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진리를 따르는 삶, 그 대열에 합류한다는 것 - 요한복음 8:31~36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2-12-30 14:06
조회
8874
2012년 12월 3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진리를 따르는 삶, 그 대열에 합류한다는 것

본문: 요한복음 8:31~36



2012년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항상 한 해의 마지막에 이르면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마련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지난 시간 겪었던 일들을 돌아보게 마련인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선 저 개인적으로 말하면 힘든 한 해를 보냈습니다. 때늦은 박사학위 논문을 쓴다고 한 4년 동안 진력을 쏟은 결과 연초에 마침내 학위를 받았으니 중압감에서 벗어나 가벼운 마음으로, 그리고 기대되는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주변의 여러 지인들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고, 특별히 은사로부터 ‘날개’를 달았으니 한국교회와 신학을 위해 더욱 매진하라는 격려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기왕에 걸어온 길 나름대로 성실하게 걸어 왔으니 그 점에서 후회될 바는 없습니다. 그런데 ‘날개’를 달았으니, 그걸 구실 삼아 시도했던 몇 가지 일들은 단 하나도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그 점에서 좀 힘들었습니다. 아마도 개별 사정은 다들 다르겠지만, 힘들지 않은 한 해를 보냈다고 할 수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 싶습니다. 우리의 사회적 정황이 있기에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다 녹록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지난 한 해 우리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새로운 틀을 짤 수 있는 두 차례의 중대한 기회, 곧 총선과 대선에 많은 기대를 걸었지만, 그 결과도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특히 대선결과는,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절반의 국민들에게 ‘멘붕’ 상태를 야기하였습니다. ‘집단 우울증’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절반의 국민들이 현실의 높은 장벽만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러면 반대편의 절반은 승리감에 도취해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일부는 그렇겠지만, 그 반대편의 절반 대열에 낀 사람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지금 현실을 넘어서고자 하는 기대로 자신들의 선택을 결정하였을 것입니다. 그 기대가 환멸로 바뀔지, 모종의 성취감을 누리게 될지, 아니면 끝없는 환상으로 이어질지는 두고 봐야겠습니다만, 우리사회가 성공한 절반의 보수와 실패한 절반의 진보로 딱 나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도된 착각에 매인 사람들이 많아 탈이지만, 여전히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두고 더 긴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만, 상황을 너무 비관적으로만 보지 않고 마음을 추슬러 희망의 씨앗을 일구어나가는 삶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마음이 추슬러 지지 않아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는 심정도 들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선거 다음날 교계언론으로부터 글을 청탁받아, 하나도 쓰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면서 어느 정도 스스로 치유를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더 근본적인 밑바탕은 역사를 돌아보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는 방식입니다. 요즘 영화 <레미제라블>이 큰 관심을 끌고 있고, 이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는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그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역시 역사로부터 얻는 교훈에 공명하는 탓일 겁니다. 혁명의 성공과 실패의 와중에서 달라지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의 정황,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들의 사랑이 오늘 이 시대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는 것일 겁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성서본문을 되풀이해서 읽고 그 의미를 나누는 것도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고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찾는 행위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단지 어떤 신조를 믿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주일마다 성서의 말씀을 나누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예수님과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역사 가운데서 오늘 우리의 길을 찾고자 우리는 성서의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진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한 장면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유대의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아주 의아해 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일이 없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합니까?”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은, 자신들이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전통에 충실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일이 없는데’ 하는 것은,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전통을 진리로 확고하게 믿고 따름으로써 이미 자신들은 진리 안에 거하고 있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하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들을 향해 “너희가 진리를 알게 되면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진리로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 사실은 진리가 아니며, 그것이 너희를, 또는 다른 사람들을 속박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정결례법에 따라 그 율법을 지키면 정결한 사람이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부정한 사람(죄인)으로 갈라놓았던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을 꼬집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뒤에 이어지는 말씀(39절 이하)에서 “너희가 정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대로 해야 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정말로 하나님께서 너희 아버지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너희의 아버지는 악마에게서 났다.”고까지 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말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악마의 욕망을 따르고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서 오도된 진리의 현상을 꼬집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진리란 인간에게 자유를 선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것에도 매일 것이 없고 진정한 자유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 궁극적인 경지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그 궁극적인 경지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갈 뿐 그 자체를 쉽사리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궁극적인 경지를 아직 잘 실감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오도된 현실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스스로의 자유를 억압하고 동시에 타인의 자유를 억압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분명히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인간사회 안에서 상대적인 가치체제에 지나지 않는 율법체제를 신봉함으로써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는 현실을 문제시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말씀은 사실 그렇게 간결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당연한 말씀이 뭐 오늘 우리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요?

