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백향목 - 시편 92:12~15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08-06 15:30
조회
8904
2006년 8월 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무너지는 백향목
본문: 시편 92:12~15
“의인은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높이 치솟을 것이다.” 올바른 사람을 이르는 시편의 아름다운 은유입니다. 아마도 팔레스타인 일대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일 것입니다.
오아시스 주변에 촘촘히 둘러서 있는 종려나무들의 모습은 쉽사리 볼 수 있는 풍경 가운데 하나입니다. 멀리 사막에서 바라다 보이는 종려나무들은 그 풍경 자체로도 아름답거니와, 그것이 곧 생명이 살아 있다는 것을 드러내주는 지표이기에 더더욱 아름답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오직 레바논에서만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흔히 송백나무로 일컫지만 성서가 백향목으로 일컫는 이 나무는 우리의 소나무 또는 잣나무를 닮은 침엽수로 레바논의 산악지대에서만 자라는 나무입니다. 요즘은 보호수로 얼마 남지 않았지만, 옛날에는 레바논 산악지대에 널리 서식하여 가장 귀한 목재로 활용되었습니다. 오래 전에 그 지역에서 문명을 일군 페니키아인들은 백향목으로 배를 만들었고,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할 때 내부를 그 나무로 장식했습니다. 목재로서 귀하게 활용되었을 뿐 아니라 그 자태의 아름다움으로 널리 칭송을 받았습니다. 성서의 시편과 아가서를 비롯 곳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말할 때 곧잘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비유합니다.
오늘 시편의 말씀 또한 의인을 그와 같이 백향목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주의 집에 뿌리를 내렸으니,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크게 번성할 것이다. 늙어서도 열매를 맺으며, 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르를 것이다.” 의인의 아름다운 삶을, 깊게 뿌리를 내리고 하늘 높이 치솟은 백향목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국기에 그 백향목을 새겨 넣고,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레바논이 지금 전쟁의 참화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국의 병사 2명을 억류하고 있는 헤즈볼라를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벌써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만 명이 난민이 되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에 앞서 이스라엘은 역시 억류된 자국의 병사 1명을 구출한다는 명분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인 가자 지역을 무차별 공격해 100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가자 지역을 생지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가자 지구에 있는 발전시설이 파괴되어 전기는 물론 가스마저 공급되지 않는 상황인데, 그것을 복구하려면 최소한 6개월은 걸린다고 합니다. 그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오도가도 못한 채 생지옥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정치범으로 가두고 대규모의 일상적인 국가테러를 가한 이스라엘은 지금 자국의 병사를 구하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정권을 붕괴시키고,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소탕할 목적으로 전쟁을 감행했습니다. 헤즈볼라는 1982년 이스라엘의 침략에 맞서 조직된 단체로서 단순히 무장단체가 아니라 정치조직으로서 국회의원을 배출하였을 뿐 아니라 빈민구제 등의 활동으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 단체를 테러조직으로 매도하고 전쟁을 감행한 것은 자신들의 독보적인 팔레스타인 지배에 방해가 되는 세력을 제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일 뿐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세계에서 단 두 나라, 곧 전쟁을 벌인 당사국 이스라엘과 그를 두둔하는 미국을 제외하고는 세계의 어떤 나라도 그 명분에 공감하지 않는 전쟁이 지금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무고한 레바논 주민들이 죽어가고 있거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푸르른 산과 마르지 않는 물, 그리고 비옥한 토지를 갖춘 레바논은 중동에서 보기 드물게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나라입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그 나라의 국기가 말하듯 레바논 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또한 그와 닮았습니다. 시편은 또 노래합니다. “레바논의 백향목들이 물을 양껏 마시니, 새들이 거기에 깃들고, 황새도 그 꼭대기에 집을 짓습니다”(시편 104:16~17). 마치 그 모양처럼 레바논은 다양한 종파의 사람들이 어울려 하나의 공화국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아파 무슬림, 순니파 무슬림, 그리고 마론파 기독교인들, 그 밖에 두르즈파 무슬림과 쿠르드인, 유대인을 비롯 여러 소종파를 포함하면 대략 17개의 종파들이 어울려 있습니다. 아랍어가 공용어이지만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은 까닭에 프랑스어가 널리 통용되고 오늘날에는 영어 또한 널리 통용됩니다.
