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녀 탄생의 뜻 - 누가복음 1:26~38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9-12-20 15:27
조회
9243
2009년 12월 20일(일) 오전 11:00 천안 살림교회
제목: 동정녀 탄생의 뜻
본문: 누가복음 1:26~38
처음부터 예정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림절 말씀을 준비하면서 사실상 시리즈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예수께서 어째서 동정녀의 몸을 통해 태어나셨을까, 그 의미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소위 수태고지, 곧 아기 예수의 임신을 알리는 내용입니다. 성탄절이면 등장하는 성극의 첫 막을 장식하는 천사 가브리엘과 마리아가 만나는 장면이지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 마리아가 아이를 갖게 될 것이며 그 아이가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라는 것을 전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남자와 약혼을 하였지만, 아직 결혼 전인 처녀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납니다. 천사가 말합니다. “보아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마리아가 말합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성서 히브리어에서 ‘알다’라는 말은 단순히 지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따라서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남자와 성 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 있느냐는 반문입니다. 이 반문에 천사가 답합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가장 높으신 분의 능력이 너를 감싸 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인간 아버지가 없이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기를 낳는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소위 동정녀 탄생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가 아기를 낳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교회 역사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사건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이 사실을 문자 그대로 믿어야 진정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처럼 교회는 가르쳐 왔습니다. 그래서 거꾸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가장 두드러진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문제이기도 합니다. 뭐 그뿐이겠습니까마는, 핑계를 찾자면 그렇다는 이야기이지요.
흔히 교회에서는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온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비단 현대에 이르러서만 문제가 된 것은 아닙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예수 탄생의 비밀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예수는 소위 사생아라는 견해입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생아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로마제국하의 팔레스타인에서 수없이 많은 여인들이 겁탈을 당했던 비극적 현실을 생각하면, 예수의 탄생도 그런 비극적 탄생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아주 그럴 듯하게 추정하는 견해입니다. 그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예 로마병사 ‘판테라’라고 단정짓는 견해까지도 있습니다. 그럴 듯해 보이는 견해이기는 하지만, 그다지 신경 쓸 만한 견해는 아닙니다. 증명할 수 없는 이야기인 것은 그 견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호사가들의 요상한 취미에서 비롯된 견해라고 보면 좋습니다.
동정녀 탄생의 결정적인 의미는 그런 논란으로 밝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이야기나 현실적으로 있을 법한 상황을 추정하는 이야기 모두 이 사건이 갖는 의미의 정곡을 찌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똑 같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 곧 동정녀에게서 아기가 태어났다는 이야기의 진실은, 그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성서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멀리 다른 사례를 찾을 것도 없습니다. 고대 우리나라 시조들 가운데 혈육상의 아버지가 분명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혈육상의 아버지의 부재를 말하는 이야기의 공통점은 그렇게 태어난 아기가 하늘의 아들,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하는 데 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형식 자체로 볼 것 같으면, 그 이야기는 사실 특별할 것이 없는, 고대 세계에서는 너무나도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동정녀 탄생을 전하는 오늘 본문의 핵심적인 진실은 거기에 있습니다. 태어날 아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하는 데 오늘 말씀의 진실이 있습니다. 인간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세계와는 구별되는 존재의 탄생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인간 세계와 철저하게 구별된 존재의 탄생이라면 아예 인간적 방식을 털끝만큼도 취하지 않았더라면 더 그럴 듯했을 텐데, 어째서 굳이 어머니로서 여자를 필요로 했을까요? 불가능한 것이 없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그냥 쑥 내려주셨으면 훨씬 극적이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사람들이 믿기에도 훨씬 쉬었을 텐데, 굳이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까닭이 무엇일까요? 여자도 이 세계에 속하는 존재인데, 어째서 어정쩡하게 지상의 남자 아버지는 필요로 하지 않았으면서 지상의 여자 어머니는 필요로 했을까요?
바로 여기에 이 이야기의 또 하나의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남자 아버지는 이 세계의 현존하는 질서를 대표하며 기성의 권위를 대표합니다. 남자는 이 세계에서 모든 것을 누립니다. 반면에 여자 어머니는 이 세계의 현존하는 질서 안에서 가리어진 존재를 대표하며 기성의 권위와 무관한 존재를 대표합니다. 여자는 이 세계를 대변할 만한 어떤 조건에 있지 않습니다. 남자는 홀로라도 그 존재를 인정받지만 여자 홀로는 완전한 존재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남자라는 존재, 여자라는 존재 자체가 그렇게 다르다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남자가 그렇고 여자가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세계와 구별된 존재의 탄생은, 현존하는 세계를 대변하는 아버지를 배제하여야만 합니다. 육신의 아버지의 부재 가운데 예수께서 탄생했다는 것은 이미 주어진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육신의 어머니를 필요로 한 그 탄생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세계 안에서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던 존재들에게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굳이 육신의 어머니가 필요한 것은 그 새로운 세계의 현실성 또는 구체성을 말합니다. 곧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질 구원의 현실성, 구체성을 말합니다.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세계를 떠난 구원의 희망이 아니라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세계 안에서의 구원의 희망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동정녀 탄생의 비밀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것은 천지개벽의 사건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이 천지개벽의 사건을 의미한다는 것은 곧바로 이어지는 마리아의 노래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내 구주 하나님을 높임은 주께서 이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 주께서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습니다.”
