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보상을 기대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 - 누가복음 17:7~10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1-02-20 21:32
조회
8555
2011년 2월 2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보상을 기대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

본문: 누가복음 17:7~10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집약하는 말로 몇 가지를 떠올릴 수 있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와 관련하여 떠올린다면 아마 ‘섬김’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말도 역시 섬김일 것입니다. 저 역시 자주 사용하는 편이지만, 몇 년 전부터는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큰 집에 사는 이 아무개 장로가 그 말을 공공연하게 사용하면서부터입니다. 전혀 섬김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이 국민을 섬긴다느니 하는 것을 보면서, 그 말이 그렇게 오용되고 있다면 당분간 사용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래 의미에서 벗어나 오용되고 있는 말들이 이 뿐이겠습니까? 수 없이 많습니다. 특별히 아무리 좋은 말도 권력집단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하면 오염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오용되는 의미와 달리 본래적 의미로 사용한다고 해도 오용된 말과 똑같이 오인될 것 같은 상황에서는 그 말을 피하는 것이 하나의 대안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본래의 의미, 아니 가장 적절한 의미를 회복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에서 실질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대하면서, 아마 이 이야기 또한 많이 오용되고 있는 본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해는 성서일과를 따라 본문말씀을 함께 나누기에, 제가 임의로 선택하지 않고 이미 정해져 있는 본문말씀의 의미를 나눌 수밖에 없는데, 저는 처음 이 본문말씀을 대하면서 당황했습니다.

과연 이 말씀에 담긴 메시지가 무엇일까 한참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우선 불편했습니다. 당연히 현대 우리들의 관점에서였습니다. 오늘의 인권의 차원에서 보면 주인이 종을 대하는 태도가 거슬리지 않습니까? 그게 거슬리지 않는다면 건전한 상식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음으로 드는 생각은 그렇게 거슬려 보이는 내용이 오늘 교회에서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권위주의를 정당화하는 이야기로, 맹목적인 순종을 강요하는 이야기로, 이 이야기가 아무렇지 않게 통용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을 생각하자니 처음에는 다소 난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본문의 내용을 다시 환기하겠습니다. 우선 이 이야기는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가르침을 주고 있는 일련의 본문 가운데 한 대목입니다. 바로 앞 5절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이야기를 듣는 청중은 사도들, 곧 제자들입니다. “사도들이 주께 말하기를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니, ...” 여기에 예수께서 응답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너희들 가운데 종이 있다고 하자’, 이렇게 가정으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하나의 비유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는, 그 종이 일을 마치고 들어오면 어서 식탁에 앉으라고 권하겠느냐 반문합니다. 주인은 밥부터 차리라고 말하고, 그 다음에 자신이 다 먹고 난 다음에 종에게 밥을 먹으라고 하는 것이 상식이 아니냐고 확인합니다. 그리고 다시 물음을 던집니다. 종이 주인의 명령을 따랐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겠느냐고 말이지요. 당시 관습에 비춰 볼 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전제하고, 그 사실에 비춰볼 때 당연한 결론으로 교훈을 말합니다.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자 이 말씀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요? 현대적 관점, 아니 예수님 당대에 비춰보더라도 섬김의 살을 사셨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먼저 돌보신 예수님의 행적에 비춰 볼 때 주인이 종을 대하는 태도를 당연시하는 태도가 걸린다고 앞에서 말했습니다. 이런 경우 성서 주석가들은 예수께서 원래 말씀하신 맥락을 떠나 후대에 편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부터 합니다. 실제로 많은 경우 성서의 본문이 편집된 맥락을 헤아리지 않으면 그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본문의 경우는 어떨까요? 물론 성서가 최종적으로 편집된 시점의 관점이 반영되었다는 것은 이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비유로 직접 사용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주석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눈에 거슬러 보이는 내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선 이 이야기가 하나의 비유라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우리가 수요 성서연구 시간에 비유를 공부한 적이 있지만, 비유는 그 내용에서 언급되는 현상을 정당화하는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으로 전제하고 딱 한 가지 핵심적인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는 데 비유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에서 들고 있는 주인과 종으로 나누어진 노예제도를 옹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천하의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제도가 지닌 비인간적인 성격을 생각하지 않고 그런 비유를 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물론 오늘의 관점에서 그런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비유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현실 자체를 정당화하려는 데 비유의 목적이 있지 않고, 당시 통념에 비춰볼 때 당연한 전제로서 제시하고 그것을 통해 뭔가 핵심적인 교훈을 제시하려는 데 비유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역사적인 삶을 살았던 예수의 삶의 맥락을 드러내 주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오늘 같으면 그런 비유를 들지 않았겠지만, 고대 당시의 통념을 빌어올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존재로서 예수의 삶을 드러내주는 한 측면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이해하고, 이제 진짜로 이 비유의 핵심이 무엇인지 접근하겠습니다. 비유를 이해하는 데서 우선 중요한 점은 그 청중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라도 청중이 누구냐에 따라 이야기의 의도는 전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것으로는 그 청중이 사도들, 곧 예수님의 제자들이라 했습니다. 주석가들은 바로 이 점에서 후대의 편집적인 의도가 개입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겨냥하는 본래의 대상은 유다인들, 그 가운데서 바리새인들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바리새인들을 공격한 이야기가 후대에 제자들에게, 그리고 나아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주는 교훈으로 재구성된 것입니다. 그 대상의 변화는 그다지 큰 의미의 변화나 왜곡을 동반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유력한 지도층들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다지 큰 차이는 없는 셈입니다.