바빌론제국이래 페르시아와 그리스, 로마, 빈잔틴 그리고 아랍과 오스만터키제국을 거쳐 근세에는 프랑스의 식민통치까지 2500년 가까이 제국의 통치를 받아 왔지만 고유한 문명의 전통을 이어오기도 했습니다. 찬란한 고대 페니키아 문명은 동서문명을 잇는 가교로서 역할을 했고, 오늘날 유럽과 중동의 여러 언어의 문자들은 모두 페니키아 알파벳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레바논은 동서문명이 교차하고 여러 종파가 어울리는 화합의 실험장과도 같습니다. 적어도 외부의 폭력적인 개입이 없는 한 레바논은 그 조화로운 평화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물을 양껏 마신 백향목에 새들이 깃들과 황새가 집을 짓는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이질적이고 다양한 사람들이 엉켜 있으니 그들이 누리는 평화는 언제나 살얼음판과 같은 불완전한 평화일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것은 이질적인 것을 용납하지 못하지 못하는 패권의 논리를 따르는 가치판단일 뿐입니다. 평화가 깨진 것은 독점적인 지배욕이 빚어낸 야만의 폭력 때문이지 다양한 이질적인 요소들이 어울려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백향목은 가지가 무성하고 그 무성한 가지에 온갖 새들이 깃들어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끼가 내려쳐지고 톱질이 가해지기에 무너질 뿐입니다.
의인은 마치 레바논의 백향목 같다고 했습니다. 정의로운 세계 역시 대지에 깊게 뿌리 내리고 하늘높이 솟아 그 무성한 가지에 온갖 새들이 깃든 백향목과 같습니다. 다양한 문명과 종파가 이뤄낸 화합을 이룬 나라가 공격을 받고 평화가 깨지고 있는 사태는 오늘 이 세계에서 정의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존립과 자기의 이익만을 내세우는 불의의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서로 이질적이고 다양한 존재들이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인정하지 못하는 세계의 실상입니다.
정의는 결코 서릿발과 같이 매서운 것이 아니며 메마른 것이 아닙니다. 정의는 포탄의 공포 아래서 두려워하는 아이를 감싸 안은 어머니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무분별한 군사적 공격은 언제나 그렇듯이 어린아이들과 여자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가혹합니다. 레바논의 일간지<데일리스타>의 전직 기자이며 두 아이의 엄마인 림 핫다드는 <라이스 장관님 아이들의 비명이 들립니까?>라는 제목의 편지에서 이렇게 호소합니다.
“내 인생이 소모품이라고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내 인생과 아이들이 정말 쓸모없다고 깨달은 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콘돌리자 라이스 장관님은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즉각 정전에 반대하는 자기 정부의 입장을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라이스 장관님, 당신과 당신 친지들이 폭격을 당해도 그런 식으로 생각할 것인지 나는 의아합니다. 한 시간의 폭격도, 아니 1분간, 1초간의 폭격도 삶과 죽음을 갈라놓습니다. 그렇다면, 라이스 장관님, 당신도 이스라엘이 즉각 반응할 정전요구에 나서겠지요?
질문을 하나 하지요. 당신 아이들을 먹일 우유가 충분합니까? 집의 창문이 흔들릴 때 당신의 작은 아이들은 공포에 떨까요? 당신은 어머니가 아니어서 이 소중한 모성본능을 모를 것입니다. 그건 사랑이라고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학살될 때 당신도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 아픔을 느낄 것입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즉각 정전이라는 은총을 베풀었다면, 어제 60명의 민간인들은 카나 마을의 자기 집 지하실에서 숨을 곳을 찾다가 죽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한겨레신문> 2006. 8. 2.)
정의는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가장 두려워하는 이들과 고통스러워하는 이들, 그들의 마음으로 행하는 곳에 있습니다. 마치 우뚝 선 백향목처럼 아름다운 삶과 세계를 가꾸는 길, 그 길에 대한 분별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아픔이 있는 곳에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함께 한다면 우리는 이미 옳은 길, 의인의 길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사태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한미 FTA에 대해서도, 북한 미사일 발사에 대해서도, 이 나라의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 곁의 형제와 이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다운 삶, 진실한 삶, 의로운 삶은 결코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세계는 한 없이 복잡해보이고 실제로 복잡합니다. 그러나 그 복잡한 세계를 헤쳐 나가는 길을 찾기가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나만 살겠다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을 때 그 길을 찾기 어려울 따름입니다. 우리가 그 욕망을 포기하고 타인의 아픔에 민감해질 수 있다면 그 길은 쉽게 찾아집니다. 우리는 모두 그 길을 찾아 나선 도반들입니다. 그 길을 보여주고 우리를 그 길로 안내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하늘 높이 치솟은 백향목처럼 아름다운 우리의 삶, 아름다운 이 세계를 향한 믿음의 행렬에서 결코 쓰러지지 않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제목: 무너지는 백향목
본문: 시편 92:12~15
“의인은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높이 치솟을 것이다.” 올바른 사람을 이르는 시편의 아름다운 은유입니다. 아마도 팔레스타인 일대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일 것입니다.
