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쫓겨난 이들의 하나님 - 창세기 21:15~19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7-04-29 15:47
조회
9290
2007년 4월 2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쫓겨난 이들의 하나님  

본문: 창세기 21:15~19


지난주간에 익명의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흔히 목사에게 익명으로 전화해 온 경우는 이상한 전화들이 대부분입니다. 상담을 원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돈으로 도움을 달라고 하는 경우가 숱하게 많습니다.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라 익명의 낯선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올 경우에는 우선 긴장부터 합니다. 그런데 이번 전화는 그런 전화가 아니었습니다. 정말 진지하게 신앙상담을 해 온 전화였습니다.

‘좀 먼 곳인데 통화할 수 있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멀리 거제도라고 했습니다. 통화하는 데 거리가 상관있겠습니까? 통화 못할 다른 사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거리는 문제될 게 없었습니다. 나를 어찌 알고 전화하셨느냐 했더니 인터넷에서 보고 전화한다고 했습니다. 이 분 이야기는, 교회는 다니고 싶은데 다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의문이라고 속내를 털어 놨습니다. 오래 전부터 교회 다닌 것은 아니고, 6개월 전부터 부인과 아이들을 따라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니다 보니까 교회의 좋지 않은 모습도 눈에 띄고, 이런저런 의문도 들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대형교회들의 이상한 행태도 마땅치 않고, 또 성서를 들여다보니까 해명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많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예수님 탄생 이야기도 복음서마다 다르고, 창조 이야기도 다른 이야기들이 같이 나오고 또 예정론이라는 것도 의문인데, 이에 대해 목사님께 질문을 하면 모순된 것을 보려 하지 말고 그저 믿으라고만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도 없는 것 같고, 물질적 축복에 관한 이야기만 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하나하나 답해드렸더니 ‘감이 온다’고 답했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짧은 통화였지만, 현실의 교회에서 보이는 신앙만이 전부가 아니고 전혀 다른 신앙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교감할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주변의 교회 두어 군데 소개를 해주고 통화를 마쳤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나니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교회를 비방하고자 마음먹은 것도 아니고, 그저 상식적으로 제기되는 의문을 풀어보려 하고, 또 나름대로 상식적 수준에서 건강한 교회상을 그리고 있는데, 그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얼굴도 모르는 저에게까지 전화를 해 속내를 털어놓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교회에는 모종의 커다란 장벽이 가로막혀 있는 셈입니다. 그 장벽 너머 사람들과 동화되지 않는 한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 가로막혀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떻게 하면 그 장벽을 제거할 수 있을까요? 그 장벽을 어떻게든 통과해 들어오라고 손짓하기보다는 교회 스스로 그 장벽을 허물어버리는 길은 없을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몇 주 전에 수요성서연구 시간에 함께 공부했던 내용 가운데 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정실 부인 사라와 그 아들 이삭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의 소실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 이야기는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서는 아브라함의 두 부인과 그 아들들의 이야기를 모두 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오늘날 유대인과 아랍인의 기원이 되는 인물들로 받들어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 아버지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이삭은 유대인의 조상으로, 이스마엘은 아랍인의 조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성서의 표면적 이야기는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사라와 이삭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전승을 따르고 있고 오늘 기독교인들 역시 그 전승을 따르고 있습니다. 반면에 꾸란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중심으로 하는 전승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성서가 간직한 근본 동기를 잘 드러내주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서는 어찌 보면 일등과 이등, 아니 일등과 꼴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등이 일등이 되는 이야기, 둘째가 첫째가 되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못난 사람이 잘난 사람을 제치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가 그렇고,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이삭과 이스마엘 이야기가 그렇고, 또한 이삭의 아들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더 확대하자면 떠돌이 조상 아브라함 이야기 자체가 그렇고,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예언자들의 선포도 마찬가지요,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까지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특권을 다 내팽개친 사도 바울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자식을 갖지 못한 아브라함은 그의 부인 사라의 몸종인 이집트 여인 하갈에게서 첫 아들을 얻습니다. 그가 이스마엘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께서는 정실 부인인 사라에게서 약속의 아들을 보게 했다고 전합니다. 그 아들이 아브라함의 적통을 잇습니다. 아브라함의 둘째 아들이었던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정실에게서 태어난 까닭에 첫째가 됩니다. 반면에 첫째 아들인 이스마엘은 종의 신분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까닭에 서자가 되고, 결국 두 모자는 내쫓기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사람들은 대개 여기까지 기억합니다. 성서 시대 그리고 오늘의 유대인들, 또한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여기까지만 기억합니다. 약속의 자식인 이삭이 첫째가 되고 따라서 그 후손이 선민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인간적 욕정의 자식인 이스마엘은 적자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쫓겨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오늘의 유대인과 아랍인에게도 그대로 적용합니다. 선민이 땅을 차지할 수 있는 반면 내쫓긴 민족은 유리방황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산입니다. 성서는 또 다른 기억과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또 다른 기억과 이야기를 발견해내는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읽어내는 것이요 우리들의 편견을 걷어내는 길입니다. 우리 스스로도 모르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장벽을 걷어내는 길입니다.

