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삶 안에서의 기도 - 누가복음 10:38~42 [노종숙 목사]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09-01-18 15:26
조회
11805

2008년 1월 18(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일상 삶 안에서의 기도
본문: 누가복음 10:38~42
노종숙 목사(협동목사 /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는 1980년 전남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 있는 결핵요양원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 회원 7명이 결핵요양원 내에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면서, 공동체 규약을 만들고 기도 시간, 성서와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공부시간 그리고 농사 노동 시간도 정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하게 다가온 것은 요양원 환자들을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생명을 다투는 일이기에 위급한 일이 생기면 공동체의 기본 생활(기도, 학습, 노동)은 뒤로 하고 그들에게 달려가야 했습니다.
또한 저희는 요양원을 운영하는 일 외에도, 가까운 농촌 지역에 가서 보건진료소를 운영하며 농촌 지역 개발 빛 보건 사업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10여년간 의료 활동은 물론, 공부방, 목욕탕, 신협을 만드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 후 목포 빈민 지역으로로 나와 영세 가정을 대상으로 생활비, 의료비, 자녀들을 위한 학자금 지원 등의 재가복지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결핵 요양원은, 목포 근교에 국립결핵병원이 생겨서 10여년 만에 그만 두고, 그 후 만성결핵환자의 집을 18년간 운영하였습니다. 그리고 목포 시내에서는 4-5년 동안 2개의 노인복지 회관을 운영하였고, 그 일을 바탕으로 작년 7월에는 50인 노인요양 시설을 완공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매회의 활동을 말씀드리는 것은,
평균 10-15명의 회원으로 이런 많은 활동을 감당해 나가면서, 회원들의 몸은 힘들어지고, 생활은 바빠지고 그리고 기도는 형식적이 되어 힘을 얻지 못하는 모습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루 3 번 기도, 월 1일 침묵 기도, 연 10일 침묵피정이 의무로 정해져 있지만, 기도의 힘을 받지 못한 채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 안에서 회원들 안에 서로 갈등이 생기고, 일하는 것으로 피하고, 또 일을 하면 할수록 자신 안에 공치사가 쌓여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시혜자와 수혜자의 불편한 관계, 도움 받는 이들의 변하지 않는 상태, 그리고 그들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면서 좌절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자매회는 이곳 아우내로 1998년 11월에 본원과 수련원이 이사를 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저희들은 현장에서 할 수 없었던 기도생활에 전념하고, 목포 현장에서 충전이 필요한 회원들 그리고 피정집인 영성과 평화의 집을 운영하면서 기도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니, 기도하는 것도 또 다른 일이요, 활동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 우리의 일상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눅 10:38-42 의 말씀을 떠 올립니다.
마르다가 많은 활동을 하지만, 그녀의 염려하며 불평하는 모습을 통해 저희들을 보았습니다. 어려움 속에 있는 이웃을 돌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어떻게 기도의 시간을 낼까? 또 이웃이 당장 생명의 위급을 다투는데, 어떻게 기도실에 시간 맞춰 앉아 있어야 하나 이것이 마르다의 불평입니다. 여기서 마르다는 기도 없이 활동을 하고, 마리아는 활동 없이 기도만 한다는 식으로 마르다는 활동, 마리아는 기도 이렇게 둘로 나눌 수 있을까요?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주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고 하였고, “필요한 것은 하나뿐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뿐이다. 활동과 기도의 하나됨.
저는 여기서 마리아에게서 활동 중에 기도, 기도 중에 활동 그래서 오늘의 주제인 일상 삶 안에서의 기도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어디에서, 언제입니까? 그 때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났지. 느꼈지! 산 위에서! 기도방에서? 어떤 집회에서? 그럴까요?
하나님, 온 우주에 가득 찬 하나님의 영을 알아차리는 것, 내가 늘 너희와 함께 있겠다 하셨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느끼며 살 수 있을까?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합니다. 정말 대화를 하나요? 독백하는 것 아닌가? 대화는 상대방이 있다는 것이 체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곧, 기도는 하나님 체험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생각해봅시다. 물러나서 한적한 곳에서 새벽녘에 기도하고 계시는 모습, 겟세마네에서, 산에서 기도하시다가... 그리고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께 바로 말을 거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5천명 먹이실 때, 귀머거리 고치실 때,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시며, 아버지 하면서. 대화하는 모습입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직통하는 모습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며, 어떻게 하나님과 대화하는가? 하나님을 체험하는가?
