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 누가복음 19:1~10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3-06-17 11:53
조회
8689
2013년 6월 1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본문: 누가복음 19:1~10



삭개오 이야기는,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들었던 성경 이야기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저에게도, 어떤 선생님 혹은 어떤 목사님이 이 이야기를 들려줬는지 그 기억은 분명하지 않지만, 이 이야기의 장면만큼은 아주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그 내용의 진지함이나 심각성보다는 아마도 이 이야기를 구성하는 장면 자체가 굉장히 흥미로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 구성을 갖추고 있는 만큼, 오늘 본문말씀은 보기에 따라 여러 의미를 우리에게 던져 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성서가 전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며 그 의미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수요일 성서연구 특강 시간을 통해, ‘진짜 초신자’ 또는 ‘살림교회 초신자’에 대한 적절한 안내가 필요하다는 요구 사항이 강력히 제기되었습니다.^^ 초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성서와 신앙에 관한 기초 지식과 기초 이해인 만큼, 그야말로 ‘기초적으로’ 오늘 말씀에 접근하고자 합니다. 물론 다른 때는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정말 성서에 대한 초보적 지식이 없기 때문에 이해가 어려운 경우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기존 신앙생활을 통해 너무 두텁게 쌓인 성서에 관한 편견 때문에 이해가 어려운 경우가 많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방금 선언한 대로 오늘 본문말씀에 대해 ‘기초적’으로 접근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여러 가지 일들을 행하시고 말씀을 전하시는 중에 여리고 지역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사해 북쪽의 역사가 오래 된 도시로, 비교적 풍요롭고 아름다운 도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께서 그 거리를 지나고 계실 때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으로, 그는 세리장이였고 부자였습니다. 히브리어로 ‘의로운 자’라는 뜻을 지닌 삭개오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이 사람은 틀림없는 유대인인데, 세리장이자 부자로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애써 달려왔다는 것은 평범한 상황은 아닙니다.

우선 그가 세리였다고 했는데, 세리는 일반 사람들의 눈에 볼 때 죄인으로 취급되는 부류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예수께서 세리를 친구로 삼는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세리는 상종 못할 부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세리들은 엄밀히 말해 국가 관리가 아니라 일종의 청부업자들이었습니다. 일정한 지역의 유력자가 입찰에 응하는 방식으로 나서 징세권을 얻어내면 하수인들을 두고 세금을 거두어들여 일정액을 상납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세리를 거의 도둑이나 강도 취급했습니다. 삭개오가 세리장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지역의 징세권을 갖고 있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일반 사람의 통념으로 볼 때 구원 받을 가능성이 없는 이가 구원을 선포하고 계시는 예수에게 다가선 사건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부자였습니다. 하급세리라면 형편없는 생활을 했던 반면 세리장이였으니 부자인 것이 당연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께 접근하는 것은 조금 더 상황이 복잡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앞 부분 18장에 보면 세리도 나오고 부자도 나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세리의 기도가 진실하다는 것을 인정한 반면, 자신이 가진 것 때문에 구원의 길에 이르지 못하는 부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렵다.” 그 유명한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러니까 전반적 문맥을 통해 보면, 부자가 예수께 접근한 것은 예수께서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말하자면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를 만남으로써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길에는 이중의 장벽이 있었던 셈입니다. 아마도 예수께서 세리들과 친구라는 소문에 삭개오는 선뜻 달려올 수 있었지만 공공연한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가 가진 것 때문에 진정성이 의혹 받을까 봐 예수께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처지였는지도 모릅니다. 그가 작은 자였다는 것은 단지 신체상의 조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준으로도 정상적인 사람들의 반열에 끼기 어려운 조건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삭개오 이야기는 아주 중대한 반전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반전을 일으키는 주인공은 삭개오 자신과 예수님입니다. 이 이야기는 공동의 주연이 펼치는 이야기입니다. 이 두 주인공이 일으키는 반전은, 주인공들이 사람들의 통념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뜻하는 동시에 사람들이 강고하게 지니고 있는 통념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뜻합니다.

먼저 삭개오가 공공연한 장소에서 예수를 만나고자 시도했다는 것은 통념의 세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강력하게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세리라는 이유로 따가운 시선을 받기는 했지만 부를 누리고 있는 만큼 삭개오는 그런 대로 살아가자면 오히려 남들의 선망을 받으면서 그대로 살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18장에서 돈 많은 관리가 구원에 관한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이 가진 것 때문에 그 구원의 길을 따르지 않았던 태도입니다. 삭개오는 자신 역시 그런 의혹을 받을 것을 염려했겠지만, 어떻게든 예수와 눈을 맞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씁니다. 자신의 진정성을 보이려는 노력입니다.