앞서 프랑스혁명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레미제라블>을 언급했지만, 프랑스혁명의 중요한 정신적 기치이자 오늘 세계의 보편적 가치가 된 것들이 무엇입니까? ‘자유’ ‘평등’ ‘박애’입니다. 영국이나 미국과 달리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반종교적ㆍ반기독교적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그 가치들은 기독교와 무관한 근대정신의 발로일 뿐으로 보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정신을 배반한 당시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었을 뿐 그 가치는 고스란히 기독교, 성서에서 비롯되는 유산입니다.

제가 최근에 차분히 독파를 한 책이 있습니다. 늘 과제에 쫓기어 책을 읽는 ‘불행한’ 독서생활에서 살짝 벗어나 과제에 매이지 않고 여유롭게 읽어낸 책으로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라는 책입니다. 오늘의 시장경제체제를 ‘사탄의 맷돌’로 비유하고 있는 유명한 책입니다. 인류역사에서 시장은 늘 존재해 왔지만 그것은 언제나 사회 안에서 작은 한 기능을 담당했을 뿐 오늘날처럼 전 사회를 지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저히 상품이 될 수 없는 자연(토지)과 인간(노동력)마저도 상품화하는 오늘의 시장경제는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지극히 인위적인 것으로, 인류가 최근세의 역사에서 경험한 현상일 뿐입니다. 과거 시장이 사회 안에 묻혀 한 기능을 한 것과 달리 거꾸로 시장이 사회 전체를 집어삼키는 현상은 최근의 역사적 현상일 뿐으로, 그야말로 ‘거대한 전환’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시장경제체제가 사회를 집어삼키자 사회를 보호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지켜내고자 하는 움직임이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폴라니는 그 운동을 추동하는 정신적 기원을 성서에서 찾고 있습니다. 성서의 진리를 단순화시킨 듯하기도 하지만, 역사가의 놀라운 혜안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폴라니는 인간의 삶을 보장하는 정신으로 세 가지를 꼽는데, 그것은 죽음에 대한 깨달음, 자유에 대한 깨달음,  사회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첫째 죽음에 대한 깨달음은 구약성서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인간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 거기서 인간은 오히려 그 유한한 삶의 한계 안에서 의미있는 삶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자유에 대한 깨달음은 신약성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서 모든 개인의 인격 하나하나가 우주에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라는 발견으로 계시되었습니다. 셋째 사회에 대한 깨달음은 산업사회에 이르러 비로소 이뤄진 것이지만, 역시 성서의 유산과 무관하지 않은 초기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드러났습니다.

칼 폴라니는 바로 그 정신으로 인간은 모든 종류의 불의와 자유를 억압하는 조건에 대항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는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그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면 역사를 암울하게만 보아야 할 까닭이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역사학자로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에 이어 <극단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 4부작의 대작을 남기고 올해 10월 타계한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이런 격언을 남겼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무기를 내려놓지 말자. 사회불의에 여전히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20세기 극단의 시대를 산 우리와 동시대인 홉스봄은 현대 문학작품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 가운데 하나로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꼽고 있습니다. 이 책은 마르코 폴로가 자신의 여행담을 쿠빌라이 황제에게 전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이 소설에서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에게, 우리의 일상이 지옥이라면서 지옥을 견디는 두 가지 방법을 말합니다. 하나는 스스로 지옥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옥의 한복판에서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는 것으로, 이것은 매우 어려운 방법입니다. 이 방법을 따르기 위해서는 늘 깨어 있어야 하고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 말씀을 따르는 삶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명합니다.

오늘 한 해를 마감하고, 또 다시 맞이하는 한 해를 준비하는 시간, 그 말씀의 진실을 새기고 따르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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