오아시스 주변에 촘촘히 둘러서 있는 종려나무들의 모습은 쉽사리 볼 수 있는 풍경 가운데 하나입니다. 멀리 사막에서 바라다 보이는 종려나무들은 그 풍경 자체로도 아름답거니와, 그것이 곧 생명이 살아 있다는 것을 드러내주는 지표이기에 더더욱 아름답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오직 레바논에서만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흔히 송백나무로 일컫지만 성서가 백향목으로 일컫는 이 나무는 우리의 소나무 또는 잣나무를 닮은 침엽수로 레바논의 산악지대에서만 자라는 나무입니다. 요즘은 보호수로 얼마 남지 않았지만, 옛날에는 레바논 산악지대에 널리 서식하여 가장 귀한 목재로 활용되었습니다. 오래 전에 그 지역에서 문명을 일군 페니키아인들은 백향목으로 배를 만들었고,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할 때 내부를 그 나무로 장식했습니다. 목재로서 귀하게 활용되었을 뿐 아니라 그 자태의 아름다움으로 널리 칭송을 받았습니다. 성서의 시편과 아가서를 비롯 곳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말할 때 곧잘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비유합니다.
오늘 시편의 말씀 또한 의인을 그와 같이 백향목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주의 집에 뿌리를 내렸으니,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크게 번성할 것이다. 늙어서도 열매를 맺으며, 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르를 것이다.” 의인의 아름다운 삶을, 깊게 뿌리를 내리고 하늘 높이 치솟은 백향목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국기에 그 백향목을 새겨 넣고,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레바논이 지금 전쟁의 참화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국의 병사 2명을 억류하고 있는 헤즈볼라를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벌써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만 명이 난민이 되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에 앞서 이스라엘은 역시 억류된 자국의 병사 1명을 구출한다는 명분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인 가자 지역을 무차별 공격해 100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가자 지역을 생지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가자 지구에 있는 발전시설이 파괴되어 전기는 물론 가스마저 공급되지 않는 상황인데, 그것을 복구하려면 최소한 6개월은 걸린다고 합니다. 그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오도가도 못한 채 생지옥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정치범으로 가두고 대규모의 일상적인 국가테러를 가한 이스라엘은 지금 자국의 병사를 구하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정권을 붕괴시키고,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소탕할 목적으로 전쟁을 감행했습니다. 헤즈볼라는 1982년 이스라엘의 침략에 맞서 조직된 단체로서 단순히 무장단체가 아니라 정치조직으로서 국회의원을 배출하였을 뿐 아니라 빈민구제 등의 활동으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 단체를 테러조직으로 매도하고 전쟁을 감행한 것은 자신들의 독보적인 팔레스타인 지배에 방해가 되는 세력을 제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일 뿐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세계에서 단 두 나라, 곧 전쟁을 벌인 당사국 이스라엘과 그를 두둔하는 미국을 제외하고는 세계의 어떤 나라도 그 명분에 공감하지 않는 전쟁이 지금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무고한 레바논 주민들이 죽어가고 있거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푸르른 산과 마르지 않는 물, 그리고 비옥한 토지를 갖춘 레바논은 중동에서 보기 드물게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나라입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그 나라의 국기가 말하듯 레바논 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또한 그와 닮았습니다. 시편은 또 노래합니다. “레바논의 백향목들이 물을 양껏 마시니, 새들이 거기에 깃들고, 황새도 그 꼭대기에 집을 짓습니다”(시편 104:16~17). 마치 그 모양처럼 레바논은 다양한 종파의 사람들이 어울려 하나의 공화국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아파 무슬림, 순니파 무슬림, 그리고 마론파 기독교인들, 그 밖에 두르즈파 무슬림과 쿠르드인, 유대인을 비롯 여러 소종파를 포함하면 대략 17개의 종파들이 어울려 있습니다. 아랍어가 공용어이지만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은 까닭에 프랑스어가 널리 통용되고 오늘날에는 영어 또한 널리 통용됩니다.
