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 사도행전 16:6~15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4-02-23 20:55
조회
8951
2014년 2월 2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바울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본문: 사도행전 16:6~15
1980년대말 화제가 된 영화가 있었습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입니다. 본 지가 하도 오래되어 영상만 언뜻언뜻 기억나지 그 내용은 가물가물한데, 선불교의 시선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 인간 존재에 관해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 정도로 기억합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그 때 그 영화 제목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말씀이 사도 바울 유럽 선교에 나세게 된 계기를 전하고 있기에 딱 그렇게 제목을 붙이기에 적절하다 생각됩니다. 그런데 제목은 그렇게 그럴 듯하게 붙였지만, 과연 사도 바울이 서쪽으로 간 까닭이 무엇이었는지 속 시원하게 규명할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본문을 암만 읽어도 그 사연을 속 시원하게 알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읽고 또 읽고, 추정 가능한 여러 가지 정황에 더하여 상상력을 덧붙여 그 사연을 헤아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읽은 본문을 그대로 따라가며 그 사연을 가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크게 두 가지 부분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앞 부분은 사도 바울 일행이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으로 본격적 선교활동을 나서게 되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고, 뒷 부분은 그곳에서 루디아라는 여자를 만나 복음을 전함으로써 유럽 땅에 최초로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대목을 볼까요? 6절을 보면 성령이 아시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시아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럴 수 있느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는 오늘날 아시아대륙 전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소아시아, 곧 터키 지역에 해당합니다. 아무튼 그래서 바울일행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지나 무시아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들어가려 했다고 전합니다.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는 터키 중부지역에 해당하고 무시아는 서부지역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비두니아는 서북부지역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터키지역 안에서 중부에서 서부를 거쳐 그 서북부로 가려고 했던 행보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다시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바울 일행은 무시아를 거쳐 드로아에 이릅니다. 드로아는 유럽으로 통하는 항구도시입니다.
드로아에서 바울은 밤중에 환상을 봅니다. 건너편 마케도니아, 곧 유럽지역에 해당하는 마케도니아 사람이 나타나 외칩니다.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바울 일행은 하나님께서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으로 확신하고 마케도니아로 건너가기로 작정합니다.
이 일련의 사건의 실체가 무엇일까요? 유감스럽게도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전향을 하게 된 사건도 순전히 인간적 차원에서 이해하자면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그 실체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은데, 다메섹에서의 사건과 더불어 유럽 선교사로서 바울의 역할을 확정지은 이 사건도 그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성서가 전하는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바울일행이 스스로 선교여정에 관한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그 계획을 뜻대로 이룰 수 없었다는 것만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성령이, 예수의 영이,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셨다는 표현은 바울 일행의 스스로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힘에 이끌려 이방인 지역 선교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의 증언에서 일단 우리는 그 사실만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11절 이하에 이어지는 본문은 그렇게 인도를 받아 유럽지역에 첫발을 내디딘 후 벌어진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 섬을 거쳐 이튿날 네압볼리에 도착했고, 거기서 다시 빌립보에 이릅니다. 바울의 유럽지역 첫 선교지인 빌립보는, 본문이 전하는 대로 로마의 식민지로서 마케도니아 지역의 첫째가는 도시였습니다.
여기서 며칠 동안 머물면서 바울 일행은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처소가 있음직한 강가를 찾아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사실적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이방인 지역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처소를 먼저 찾았다는 것은 바울의 초기 선교활동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미 바울은 소아시아지역에서 선교활동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바울이 선교활동을 펼친 거점은 항상 유대인 회당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 이르서도 똑같은 방식을 취합니다. 그런데 회당이 아니라 강가에 있는 기도처라 했습니다. 이것은 빌립보에 번듯한 유대인 회당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모여 기도하는 처소가 있다는 것은 소수의 무리이지만 유대인들의 모임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모임이 강가에서 이뤄지는 것은 정결례를 치르기에 좋기 때문입니다.