성서는 감출래야 감출 수 없는 또 다른 진실을 전합니다. 유대인과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선민의식에 빠져 있는 탓에 보지 못했던 진실을 성서는 분명히 전합니다. 하갈과 이스마엘 역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 안에 있으며 그들 또한 하나님의 복을 약속받은 사람들입니다.

하갈이 임신하고 그의 주인인 사라의 질투로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펼치며 복을 내리십니다(16:7이하). 그가 고통 가운데 부르짖자 하나님께서는 그 부르짖음을 듣습니다. 여기에서 새로 태어날 아이의 이름이 붙여집니다. ‘이스마엘’, ‘하나님께서 들으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갈은 하나님을 뵙습니다. 하나님을 뵈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을 직접 뵈면 성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갈은 “내가 여기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뵙고도, 이렇게 살아서, 겪은 일을 말할 수 있다니!”하고 감격합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을 만난 샘물을 ‘브헬라해로이’, 곧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했다고 합니다(16:13-14).

그 고통과 감격을 동시에 겪었던 하갈은 집으로 되돌아 와 마침내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사라에게서 이삭이 태어나고 성장을 하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삭과 놀고 있는 이스마엘을 보고, 사라는 걱정했습니다. 걱정이 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부탁합니다. 장차 나눠질 유산이 근심의 근원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 유산이 문제입니다. 두 아들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은 괴로운 일이었지만, 도리 없이 사라의 청을 듣고 맙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말을 따라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냅니다. 약간의 먹을거리와 물 한 부대를 하갈에게 메워 주며 내보냅니다.

약간의 먹을거리와 물 한 부대는 광야에서 버티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브엘세바 광야에서 헤매던 모자는 이내 탈진 상태에 이르고 맙니다. 아이도 고통으로 울부짖고, 그 어머니는 더더욱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으로 울부짖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그 울부짖음을 들으십니다.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하갈아, 어찌 된 일이냐?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이가 저기에 누어서 우는 저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아이를 안아 일으켜, 달래어라.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21:17-18).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눈을 밝혀 샘물을 찾게 했다고 전합니다. 내쫓겨 절망의 상황에 빠진 모자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목마름을 해결해 줄 생수를 주셨으며 큰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삭의 이야기와 이스마엘의 이야기를 함께 보면 다소 미묘합니다. 두 이야기는 엇갈리는 두 가지 중요한 동기를 동시에 보여 줍니다. 선민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쫓겨난 이들의 신음소리를 듣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와 같은 이해는 쫓겨난 이들이 곧 선민으로 동일시될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 선민이 누군가를 배제하는 상황에 부딪히면 난처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삭의 하나님을 생각하면, 이스마엘의 하나님을 전하는 오늘 본문 말씀은 그 난처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천만다행인 것은 성서본문이 그 난처한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삭이 선민의 씨앗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그 때문에 배제된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서 영영 배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선민의식이 고통받는 이들의 신음을 외면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과 동일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쫓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본문을 어찌 해석할까요? 배타적 선민의식 때문에 장벽 너머 고통받는 이들의 신음을 외면하는 현실은 세계 도처에서, 우리 삶의 현장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미국 주류 사회의 장벽을 일찌감치 예감한 조승희씨는 남모르게 몸부림치다 파멸의 길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 일어난 여수이주노동자보호소의 화재 참극은 우리 사회의 배타성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또 그 배타의 장벽을 쌓고 있을까요?

요즘 우리가 교회 규약을 준비하면서 교우간 호칭의 문제로 계속 논란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좋은 ‘성도’(聖徒)라는 말을 선뜻 쓰기 주저할까요? 그것이 혹시라도 우리 스스로를 구별해내는 배타의 장벽을 정당화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주체를 일컫는 말이 아니라 ‘속된 무리들’과 구별짓는 표징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남용되고 있는 현실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호의 장벽 안에 안온하게 머무는 사람들에 앞서 그 장벽 너머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먼저 들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아니,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장벽을 쌓기에 급급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장벽을 무너뜨리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진정으로 거듭난 존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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