 이를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동시에 오늘 우리에게도 그 가능성을 열어둘 것을 일깨워줍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이 말지 못하는 신의 실체를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 신은 사람들이 지은 신전에 거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 굳이 어떻게 존재하느냐고 묻는다면 온 우주에 편만하신 분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어떤 특정한 장소를 지정해 그곳에 거룩한 집을 지어놓고 그 안에 신이 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집을 신전이라 부릅니다. 성전이라는 말은 그 신전에 대한 기독교식 이름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하늘과 땅, 온 우주가 성전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일 뿐입니다(고전 3:16; 고후 6:16). 교회는 결코 배타적으로 거룩한 공간으로서 성전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모이는 집일 뿐입니다. 그 교회는 굳이 특정한 장소에 화려하게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있는 곳이면 어떤 곳이든 상관없습니다. 로마의 카타콤, 갑바도기아의 동굴은 하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있는 곳이면 그 어떤 곳이든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역사적 증거입니다. 신전에 집착하는 종교, 성전에 집착하는 종교, 제도의 권위를 내세우는 종교는 눈에 보이는 실체를 전부로 아는 미숙한 종교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그 백성을 그 안에 가둬둔다는 점에서 위험한 종교입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세 번째로 바울은, 그 하나님은 사람의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라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 그리고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제왕적인 권위로 치장된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는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을 제왕적 권위로 치장하는 것은 구시대 낡은 종교적 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받들어진 신은 마치 공예품처럼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신에 불과합니다. 권위로 군림하는 인간 질서의 속성을 하나님에게 부여한 결과일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당신 앞에 그 신도들을 줄 세우고 머리를 조아리게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계시며 생명을 주시고 호흡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살리는 분입니다. 그 지도자를 마치 독점적인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생각하는 교회나 종교, 그래서 그 지도자가 하나님의 흉내를 내는 교회나 종교는 구시대의 구습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는 어울릴 수 없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바울은, 하나님은 바로 우리들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이 사실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해주셨다는 사실을 환기합니다.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그 형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는 시대와 그 경계가 다르다고 해서 그 속성에 변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시대의 사람이든, 어떤 민족이든,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든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점에서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바울은 주전 3세기의 그리스 시인 아라투스의 시를 인용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다."


바울은 이처럼 낡은 시대의 종교, 곧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한 신을 믿는 종교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종교, 새로운 신앙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덧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무지의 시대에는 그대로 지나치셨지만,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정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사람을 내세워서 심판하실 터인데,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점으로 낡은 시대와 새로운 시대가 구별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을 믿었던 시대를 종식하고 진정한 하나님을 믿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진정한 하나님이 환히 드러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진정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종교로서 기독교의 배타적인 진리 독점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신전, 가시적인 교회질서와 종교제도, 위엄 있는 사제와 종교지도자, 명문화된 교리에서 하나님을 찾는 종교에서 벗어나, 이 땅의 사람들 가운데 함께 살고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을 친구로 삼으시고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사람들을 살려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교회에서 바울의 이와 같은 설교는 실패한 것으로 기억되거나 아예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그것은 오늘의 교회가, 다른 모든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거룩한 신전에서, 가시적인 종교제도에서, 위엄 있는 종교지도자에게서, 숨쉴 틈 없는 교리에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과오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각성시키는 것보다는 기존의 질서에 편안하게 길들이는 것을 신앙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어떤 교회에서, 아니 바로 우리 교회에서 이 말씀을 환기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바울의 그 설교에 대한 평가처럼 '실패'를 자초하는 일일지 모릅니다. 화려한 성전을 갖추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럴 듯한 조직과 제도를 갖추지 못한다는 점에서, 위엄 있는 지도자를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딱 부러지는 교리를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래서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패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는 그 실패는 우리에게 실패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우기지 않음으로써 더 풍부한 지식과 삶에 이를 가능성을 누리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고작 정해진 집안에만 갇혀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가는 곳 어디서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일사분란한 대오를 갖추고 그 누군가를 따라나서는 행렬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은 구원에 이를 수 없지만 나는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자기만족적 쾌감을 누리는 대신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함께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실패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함께 기뻐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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