강가의 기도처에서 바울은 모여 든 여자들을 만납니다. 남자들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없고 여자들만 만난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중요한 정보를 함축합니다. 통상 유대인들의 모임은 남자가 10명 정도 모여야 정식 예배가 이뤄졌습니다. 따라서 강가 기도처의 모임은 정식 예배가 아니라 그저 여자들이 모여 기도하는 정도의 모임이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여자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루디아라는 여자가 있어 처음으로 바울의 이야기를 받아들여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여자의 존재도 흥미롭습니다. 우선 이 사람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은 유대인은 아니되 유대교와 그 공동체에 우호적이고 또한 함께 협력하는 이방인들에 대한 통칭입니다. 그들은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대개는 유대인 공동체의 유력한 후원자로서 역할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개종자들이 사회적 신분상으로 대개 낮은 계층에 속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대개 유력한 계층에 속했습니다. 본문은 이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아디라 출신으로 자색 옷감 장수였다고 합니다. 두아디라는 터키지역의 도시로서 루아디라는 이름은 개인의 고유명사라기보다는 광의의 지역 이름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두아디라가 포함된 루디아 지역 출신이라는 뜻입니다. 자색 옷은 황제를 비롯한 유력한 귀족들이 즐겨 입는 옷입니다. 루디아 여인의 고객들이 유력계층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따라서 자주색 옷감 장수였다는 것은 그의 재력 및 신분이 어느 정도였는지 중요한 정보를 말해 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 여인이 바울일행의 유럽 선교의 처음 열매가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바울의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셔 묵게 했습니다. 이 여인에 대한 개별적 정보는 이후에 더 등장하지 않지만, 바울의 선교에 의한 유럽지역에서의 첫 교회인 빌립보교회가 바울의 선교활동에 적지 않은 후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심에 이 여인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본문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재구성하여 살펴봤습니다만, 오늘 말씀의 제목이자 동시에 처음에 던졌던 물음에 대한 답은 아직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다시 한 번 확인하지만, 본문말씀에 의하면 성령이, 예수의 영이,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믿으면 그만이지 뭘 그렇게 애써 또 다른 이유를 찾으려고 하느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성서의 증언이 의도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울이 순전히 임의대로 선교활동을 펼친 게 아니라는 것을 증언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인간적 노력이 허사였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스스로 예정하고 계획한 범위, 다시 말해 바울 자신의 인식 범위를 벗어난 사건이 전개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 뜻을 모르는 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굳이 바울이 서쪽으로 간 까닭을 재삼 캐묻는 것은, 그 사건이 바울 자신에게는 어떤 경험으로 다가왔을까 하는 것을 헤아려보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서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암만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를 바라고 산다고 하지만, 항상 우리의 인식과 판단은 구체적인 경험의 세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험의 세계에 비추어 이해한다면 바울의 그 경험이 어떤 경험이었을까 이해함으로써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깨달으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수요 성서연구 시간을 통해 바울의 서신들을 읽어나가며 바울의 행적을 살펴보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해서 우리가 알게 된 정보, 그리고 어느 정도는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정보들을 통해 우리는 바울의 그 인간적 경험을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단서 가운데 하나가 바울의 선교활동이 언제나 유대인의 회당을 거점으로 해서 진행되었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전향 이후에 이미 이방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만 볼 것 같으면 바울은 아시아지역 선교를 하지 못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성서연구 본문으로 삼고 있는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지역 교회에 보낸 서신입니다. 그 갈라디아지역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터키의 중부지역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이미 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의 열매를 거뒀습니다. 오늘 본문이 증언하는 바에 의하면 바울은 그 지역에서 더 많은 열매를 거두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역은 더 많은 열매를 거두기에 확실히 유리한 조건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지역 역시 예루살렘과는 떨어진 이방인 지역이지만 주요 도시 거점마다 유대인 공동체들이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그 공동체들은 바울이 선교활동을 펼치기에 중요한 거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증언하는 것처럼, 바울은 유럽지역에서조차도 유대인이 있는 곳을 찾았을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틀림없이 그렇게 주요 거점들을 다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전략을 세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 계획이 계속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 상황을 일러 성령이, 예수의 영이 막았다고 전하고 있고, 마침내 하나님이 완전히 낯선 땅으로 인도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계획을 방해한 결정적 요인이 무엇이었을까요? 선교 여행길 자체가 험난한 사정이거나 어떤 천재지변이었을까요? 그러한 요인 바울의 계획을 방해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바울의 증언에 따르면 수없이 많은 난관을 겪으면서도 선교여행을 했습니다. 보다 현실적인 이유는 역시 유대인 회당과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을 비방하고 반대하는 세력의 존재, 소위 정통 유대교의 입장에서 바울의 낯선 복음을 공격하는 세력들의 존재가 보다 현실적인 이유일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과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는데 그것이 방해요인이었을까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지만, 바울 일행은 그 때문에 수없이 현실적 위협을 겪었습니다. 유럽지역인 빌립보에서도, 데살로니카에서도 그런 반대에 부딪혀 공격 당하고 고발 당해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유대인 공동체가 미약한 지역에서도 그랬으니 유대인 공동체가 더 강고한 소아시아지역에서 그 반발은 아예 처음부터 발도 내딛지 못하게 할 만큼 컸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 공동체를 거점으로 한 바울의 선교활동의 양극적인 상황입니다.