바빌론제국이래 페르시아와 그리스, 로마, 빈잔틴 그리고 아랍과 오스만터키제국을 거쳐 근세에는 프랑스의 식민통치까지 2500년 가까이 제국의 통치를 받아 왔지만 고유한 문명의 전통을 이어오기도 했습니다. 찬란한 고대 페니키아 문명은 동서문명을 잇는 가교로서 역할을 했고, 오늘날 유럽과 중동의 여러 언어의 문자들은 모두 페니키아 알파벳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레바논은 동서문명이 교차하고 여러 종파가 어울리는 화합의 실험장과도 같습니다. 적어도 외부의 폭력적인 개입이 없는 한 레바논은 그 조화로운 평화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물을 양껏 마신 백향목에 새들이 깃들과 황새가 집을 짓는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이질적이고 다양한 사람들이 엉켜 있으니 그들이 누리는 평화는 언제나 살얼음판과 같은 불완전한 평화일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것은 이질적인 것을 용납하지 못하지 못하는 패권의 논리를 따르는 가치판단일 뿐입니다. 평화가 깨진 것은 독점적인 지배욕이 빚어낸 야만의 폭력 때문이지 다양한 이질적인 요소들이 어울려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백향목은 가지가 무성하고 그 무성한 가지에 온갖 새들이 깃들어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끼가 내려쳐지고 톱질이 가해지기에 무너질 뿐입니다.
의인은 마치 레바논의 백향목 같다고 했습니다. 정의로운 세계 역시 대지에 깊게 뿌리 내리고 하늘높이 솟아 그 무성한 가지에 온갖 새들이 깃든 백향목과 같습니다. 다양한 문명과 종파가 이뤄낸 화합을 이룬 나라가 공격을 받고 평화가 깨지고 있는 사태는 오늘 이 세계에서 정의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존립과 자기의 이익만을 내세우는 불의의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서로 이질적이고 다양한 존재들이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인정하지 못하는 세계의 실상입니다.
정의는 결코 서릿발과 같이 매서운 것이 아니며 메마른 것이 아닙니다. 정의는 포탄의 공포 아래서 두려워하는 아이를 감싸 안은 어머니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무분별한 군사적 공격은 언제나 그렇듯이 어린아이들과 여자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가혹합니다. 레바논의 일간지<데일리스타>의 전직 기자이며 두 아이의 엄마인 림 핫다드는 <라이스 장관님 아이들의 비명이 들립니까?>라는 제목의 편지에서 이렇게 호소합니다.
“내 인생이 소모품이라고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내 인생과 아이들이 정말 쓸모없다고 깨달은 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콘돌리자 라이스 장관님은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즉각 정전에 반대하는 자기 정부의 입장을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라이스 장관님, 당신과 당신 친지들이 폭격을 당해도 그런 식으로 생각할 것인지 나는 의아합니다. 한 시간의 폭격도, 아니 1분간, 1초간의 폭격도 삶과 죽음을 갈라놓습니다. 그렇다면, 라이스 장관님, 당신도 이스라엘이 즉각 반응할 정전요구에 나서겠지요?
질문을 하나 하지요. 당신 아이들을 먹일 우유가 충분합니까? 집의 창문이 흔들릴 때 당신의 작은 아이들은 공포에 떨까요? 당신은 어머니가 아니어서 이 소중한 모성본능을 모를 것입니다. 그건 사랑이라고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학살될 때 당신도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 아픔을 느낄 것입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즉각 정전이라는 은총을 베풀었다면, 어제 60명의 민간인들은 카나 마을의 자기 집 지하실에서 숨을 곳을 찾다가 죽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한겨레신문> 2006. 8. 2.)
정의는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가장 두려워하는 이들과 고통스러워하는 이들, 그들의 마음으로 행하는 곳에 있습니다. 마치 우뚝 선 백향목처럼 아름다운 삶과 세계를 가꾸는 길, 그 길에 대한 분별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아픔이 있는 곳에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함께 한다면 우리는 이미 옳은 길, 의인의 길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사태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한미 FTA에 대해서도, 북한 미사일 발사에 대해서도, 이 나라의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 곁의 형제와 이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다운 삶, 진실한 삶, 의로운 삶은 결코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세계는 한 없이 복잡해보이고 실제로 복잡합니다. 그러나 그 복잡한 세계를 헤쳐 나가는 길을 찾기가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나만 살겠다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을 때 그 길을 찾기 어려울 따름입니다. 우리가 그 욕망을 포기하고 타인의 아픔에 민감해질 수 있다면 그 길은 쉽게 찾아집니다. 우리는 모두 그 길을 찾아 나선 도반들입니다. 그 길을 보여주고 우리를 그 길로 안내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하늘 높이 치솟은 백향목처럼 아름다운 우리의 삶, 아름다운 이 세계를 향한 믿음의 행렬에서 결코 쓰러지지 않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전체 0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