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근심과 걱정이 엄습할 때 - 고린도후서 7:5~13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03-05 17:29
조회
11791
2006년 3월 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근심과 걱정이 엄습할 때  

본문: 고린도후서 7:5~13


고린도서는 마치 목회자를 위한 책과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고린도서는 교우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절절한 사연들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네 편의 편지 가운데 두 편의 편지는 전해지지 않고 지금 두 편만 남아 있지만, 그 두 편만으로도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사도 바울이 어떻게 애를 썼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 차례 이야기했지만, 고린도교회에는 우리가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빈부 격차로 인한 교우들간의 문제가 있었는가 하면, 교리를 서로 달리 이해하는 데서 오는 문제도 있었고, 또 누구의 견해를 따르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갈리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라고 하지만, 사도 바울이 절대적으로 신뢰와 존경만을 받았던 것도 아닙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사도로서 바울의 권위를 의심하는 교우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문제가 있었던 만큼 사도 바울은 더더욱 열정을 가지고 고린도교회를 위해 기도했고, 교우들을 위해 권면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대목은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뼈아픈 충고를 한 편지를 보내고 난 다음 그 반응을 보고 기뻐하는 내용입니다. 그 편지를 보내놓고 바울 스스로가 잠시 후회했을 정도로 고린도교회 교우들을 슬프게 한 편지가 어떤 내용이었을까요? 과거에는 그 편지가 고린도전서를 의미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편지가 아니라 아마도 오늘날 고린도전서와 후서 사이에 끼워져 있어야 할 이른바 '준엄한 편지'로 추정됩니다. 어쨌든 바울은 그 '준엄한 편지'를 보내놓고 잠시 후회를 했습니다.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어 안타깝지만, 아마도 바울의 마음을 무척 아프게 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고 그 때문에 엄중하게 훈계하는 내용으로 편지를 썼던 것 같습니다(2:1~11 참조).

오늘 본문 말씀을 보자면, 바울은 한편으로 그 편지 때문에 또 다시 마음 아파했던 것 같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마케도니아에서 육체는 조금도 쉬지 못했고 여러 가지 환난을 겪었습니다. 밖으로는 싸움이 있었고 안으로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영육간으로 고단한 그런 지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기쁜 소식이 도착합니다. 디도가 고린도에서 돌아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고린도교회에서 정말 아주 기쁜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들이 뉘우치고 바울을 열렬히 변호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정말 기뻐했습니다.

아마도 바울을 마음 아프게 하고, 다시 기쁘게 한 것은 단순히 바울 개인에 대한 반감 또는 호감의 차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울을 마음 아프게도 하고 기쁘게도 한 것은, 바울이 역설한 십자가의 도, 믿음의 길과 관련되었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에 거부감을 갖고 배척했던 사람들이 그 가르침의 참뜻을 알고 되돌아온 사태를 말할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두고 구원에 이르는 회개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바울을 따르지 않았던 사람들은 바울의 준엄한 훈계를 듣고 속이 많이 상했을 것입니다. 이를 두고 <개역>은 근심했다고 번역했고, <새번역>은 슬퍼했다고 번역했습니다. 그렇게 속상해했던 사람들이 돌아섰습니다. 바울에게는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없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누구에게든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습니다. 그렇게 사랑받고 인정받으면 기쁩니다. 그런데 그 사랑과 인정이 감정적 차원에서이거나 또는 그저 예를 갖추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정말로 뜻을 같이 하는 차원에서까지 이루어진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기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기뻐하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이 자신과 뜻을 같이하고 믿음을 공유한 교우들이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한 때는 그 뜻을, 그 믿음을 함께 공유하지 못하고 등을 돌렸던 사람들이 다시 되돌아 왔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바울은 그들을 보고, 그들의 태도를 보고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라고 말합니다. 한 인간으로서 바울을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 때문에 슬퍼하고 기뻐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바울이 가진 믿음, 가르친 교훈을 함께 공유함으로써 진정한 구원의 길에 이르게 되었기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한 때 등을 돌렸던 이들이 자신의 훈계를 받고 속상했으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바울 자신의 가르침이 부담되었으리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나 바울은 스스로가 깨닫고 또한 믿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근본적으로 후회하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함께 가야 할 길을 마땅히 전했기에 결코 잘못을 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다행스럽게도 사람들이 그 뜻을 받아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새번역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오"(개역 7:10). 이 말씀은 한 때 등을 돌린 고린도교회의 일부 교우들과 바울 자신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근심하고 슬퍼해야 했지만, 근심하고 슬퍼하는 가운데서도 이들은 중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과연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를 부단히 물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 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바로 그와 같은 태도를 말합니다. 근심 걱정하고 슬퍼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다면 마침내 그 뜻을 깨달아 각자, 그리고 서로를 파멸 또는 파탄에 이르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슬픔' 또는 '세상의 근심'이란 미우니까 밉고 나쁘니까 나쁘다는 태도로 일관함으로써 슬픔과 근심, 그리고 증오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슬픔과 근심 그 자체에 머물러 있기에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돌이킨 교우들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근심으로 많은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여러분이 나타낸 그 열성, 그 변호, 그 의분, 그 두려워하는 마음, 그 그리워하는 마음, 그 열정, 그 징계하는 정신(아마도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태도를 말하는 듯)을 보십시오"(7:11). 매우 시사적인 이 말씀은 많은 것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랑의 마음, 깨닫고 믿는 것을 지켜내고 이루고자 하는 열정 등등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아마도 소위 '세상의 근심'에 사로잡혀 '바울 선생은 이해할 수 없어! 우리와는 맞지 않아!' 해버렸다면 결코 맛볼 수 없는 소중한 것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물었기에 진정한 구원의 길에 이를 수 있었고, 소중한 사람, 그리고 소중한 그 모든 것을 또한 얻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근심 걱정을 합니다. 속상한 일, 불만족스러운 일도 많습니다. 누군가가 정말 그립기도 하지만 누군가가 정말 싫고 미워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 처할 때 그 상황 자체에 매몰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근심' '세상의 슬픔'입니다. 그 결과는 '죽음'일 뿐입니다. 그러나 어째서 그러한 사태가 벌어졌는지, 그 뜻이 무엇인지를 물을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그 결과는 구원입니다.

근심과 슬픔, 또는 싫증과 증오 등이 시시때때로 우리를 엄습해올 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근심으로 구원의 길에 이르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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