이들의 태도에 무엇이 문제였다는 이야기일까요? 먼저 결론적으로 이 비유의 핵심을 말하면,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기보다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보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왜 이런 교훈이 절실했을까요? 특히 바리새인들을 겨냥해서 왜 이런 비판을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요? 바리새인들은 선행을 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는 일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일을 하고 나면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기대심리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참 가혹하다 싶기도 합니다. 평범한 우리들도 다 갖는 기대 아닙니까?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의 결정적인 이유가 그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걸 비판해야 했을까요? 여기에 예수의 윤리의 철저성이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갖는 일반적인 기대로서 보상심리 그 자체를 아예 싹부터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역시 주인과 종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 있는 누가복음 12장 35절이하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마치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와서 문을 두드릴 때에, 곧 열어 주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되어라. 주인이 와서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되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이 허리를 동이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이 말씀은 보상을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야속하시지는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말씀에서 그렇게 철저한 비판을 하고 계신 뜻이 무엇일까요? 보상에 대한 기대가 선행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 마땅히 옳은 일이면, 그 일을 하는 것 자체로 족한 줄 알고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지, 그 결과로 다가올 이해타산을 따져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내가 하나님을 알고 그 뜻을 알아 따르는 사실에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지, 그러니까 나에게 이만큼 해 주십시오 하는 기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강조하시는 이런 삶의 태도, 철저한 삶의 윤리는 단지 개인의 삶의 태도, 개인의 윤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맺는 중요한 원칙이기도 합니다. 그 삶의 태도는 업적주의와 성과주의를 배격합니다. 오늘의 시대만큼 업적주의와 성과주의가 지배적인 된 적은 없습니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차라리 숙명론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출생순간부터 신분이 결정되는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는 일종의 숙명론입니다. 오늘 자본주의 사회, 특히 근래의 시장만능주의적 신자유주의의 사회 원리는 철저하게 업적주의이며 성과주의입니다. 선별적 복지냐 보편적 복지냐 하는 논쟁의 이면에도 업적주의 논리가 개재되어 있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삶의 원칙은 그 업적주의를 배격합니다. 오늘 더더욱 개탄스러운 현실은 교회 안에서도 업적주의와 성과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원칙은 그것을 배격합니다.


우리가 평상시 나누는 평범한 인사말 가운데 예수께서 던지신 말씀과 통하는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요?” 이게 정상적인 우리 인사법 아닙니까? “잘 부탁합니다” “저야말로” 이게 정상적인 인사법입니다. 마땅한 것을 마땅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사랑에 어떤 보상을 필요로 할까요? 사랑하는 그 기쁨이 바로 사랑의 궁극적 목적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그런 진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따라 정말 사람답게 사는 삶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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