스스로 이방인 지역 출신으로 자신의 출신 지역에서 더욱 유리한 이점을 활용하여 선교활동을 펼치고자 했던 바울은 그런 현실적인 난관 때문에 전적으로 낯선 지역으로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현실적인 난관에 봉착했을 때 바울에게는 그야말로 낯선 땅이 시야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 때 환상을 봅니다.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그 목소리를 듣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길로 접어듭니다.
로마의 식민지로서 철저하게 이방문화가 지배하는 도시, 유대인 공동체도 미약하여 어디 의존하려 해도 여의치 않은 도시, 전적으로 낯선 땅에 바울은 발을 내딛습니다. 거기에서 호응하는 사람도 기대 밖이었습니다. 결국 반대자로 돌아설지언정 그래도 우선 말귀를 알아들을 법한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 여인이 그의 말귀를 알아듣는 놀라운 체험을 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이방 세계에서 꽤나 영향력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낯선 미지의 땅에서 놀라운 경험을 한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에게서 그 낯선 땅에서의 놀라운 경험은 이방인 선교사로서 바울의 활동 기간 내내 커다란 용기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미지의 땅에 나서는 두려움이 앞섰을 텐데, 그 놀라운 경험으로 바울은 용기를 얻고 기대감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감히 바울의 선교 의의에 비교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오늘 본문말씀의 의미를 헤아리다 보니 살림교회 14년의 역사가 동시에 떠오릅니다. 두려움반 기대반으로 시작했던 걸음이 지금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사연이 어디에 있을까요? 계획했던 대로만 될 수 없었던 형편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예기치 않게 누리게 된 열매 덕분에 우리는 지금까지 희망을 품고 지속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또한 동시에 떠오릅니다. 그의 삶의 여정 자체가 당장 눈에 보이는 가시적 보상이 불확실한 상황이었지만 약속을 믿고 따랐던 삶이었습니다. 그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가운데 가장 극적인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나그네를 대접했다가 하나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미지의 낯선 세계, 낯선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건이 어떻게 놀라운 결과를 빚어내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서쪽으로 간 까닭, 그것은 익숙한 길에서 떠나 미지의 낯선 세계로 나서고자 한 데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요 우리의 세계를 확장하는 길입니다. 자기 안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세계와 통하는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특별히 입학과 졸업을 하는 학생들을 격려하고자 합니다. 하나의 과정을 마치고 또 다른 과정에 진입하는 것은 낯선 세계로 나서는 것을 뜻합니다. 낯선 세계 안에서 자신의 세계가 더욱더 확장되는 우리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들 모두 그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기원합니다.*
제목: 바울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본문: 사도행전 16:6~15
1980년대말 화제가 된 영화가 있었습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입니다. 본 지가 하도 오래되어 영상만 언뜻언뜻 기억나지 그 내용은 가물가물한데, 선불교의 시선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 인간 존재에 관해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 정도로 기억합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그 때 그 영화 제목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말씀이 사도 바울 유럽 선교에 나세게 된 계기를 전하고 있기에 딱 그렇게 제목을 붙이기에 적절하다 생각됩니다. 그런데 제목은 그렇게 그럴 듯하게 붙였지만, 과연 사도 바울이 서쪽으로 간 까닭이 무엇이었는지 속 시원하게 규명할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본문을 암만 읽어도 그 사연을 속 시원하게 알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읽고 또 읽고, 추정 가능한 여러 가지 정황에 더하여 상상력을 덧붙여 그 사연을 헤아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읽은 본문을 그대로 따라가며 그 사연을 가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크게 두 가지 부분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앞 부분은 사도 바울 일행이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으로 본격적 선교활동을 나서게 되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고, 뒷 부분은 그곳에서 루디아라는 여자를 만나 복음을 전함으로써 유럽 땅에 최초로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대목을 볼까요? 6절을 보면 성령이 아시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시아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럴 수 있느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는 오늘날 아시아대륙 전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소아시아, 곧 터키 지역에 해당합니다. 아무튼 그래서 바울일행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지나 무시아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들어가려 했다고 전합니다.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는 터키 중부지역에 해당하고 무시아는 서부지역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비두니아는 서북부지역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터키지역 안에서 중부에서 서부를 거쳐 그 서북부로 가려고 했던 행보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다시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바울 일행은 무시아를 거쳐 드로아에 이릅니다. 드로아는 유럽으로 통하는 항구도시입니다.