예수 앞에서 삭개오의 진정성은 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알아봅니다. 사전에 만난 적이 있다는 어떤 기록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곧바로 그를 알아보고 이름까지 부르며 그에게 뽕나무에서 내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눈빛만 보아도 진실이 통하는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예수께서는 삭개오를 부를 뿐 아니라 한 술 더 떠 삭개오의 집에 머물겠다고 선언합니다. 집에 유숙한다는 것은 그저 밤이슬 피할 숙소로 사용하겠다는 것을 말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유숙하는 것은 한 지붕 아래서 잠자리를 같이한다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함께 식탁을 같이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구원받지 못할 죄인과는 식탁을 함께 하지 않는 것이 통념인데, 예수께서는 그 통념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삭개오는 자신이 받고 있을지도 모르는 의혹이 적어도 예수에게는 한 점도 없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예수께서 ‘어서’ 내려오라고 하는 말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왔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장면과 똑같은 장면일 것입니다. 병아리가 연약한 부리로 안에서 쪼아대는 순간 어미 닭이 단단한 부리로 밖에서 쪼아댈 때 병아리가 세상에 나오게 되는 순간과 같은 장면입니다.


그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통념으로는 있을 수 없는 장면이 지금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말하기를,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상호간 수석 대표의 격이 안 맞는다고 모처럼 시도된 남북대화가 결렬되지 않았습니까? 예수와 삭개오의 만남, 더욱이 삭개오의 집에 예수가 머무르게 된 사건은, 격이 맞아야지 격이 안 맞는데 어떻게 자리를 같이 하느냐는 통념에서 비춰 볼 때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통념 때문에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사람들의 충격을 다시 한 번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이 누구였을까요? 이들의 예수의 적대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준변에 운집해 그 말씀을 들으려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더러 적대자들이 끼여 있었을 수도 있지만,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고자 해도 뚫고 나갈 수 없을 정도로 모여 있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이들 때문에 예수를 곧바로 만나는데 어려움을 겪었는데, 결국 자신의 진정성과 지혜로 예수를 만나게 되었을 때 이들은 그 장면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을 방해하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결코 그런 저의를 갖고 있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세상을 지배하는 통념에 벗어나 있지 못하는 한 그들은 그리스도의 길, 구원의 길에 방해가 되는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교회,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혹 이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이미 마음과 마음이 통한 예수와 삭개오에게는 그런 통념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만난 삭개오는 이제까지의 삶과는 180도 전환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삭개오는 삶의 전환의 구체적 표시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을 속여 갈취한 것이 있다면 네 갑절로 갚아 주겠다고 다짐합니다. 통상 유대의 관습에 의하면, 재물로 자선을 할 경우에는 랍비들이 재산이나 수입의 20%를 권했다고 하고, 부당하게 갈취한 돈을 되돌려 줄 때에는 1/5을 더 보태주어야 했다(레위 6:1-5)고 합니다. 그러나 도둑질을 했을 경우 네 배의 배상 즉 3배의 벌금을 물어야 했습니다(삼하 12:6, 나단과 다윗의 대화). 이런 사정으로 보아 삭개오는 아주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돌이키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한 것입니다.

삭개오에게는 자기가 가진 재산으로만은 누릴 수 없었던 진정한 삶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며, 그 진정한 삶을 위하여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내놓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내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부당하게 축적한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림으로써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뜻합니다. 진정한 삶이라는 것이 자기만의 만족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온전한 관계의 회복이 이뤄지는 가운데서 사람은 진정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다짐을 한 삭개오에게 선언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려 왔다.” 삭개오의 집에 이른 구원,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관계가 회복된 사건을 뜻합니다. 그 안에서 각각의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시고 보여 주신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말씀을 오늘의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읽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경제민주화 조처가 기대만큼 진척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나마 제정된 법에 따라 공정거래위원회에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을 역설하며 구체적으로 꼬집어 “부당 단가인하 관행이 근절되지 않으면 중소기업의 경영악화는 물론 소득 양극화, 일자리 창출 부진으로 이어져 우리 경제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기업을 대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대기업의 과도한 부담을 내세워 이미 도입된 징벌적 손해배상까지 반대하고 있습니다.

대기업만의 문제일까요? 그 논리는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습니다. 박노자는 며칠 전 신문의 한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43년 전에 진짜 지식인 함석헌이나 안병무에게는 전태일의 죽음은 그들의 지적인 인생을 바꿀 만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 누구도 ‘정상적’이라고 볼 수 없는 병영형 독재국가에서 살아야 했던 인텔리들에게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집안 형편상 죽어도 인텔리가 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부채의식이라도 있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신자유주의적 세계로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회라서 그런지, 이제는 그런 부채의식마저도 사라져버린 듯한 느낌이다.” 진정으로 자율성을 지니고, 주체성을 지닌 사람들의 온전한 관계로서 사회가 아니라, 생존의 전사들만 판치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꼬집는 이야기입니다.


세리장이요 부자였던 삭개오가 구원을 누리게 된 것은, 자기 스스로 지탱하면서도 진정한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삶의 방식과 그것을 정당화하는 통념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었고, 예수에게서 그 진정한 갈망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찾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도대체 얼마나 더 망가져야 그 진실을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을까요?

바로 지금 우리가 그 진실을 깨닫고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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