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 요한복음 16:16~24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1-05-15 21:10
조회
8686
2011년 5월 1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본문: 요한복음 16:16~24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할까요? 오늘 본문말씀이 주는 긴장감을 어찌 공감할 수 있을까요? 무슨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 망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본문말씀입니다.

그런데 마침 계시라도 내리듯, 말씀을 준비하는 날 아침 긴장하게 만드는 문자메시지가 날아왔습니다. 지난 주간 그야말로 긴장된 시간을 보내야 했던 한 교우 가정이 있습니다. 아무리 법적인 요건을 갖췄다 하지만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들이닥쳐 가장을 연행해가고, 다시 집안을 수색하는 일이 벌어지다니!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일이 여전히 불온시되는 상황, 게다가 오래 전에 폐기되었어야 할 국가보안법이 버젓이 살아서 사람들의 정당한 권리를 옥죄는 족쇄로 내둘러지고 있는 상황이라니, 그 상황을 전하는 문자 메시지를 받는 순간 제 앞의 시계바늘은 1980년대 초반으로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때마침 오늘은 5.18 민주화운동 기념주일입니다. 그 의미를 그 사건을 통해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직 그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나마 약화될 대로 약화된 민주노총을 사실상 괴멸시키고자 하는 공작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한 일간지로부터 날아온 설문에 응한 적이 있습니다. 이른바 386세대들에게 30년 전 우리 사회에 대한 인식이 오늘의 시점에서는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파악하는 취지의 설문이었습니다. 여러 항목이 있었지만, 30년 전과 오늘을 비교할 때 확실히 더 나빠진 것으로 교육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노동문제, 30년전 그야말로 비인간적 상황에 비하면 좋아진 점도 많지만 과연 좋아졌다고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회의적입니다. 더 나빠진 측면이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한 10년 꾸준히 개선되던 사회 여러 분야의 문제들이 근래 몇 년 사이에 악화된 경우가 많습니다. 한동안 인권 개선의 모범국가로 평가되었던 상황은 다시 인권 후진국의 상황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런 현실을 확인하자면, 탄식이 나옵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열망이 뜨거웠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고통을 겪었는데, 고작 이 정도밖에 안되는가 싶어지면 정말 탄식이 나옵니다. 저는 오늘 성서본문이 반영하는 긴장감, 그리고 성서가 증언하는 종말론적 긴장감을 상당 부분 몸으로 체감합니다. 젊은 시절 민주주의를 위해 그렇게 목소리높여 외쳤을 때, 훗날 자식들의 세대에서는 군대 문제, 교육 문제... 그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사회적으로 평온한 가운데 맞이하는 노년의 일상의 평안함을 머리속으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식들 세대에 이르러 어떤 면에서는 더 가혹한 상황을 맞고 있다니, 허망한 마음도 듭니다.

‘젊은 시절 마르크스에 심취하지 않는다면 가슴이 없는 사람이오, 나이가 들어서도 마르크스에 심취해 있다면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 이런 속설도 있기는 합니다. 젊은 시절 세상을 뒤바꾸겠다는 열정이 없어서야 되겠느냐는 이야기이며, 나이 들어서도 그 열정을 지니고 있다면 철이 없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세상과 인간이 변화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이제 그만 접어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서 본문말씀은 그와는 다른 답을 주고 있습니다. 33절까지 마저 읽을 것 같으면, 말씀이 주는 의미가 더욱 분명해지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대로 24절까지도 그 의미는 충분합니다.