마리아의 이 노래와 천사 가브리엘의 수태 고지 사이의 가교를 잇는 성서 말씀을 보면 또한 흥미롭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 사연이 나와 있습니다만,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 또한 임신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임신을 하였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의 잉태였습니다.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수태 고지를 받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 문안하였습니다. 그 때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고, 그대의 태 속에 있는 열매도 복을 받았습니다. 내 주의 어머니께서 내게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그대의 문안하는 말이 내 귀에 들어 왔을 때에, 내 태 속에 있는 아기가 기뻐서 뛰놀았습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은 여자는 행복합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 아닙니까? 생명을 잉태한 여자들만이 나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 속을 남자들이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엄마들끼리 인사를 나누며 기뻐했을 뿐 아니라 태중의 아기들까지 공명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태중의 아이의 그 몸짓을 생명을 잉태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주어진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꿈꾸지 않는 사람은 그 꿈의 벅찬 감동을 알 수 없습니다. 두 여인들의 이야기는 새로운 희망을 잉태한 사람들만의 벅찬 감동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기 예수는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뜻합니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세계와는 다르지만 다른 먼 곳이 아니라 바로 이 땅 위에 이뤄지는 세계입니다.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믿는 것은, 그 세계에 대한 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꿈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봅니다. 그래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때마다 기쁘고, 서로 공유하고 있는 그 꿈 때문에 벅찬 감동을 함께 나눕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예비하는 우리들이 그 벅찬 감동을 함께 나누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 꿈꾸지 않으면(간디학교 교가) ***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별 헤는 맘으로 없는 길 가려 하네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 길 가려 하네
아름다운 꿈꾸며 사랑하는 우리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가는 우리들
누구도 꿈꾸지 못한 우리들의 세상 만들어 가네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우리는 알고 있네 배운다는 건,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제목: 동정녀 탄생의 뜻
본문: 누가복음 1:26~38
처음부터 예정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림절 말씀을 준비하면서 사실상 시리즈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예수께서 어째서 동정녀의 몸을 통해 태어나셨을까, 그 의미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소위 수태고지, 곧 아기 예수의 임신을 알리는 내용입니다. 성탄절이면 등장하는 성극의 첫 막을 장식하는 천사 가브리엘과 마리아가 만나는 장면이지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 마리아가 아이를 갖게 될 것이며 그 아이가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라는 것을 전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남자와 약혼을 하였지만, 아직 결혼 전인 처녀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납니다. 천사가 말합니다. “보아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마리아가 말합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성서 히브리어에서 ‘알다’라는 말은 단순히 지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따라서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남자와 성 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 있느냐는 반문입니다. 이 반문에 천사가 답합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가장 높으신 분의 능력이 너를 감싸 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인간 아버지가 없이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기를 낳는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소위 동정녀 탄생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가 아기를 낳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교회 역사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사건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이 사실을 문자 그대로 믿어야 진정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처럼 교회는 가르쳐 왔습니다. 그래서 거꾸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가장 두드러진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문제이기도 합니다. 뭐 그뿐이겠습니까마는, 핑계를 찾자면 그렇다는 이야기이지요.
흔히 교회에서는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온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비단 현대에 이르러서만 문제가 된 것은 아닙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예수 탄생의 비밀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예수는 소위 사생아라는 견해입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생아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로마제국하의 팔레스타인에서 수없이 많은 여인들이 겁탈을 당했던 비극적 현실을 생각하면, 예수의 탄생도 그런 비극적 탄생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아주 그럴 듯하게 추정하는 견해입니다. 그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예 로마병사 ‘판테라’라고 단정짓는 견해까지도 있습니다. 그럴 듯해 보이는 견해이기는 하지만, 그다지 신경 쓸 만한 견해는 아닙니다. 증명할 수 없는 이야기인 것은 그 견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호사가들의 요상한 취미에서 비롯된 견해라고 보면 좋습니다.