성경에“언제 도둑이 들지 모르니 늘 깨어 있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살전 5:18)도 있습니다. 깨어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할 때, 그저 24시간 깨어 기도실 앞에서 24시간 죽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니고, 늘 맑게 깨어 있으면서 내 주위에서 어떤 상황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고요한 마음으로 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기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삶이라는 것을 딱 구획을 지어 구분을 해놓고 거기에 따라. 이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 이 시간은 일하는 시간, 이 시간은 노는 시간 이런 식으로는 아닐 것입니다.
깨어있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늘 생각하고 살까요? 다음의 예를 들어봅니다.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에 갈 때에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혹시 여러분 중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며 화장실에 가는 경우가 있습니까? ‘이제 일어나야 한다. 밤 사이에 내 방광은 소변으로 가득 찼다. 지금 소변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일어나서 손잡이를 돌려 방문을 열고 나가자. 그리고 아홉 걸음 정도 가서 화장실의 불을 켜자. 그리고 변기 뚜껑을 열고 앉는 거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화장실에 가는 사람을 거의 없을 것입니다. 단지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화장실에 가서 전깃불을 켜고 그리고 별 생각없이 변기 뚜껑을 열고 그곳에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침에 화장실에 갈 때 발생하는 모든 일입니다. 도대체 이 어느 부분에 우리의 생각이 개입되어 있을까요? 그러다가 생각이란 것을 한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생합니다. 예를 들면, 방문 손잡이를 아무 생각없이 돌렸는데, 문이 열리지 않는 경우, 어! 왜 문이 안 열리지? 고장이 났나? 불이 켜지지 않는 경우, 화장실 물이 내려지지 않는 경우 등등...
그래서 이제 우리는 생각은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 event과 만날 때에만 발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이란 책에서 인간은 과연 언제 사유하게 되는가? 낯섦이 찾아오는 바로 그 순간이 우리의 생각이 깨어나 활동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낯선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강제한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낯선 것이 우리를 깨어있도록 한다면, 익숙한 것은 잠자는 상태입니다. 그것은 습관적으로 행해지는 것들이고. 별 생각없이 살아지는 것들. 무의식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프로그램화된 상태로 말입니다. 과거 경험의 노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합니다. 집착하고 기울어진 상태, 어쩌면 중독되어있는 상태로 서로에게 무의식적인 저항을 합니다. 에니어그램의 성향에서 6세 이전의 기억으로 성격을 찾는 것은 어릴 때 방어기재로 형성된 성격을 말합니다. 두려움을 회피하거나, 힘을 행사하거나, 갈등을 견디지 못하거나, 원리원칙대로 행하거나, 등등 평생 9가지 각기 각진 모습대로 삽니다. 유난히 더 부딪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100명중 60명은 까닭도 없이 싫다. 이유도 없이 기울어지는 것들. 내 생각, 습관대로이지요. 무질서한 상태입니다. 어떤 사람이 한 마디에 따라 기분이 좋아지고 나빠지는 것, 똑같은 말이라고 누가 하느냐에 따라 더 오르고 내리는 것 이런 것들이 내 기울어진 경향에 따라 반응하는 것이지요.
