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사랑, 그 진정한 의미 - 고린도전서 13:1~13[음성]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6-03-20 01:41
조회
8768
2016년 2월 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사랑, 그 진정한 의미
본문: 고린도전서 13:1~13

 

[audio mp3="http://salrim.net/wp-content/uploads/2015/08/preaching20160207.mp3"][/audio]

 

독일의 신학자 도로테아 죌레의 『사랑과 노동』이라는 책을 보면, 흥미로운 독일 영화 한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헤롤드와 마우데>라는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인격적인 교감과 진정한 의사소통이 없는 껍데기뿐인 사랑, 곧 사랑 아닌 사랑과 진실한 사랑을 대비하는 코믹한 영화입니다.
젊은 주인공 헤롤드는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여주고 또 자신이 신뢰할 만한 사람을 열렬하게 찾습니다. 그러나 백만장자인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그가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현실은 그런 갈망과는 전혀 상반됩니다. 기괴한 사치, 물질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 끊이지 않는 자기자랑, 서로 아무 할 말도 없고 사실은 증오하는 사람들과의 사교, 이런 것들이 진실한 인간관계를 대신합니다. 그의 어머니와 그의 어머니의 친구인 어떤 장군과 목사는 그에게 끊임없이 젊고 매력적인 여자를 소개해주며 그의 기분을 돋구어줄 뿐 아니라 그를 남자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 때마다 헤롤드는 항상 자기 자신으로 숨어들어 버리고, 어른들의 그런 기대와 그릇된 욕구로부터 공포를 느끼며 도망치고자 했습니다. 그는 사랑 아닌 것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어머니와 기성세대의 속물주의, 물신주의의 세계를 넘어서는 어떤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던 그가 드디어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어머니와 친구들에게는 말도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늙은 할머니와 사랑을 맺은 것입니다.
다분히 풍자적인 이 영화는 표준화되고 규격화된 상품의 거래관계로 전락해버린 인간관계, 그 안에서 이뤄지는 거래를 사랑으로 착각하는 현실에서 진실한 사랑의 의외성을 말합니다. 그 현실에서 사랑은 늙고 주름살 가득한 여인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그렇게 낯선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에서 사랑은 그렇게 쇠락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풍자하고 있는 듯합니다. 넘쳐나는 물질의 풍요로움 가운데서 옹색하게 자리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사실 그리 먼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의 텔레비전 드라마나 현실에서도 그 형태는 다르지만 흔히 볼 수 있는 경우입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흔한 말이 사랑이지만, 그 실체를 알 수 없어 가장 어려운 말이 사랑이기도 합니다. 말로는 옳거니 하면서도, 때로는 무엇이 진짜 사랑인지 알 수 없어 방황하고, 때로는 사랑 없는 현실에 절망하고 통탄해하는 것이 우리들의 실상입니다. 아예 사랑이라는 말 자체가 무색해지는 현실을 보고 아연실색하기도 합니다. 지난 주간 목사 아버지가 딸을 숨지게 해놓고 1년 가까이 집안에 방치했다는, 도무지 믿기지 않은 사건 보도를 보고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실이 그럼에도, 우리들 모두가 저 깊은 곳으로부터 갈망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주어질지 또는 과연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 사랑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또한 끊임없이 갈망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말씀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항상 기억하고 있고, 또 언제 들어도 귀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우리는 정말 이 말씀의 의미를 얼마나 실감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의미있게 만드는 그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전통적인 교리에 매인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인간들 사이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고 곧바로 단정하려 할 것입니다. ‘에로스’가 아닌 ‘아가페’라고 말하고 그 아가페는 에로스와는 전혀 다르다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아가페’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는 다른 여러 형태의 사랑과 구별되는 어떤 의미를 전하려 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모든 사랑의 형태와 단절된 사랑이 아니라 모든 사랑을 완성시키는 사랑으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적인 사랑과 아가페를 분리시키는 것은, 그저 일방적으로 베푸는 권세 있는 자의 이미지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베푸는 것이 미덕이라는 이야기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어떤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사랑의 상호성, 곧 남녀간 형제간 동료간의 애틋한 사랑을 배제하거나 무가치한 것으로 전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어떤 형태이든, 사랑은 인간에게 존재의 의미를 주는 결정적인 그 어떤 것입니다. 인간에게 존재 의미를 주는 것에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사랑이야말로 으뜸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의 결론을 말하기에 앞서,  인간에게 의미있는 일들을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지만, 고린도전후서는 말 많고 서로 자랑하기 좋아하는 고린도교회의 사정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전체적으로 그 구체적인 현실을 유념하며 음미할 때 그 분명한 의미가 드러납니다.