동정녀 탄생의 결정적인 의미는 그런 논란으로 밝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이야기나 현실적으로 있을 법한 상황을 추정하는 이야기 모두 이 사건이 갖는 의미의 정곡을 찌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똑 같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 곧 동정녀에게서 아기가 태어났다는 이야기의 진실은, 그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성서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멀리 다른 사례를 찾을 것도 없습니다. 고대 우리나라 시조들 가운데 혈육상의 아버지가 분명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혈육상의 아버지의 부재를 말하는 이야기의 공통점은 그렇게 태어난 아기가 하늘의 아들,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하는 데 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형식 자체로 볼 것 같으면, 그 이야기는 사실 특별할 것이 없는, 고대 세계에서는 너무나도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동정녀 탄생을 전하는 오늘 본문의 핵심적인 진실은 거기에 있습니다. 태어날 아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하는 데 오늘 말씀의 진실이 있습니다. 인간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세계와는 구별되는 존재의 탄생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인간 세계와 철저하게 구별된 존재의 탄생이라면 아예 인간적 방식을 털끝만큼도 취하지 않았더라면 더 그럴 듯했을 텐데, 어째서 굳이 어머니로서 여자를 필요로 했을까요? 불가능한 것이 없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그냥 쑥 내려주셨으면 훨씬 극적이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사람들이 믿기에도 훨씬 쉬었을 텐데, 굳이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까닭이 무엇일까요? 여자도 이 세계에 속하는 존재인데, 어째서 어정쩡하게 지상의 남자 아버지는 필요로 하지 않았으면서 지상의 여자 어머니는 필요로 했을까요?
바로 여기에 이 이야기의 또 하나의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남자 아버지는 이 세계의 현존하는 질서를 대표하며 기성의 권위를 대표합니다. 남자는 이 세계에서 모든 것을 누립니다. 반면에 여자 어머니는 이 세계의 현존하는 질서 안에서 가리어진 존재를 대표하며 기성의 권위와 무관한 존재를 대표합니다. 여자는 이 세계를 대변할 만한 어떤 조건에 있지 않습니다. 남자는 홀로라도 그 존재를 인정받지만 여자 홀로는 완전한 존재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남자라는 존재, 여자라는 존재 자체가 그렇게 다르다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남자가 그렇고 여자가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세계와 구별된 존재의 탄생은, 현존하는 세계를 대변하는 아버지를 배제하여야만 합니다. 육신의 아버지의 부재 가운데 예수께서 탄생했다는 것은 이미 주어진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육신의 어머니를 필요로 한 그 탄생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세계 안에서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던 존재들에게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굳이 육신의 어머니가 필요한 것은 그 새로운 세계의 현실성 또는 구체성을 말합니다. 곧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질 구원의 현실성, 구체성을 말합니다.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세계를 떠난 구원의 희망이 아니라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세계 안에서의 구원의 희망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동정녀 탄생의 비밀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것은 천지개벽의 사건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이 천지개벽의 사건을 의미한다는 것은 곧바로 이어지는 마리아의 노래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내 구주 하나님을 높임은 주께서 이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 주께서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습니다.”
마리아의 이 노래와 천사 가브리엘의 수태 고지 사이의 가교를 잇는 성서 말씀을 보면 또한 흥미롭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 사연이 나와 있습니다만,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 또한 임신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임신을 하였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의 잉태였습니다.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수태 고지를 받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 문안하였습니다. 그 때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고, 그대의 태 속에 있는 열매도 복을 받았습니다. 내 주의 어머니께서 내게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그대의 문안하는 말이 내 귀에 들어 왔을 때에, 내 태 속에 있는 아기가 기뻐서 뛰놀았습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은 여자는 행복합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 아닙니까? 생명을 잉태한 여자들만이 나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 속을 남자들이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엄마들끼리 인사를 나누며 기뻐했을 뿐 아니라 태중의 아기들까지 공명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태중의 아이의 그 몸짓을 생명을 잉태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주어진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꿈꾸지 않는 사람은 그 꿈의 벅찬 감동을 알 수 없습니다. 두 여인들의 이야기는 새로운 희망을 잉태한 사람들만의 벅찬 감동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기 예수는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뜻합니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세계와는 다르지만 다른 먼 곳이 아니라 바로 이 땅 위에 이뤄지는 세계입니다.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믿는 것은, 그 세계에 대한 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꿈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봅니다. 그래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때마다 기쁘고, 서로 공유하고 있는 그 꿈 때문에 벅찬 감동을 함께 나눕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예비하는 우리들이 그 벅찬 감동을 함께 나누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 꿈꾸지 않으면(간디학교 교가) ***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별 헤는 맘으로 없는 길 가려 하네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 길 가려 하네
아름다운 꿈꾸며 사랑하는 우리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가는 우리들
누구도 꿈꾸지 못한 우리들의 세상 만들어 가네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우리는 알고 있네 배운다는 건,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전체 0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