자매회의 수련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새로운 버릇을 들이는 것입니다. 복음을 살아가는 새로운 버릇을 들입니다. 우리 일상 삶은 위로, 통찰로 영위되는 것이 아니라 버릇입니다. 아주 작은 버릇이지요. 걸음걸이. 문 여닫는 것, 잠자리, 죽는 것 까지 그 버릇으로 맞이합니다. 삶의 변화를 위해서는 작은 버릇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 어느 날 개미가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옆에 지네가 지나가고 있었다. 개미는 일을 멈추고 지네가 움직이는 모습에 경탄하였다.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개미가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다리들이 서로 꼬이지 않고 움직이며 걸어갈 수 있죠?” 지네는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더니 다리가 서로 꼬여서 다시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본다, 의식한다는 것은 깨어있음입니다. 늘 맑게 깨어서 내 주위에 어떤 상황들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는 것-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기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프랑스의 수사 로렌스라는 사람이 쓴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라는 책을 보면, 그는 주방에서 주로 일하면서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의식하고. 대화하며. 살았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함. 관상contemplation = com + Temple'은 성전 곧 하나님의 집에 함께 거한다는 뜻입니다. 관상은 침묵이나 물러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 발 곁에 앉은 마리아, 그것은 관상의 상태입니다. 관상의 상태는 우리의 삶 가운에 가장 활기있고, 깨어 있으며, 온전히 머무르며, 그 순간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참여하고 있다고 느꼈던 때와 동일한 순간들 - 평범한 우리의 삶 속에 있다. 노을이 지는 석양, 떠오르는 해, 활짝 핀 벚꽃, 사랑에 빠졌을 때, 붙타는 화로 앞에 있을 때, 공항에서 소란스러움 속에서 온갖 소리를 듣고 있는 자신을 느끼는 것 등, 기도, 관상, 깨어있음, 하나님 임재 안에서, 시간으로부터 현재로 의식의 전환이 일어날 것이다. 현재,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것.
화를 내는 데에 3가지 상태가 있습니다. 화를 내면서도 화내는 것을 모르는 것/ 화를 내면서 화 내는 것을 아는 상태/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지를 아는 상태 - 예수님의 화. 이 중 화를 내면서 화 내는 것을 아는 것은 휘둘리지 않는 현존의 상태이다. 기쁨, 슬픔, 분노, 행복 등등. 그때 그 때 알아차림, 깨어있음은 지금, 현재에 머무르도록 돕습니다. 감정, 생각, 몸의 감각들(호흡)
자매회에서 20여년 여럿이 함께 사는 생활 속에서, 현재에 머물지 못할 때에 오는 갈등을 많이 겪었습니다. 밭에서 김을 매면서, 저 자매는 왜 늦게 나오는 거지? 왜 저런 방법으로 하는 거지? 청소할 때도, 기도실에 앉았을 때에도, 그 때 그 때 마음을 모으지 못하고, 온갖 생각 속에 하고 있는 자신을 봅니다, 일이 힘든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인해 힘들어 하고 소진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자매회에 들어 와서 1년 후, 시장 당번을 처음 맡았을 때, 1주일간 15명이 먹을 것들을 사야 하는데, 익숙하지 않으니, 앉으나 서나 그 생각. 어느 날 기도실에 앉았는데, 내 생각은 온통 시장에 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기도할 때는 기도만, 밥 먹을 때는 밥 먹는 것만, 몸이 하는 그 때 그 순간에 마음을 모으니 단순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김매는 것, 청소하는 것, 설거지 등 그 때 그 일에 마음을 모으며/ 인식하며 하니, 고요해지고 평안한 것을 느낍니다.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고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라는 말씀을 다시 새깁니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무의식적으로 많은 생각/습관 속에 있습니다. 생각 중독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것, 그것이 일상 삶 속에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
내가 지금 여기에 예수님과 100% 함께 계심을 느낌은 존재 자체가 기도이다.
예수님은 절대로 ‘아빠’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의식적으로 떨어져 계신 적이 없다는 깨달음을 줍니다. 예수님은 혼자 기도하는 시간을 분명히 가지셨지만 하루의 나머지 시간 동안에 예수님이 혼자 알아서 지내셨음을 암시하는 것을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계속적인 교제, 심지어 그분과 합일의 상태였으며, 하나 됨의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절망 가운데서 하신 유명한 말,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에서조차 예수님은 항상 자신이 하나님께 드린바 되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임재 의식 안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내게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함께 하신 일이다라는 고백) 하나님께서 계시면 어떻게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어!라고 말하곤 합니다만, 하나님, 그 때 어디에 계셨나요? 반드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 시련, 시험, 고통, 갈등의 시간에 하나님 임재를 느끼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통은 우리를 깨우는 사건, 사람들로 인해 우리의 생명은 더 힘차게 살아날 수 있습니다.
일상 삶 안에서 기도는 활동 중에 기도, 기도중에 활동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상 삶 안에서의 기도는 곧 깨어 있음, 지금 이 순간, 현재에 마음 모음이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있는 것은 생각 속에서 과거나 미래로 가는 것. 걱정하거나 두려움 없이, 현재에 고요히 머물고 평온한 것. 고통, 두려움을 회피하지 않는 것,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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