33절까지 계속된 이 말씀에는 매우 특징적인 대비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고 옴, 슬픔과 기쁨, 고난과 평화, 요청과 수락, 봄과 보지 못함, 비유와 공개적인 말, 불신앙과 신앙, 세상과 하느님이 계속 대비되는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대비는 이 말씀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성격을 분명히 해 줍니다. 그것은 단적으로 반전의 상황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다.” 이 말을 두고 제자들은 설왕설래합니다. 도대체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의아해하는 제자들의 태도를 알아차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근심에 싸여도 그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이 말씀과 함께 예수께서는 한 가지 비유로 그 뜻을 더욱 분명히 합니다. “여인이 해산할 때에는 근심한다.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 때문에,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예수께서는 그 비유의 의미를 다시 구체적으로 밝히십니다. “지금 너희는 슬픔에 싸여 있지만, 내가 다시 너희를 볼 때에는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요, 그 기쁨을 너희에게서 빼앗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날 너희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받으실 고난과 죽음을 전제합니다. 조금 있으면 고난을 겪고 마침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딛고 일어서 다시 사람들 가운데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죽임을 딛고 일어선 부활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의구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이어 예수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지금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의 의미를 깨우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러 주는 말씀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 구하여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이것은 너희에게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며, 그 희망이 이뤄지리라는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미처 읽지 못한 25절이하의 말씀에서는 비유 대신에 당신이 말씀하신 말씀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밝힙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 돌아갔다가 되돌아올 것을 말합니다. 아버지께 돌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예수의 죽음을 말합니다. 그 죽음의 순간은 예수를 따르는 이들에게 시련의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33절에서 예수께서는 선포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오늘 본문 말씀은 시련으로 절망하기보다는 장차 맛볼 기쁨을 바라보며 용기를 갖고 나아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집약하면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의 이 선언은 단호하고 확고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이 단호한 확신은 특별한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27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 날이 오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아버지께서는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특별한 증거입니다. 사람을 사랑하신 하나님을 요한복음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로고스가 싸르크스가 되었다, 곧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 이것이 그리스도교적 인권의 근거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목적으로 삼으셨습니다. 어떤 세상 권세에 의해서도 짓밟히고 휘둘릴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을 요한복음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문에 해당하는 17장 가운데 15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을 온전히 이루는 것으로 구체화됩니다. 요한공동체의 또 다른 성서인 요한1서 4장 7~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공동체의 전반적인 이 믿음에 근거해 볼 때, 오늘 본문말씀의 단호한 확신은, 우리가 그 사랑을 체감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인간, 서로 사랑을 나누는 인간의 삶, 그것이 그 누구에 의해 파괴되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말도 안 됩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이들, 곧 세상의 권력이 사람을 곤경에 빠트리고 그 목숨마저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외칠 때 세상의 권세는 힘을 잃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외치는 것을 들으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람들의 외침을 하늘이 들으셨다는 것은 성서에도 나오지만, 우리의 전통적인 관념 가운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을 아는 길은 어렵지 않습니다. 세상 권력, 맘몬의 권력, 몰록의 권력, 자본과 통치의 권력은 인간을 옥죔으로써 승리했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을 옥죄면 옥죌수록 스스로 무능력하다는 것을 드러낼 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통치가 폭력에 의한 통치입니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짓밟고, 소박한 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온한 삶을 앗아가는 권력은, 그 힘을 지니고 있는 순간 위력을 지니지만 누구로부터 환영받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한 셈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이들로서 그 사랑을 나누며 살겠다고 외칠 때 그 권세는 힘을 잃습니다. 세상의 권세가 ‘아, 그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를 통감하는 순간, 하늘의 응답이 내려지는 순간입니다. 그 응답을 들을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앞서 저는 그렇게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실망스러운 현실을 개탄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개탄스러운 현실뿐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비유로 말하지만 머지않아 밝히 드러내실 것이라 하였습니다. 밝히 드러나지 않았다면, 비유로 말하겠습니다. 제가 종종 환절기에 보약을 먹습니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 그저 온갖 식물 엑기스를 복용하는 셈인데, 어쩔 때는 확연하게 그 효과가 있는 듯싶은데, 어쩔 때는 그저그런 듯할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저그런 듯할 때인데, 과연 아무런 약효가 없었던 것일까요? 아닐 겁니다. 그나마 약효를 누렸기에 더 악화될 수도 있었던 몸이 그만큼이라도 버텼을 겁니다.

우리 사회의 경우도 그런 것 아닐까요?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외침과 헌신이 그나마 있었기에 더 극한의 상황에 빠지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은 절대 스스로 반성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늘을 향해 구하는 소리가 높이높이 울려퍼질 때 비로소 움찔하는 법입니다. 어디 내 집 안방을 공권력이 쳐들어옵니까? 이런 야만적인 사태를 법의 이름으로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선언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시련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그 말씀을 확신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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