첫 번째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방언으로 말할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이것은 종교적 열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종교적 열정에 빠져 방언을 한다 할지라도, 온갖 현란한 악기를 동원하여 예배한다 할지라도 그 가운데 사랑이 없으면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도 바울은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내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언자적 통찰력과 사물의 이치를 따지는 모든 철학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의 차원을 말합니다. 예언하는 능력과 모든 비밀은 연결된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차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지식 또한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비밀과 지식이 병렬되었을 때 그 지식의 의미는 아마도 세상을 보는 인간의 안목, 현실을 보는 인간의 안목과 관련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믿음의 차원입니다. 이것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산을 옮길 만큼 놀라운 기적을 가능하게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모든 재산을 나누어줄 지라도, 자랑스러운 일을 하려고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내 모든 재산을 나누어 준다는 것은, 의로운 행동의 차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행위, 사회적 참여를 하는 행위를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사랑의 구체적 행위, 가시적 행위를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마저도 그 밑바탕에 진정한 사랑이 없다면 소용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근본적 사랑의 동기 없이 베푸는 행위가 일종의 자기과시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행위의 밑바탕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그 다음 구절로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일을 하려고 내 몸을 넘겨준다는 것, 그것은 종교적으로 가장 숭고하게 떠받들어지는 자기희생을 말합니다. 어쩌면 순교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몸을 넘기는 행위를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 그것마저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철학자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금욕주의마저 권력의 원천이 되는 현실을 꼬집었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앞서서 바울이 그 위험성을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반공주의에 매인 한국 주류 교회가 박해와 순교 담론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있는 현상을 보면, 이 말씀의 의미를 충분히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거부되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 신앙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는 모두 적극적으로 권장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야말로 제대로 된 신앙인이라 평가되는 근거가 되는 모든 것들입니다. 바울이 그것들이 단지 필요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 밑바탕에 사랑이 없다면 다 무용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선한 모든 것들을 진정으로 의미 있게 만드는 밑바탕, 그것은 오직 사랑이라고 선포합니다. 자신의 전존재를 드러내놓고 상대의 전존재를 받아들이는 사랑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언제나 불완전한 사랑이요, 언제나 어긋나는 고통스러운 사랑뿐인데 도대체 어떻게 그 진실을 믿으라는 이야기일까요? 사도 바울은 결코 그 안타까운 현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 안타까운 현실을 너무나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 속에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는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거울 속에서 영상을 희미하게 본다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유리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고대의 청동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을 말합니다. 청동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인식하던 것을 마침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처럼 뚜렷하게 인식하게 되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사랑을 말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여러 분파들이 서로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만을 진리로 내세우며 다투고 있던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던진 말씀이라는 사실을 새삼 기억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사랑으로서만 온전히 체험되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말하며, 진리에 대한 인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 온전한 진리에 대한 인식은 사랑으로써만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자기가 경험한 것, 그래서 자기에게 굳어진 의식과 삶의 방식을 절대적인 것으로 알지만, 사랑은 그것을 넘어서게 해 준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불완전하게 경험하는 사랑이 그렇게 완성될 것을 믿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생명의 신비를 연구하는 어떤 학자는 말합니다. ‘알면 사랑한다.’ 하찮은 미물마저도 그 자체로 존재 의미를 가지고 있고, 오묘한 생명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정반대의 의미 또한 함축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된다.’ 동시에 그러한 의미 또한 함축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모든 만남, 모든 관계의 신비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한 자리에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주 만남으로써 서로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서로를 사랑하게 됩니다. 동시에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 서로를 제대로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진정한 진리를 체험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체험하며 진리를 인식합니다.

다시 한 번 우리 스스로에게 자문하지만, 그 경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4~7에 이르기까지 사도 바울이 선포한 내용을 하나하나 음미하는 가운데 우리는 그 의미를 어렴풋이 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간도 많이 지났기에, 그 말씀들 하나하나를 음미하는 것은 또 다른 기회로 넘기겠습니다. 대신에 제가 젊은 시절 동료 전도사가 이 말씀의 의미를 체감할 수 있는 방법을 전해 받은 적이 있는데, 그 때는 낯간지럽게 느꼈지만, 오늘 그 방법을 전하고자 합니다. 4~7에 이르기까지의 말씀 가운데 ‘사랑’을 전부 ‘나’로 바꿔 읽는 방법입니다.
어떤지요? 그래도 우리는 아직 그 실상을 실감하지 모를지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마치 청동거울 들여다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듯 뚜렷하게 사랑을 체험하게 되리라는 믿음과 소망을 지켜나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가족간의 사랑을 나누는 설명절에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