드로아에서 바울은 밤중에 환상을 봅니다. 건너편 마케도니아, 곧 유럽지역에 해당하는 마케도니아 사람이 나타나 외칩니다.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바울 일행은 하나님께서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으로 확신하고 마케도니아로 건너가기로 작정합니다.
이 일련의 사건의 실체가 무엇일까요? 유감스럽게도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전향을 하게 된 사건도 순전히 인간적 차원에서 이해하자면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그 실체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은데, 다메섹에서의 사건과 더불어 유럽 선교사로서 바울의 역할을 확정지은 이 사건도 그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성서가 전하는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바울일행이 스스로 선교여정에 관한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그 계획을 뜻대로 이룰 수 없었다는 것만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성령이, 예수의 영이,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셨다는 표현은 바울 일행의 스스로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힘에 이끌려 이방인 지역 선교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의 증언에서 일단 우리는 그 사실만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11절 이하에 이어지는 본문은 그렇게 인도를 받아 유럽지역에 첫발을 내디딘 후 벌어진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 섬을 거쳐 이튿날 네압볼리에 도착했고, 거기서 다시 빌립보에 이릅니다. 바울의 유럽지역 첫 선교지인 빌립보는, 본문이 전하는 대로 로마의 식민지로서 마케도니아 지역의 첫째가는 도시였습니다.
여기서 며칠 동안 머물면서 바울 일행은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처소가 있음직한 강가를 찾아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사실적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이방인 지역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처소를 먼저 찾았다는 것은 바울의 초기 선교활동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미 바울은 소아시아지역에서 선교활동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바울이 선교활동을 펼친 거점은 항상 유대인 회당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 이르서도 똑같은 방식을 취합니다. 그런데 회당이 아니라 강가에 있는 기도처라 했습니다. 이것은 빌립보에 번듯한 유대인 회당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모여 기도하는 처소가 있다는 것은 소수의 무리이지만 유대인들의 모임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모임이 강가에서 이뤄지는 것은 정결례를 치르기에 좋기 때문입니다.
강가의 기도처에서 바울은 모여 든 여자들을 만납니다. 남자들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없고 여자들만 만난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중요한 정보를 함축합니다. 통상 유대인들의 모임은 남자가 10명 정도 모여야 정식 예배가 이뤄졌습니다. 따라서 강가 기도처의 모임은 정식 예배가 아니라 그저 여자들이 모여 기도하는 정도의 모임이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여자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루디아라는 여자가 있어 처음으로 바울의 이야기를 받아들여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여자의 존재도 흥미롭습니다. 우선 이 사람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은 유대인은 아니되 유대교와 그 공동체에 우호적이고 또한 함께 협력하는 이방인들에 대한 통칭입니다. 그들은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대개는 유대인 공동체의 유력한 후원자로서 역할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개종자들이 사회적 신분상으로 대개 낮은 계층에 속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대개 유력한 계층에 속했습니다. 본문은 이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아디라 출신으로 자색 옷감 장수였다고 합니다. 두아디라는 터키지역의 도시로서 루아디라는 이름은 개인의 고유명사라기보다는 광의의 지역 이름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두아디라가 포함된 루디아 지역 출신이라는 뜻입니다. 자색 옷은 황제를 비롯한 유력한 귀족들이 즐겨 입는 옷입니다. 루디아 여인의 고객들이 유력계층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따라서 자주색 옷감 장수였다는 것은 그의 재력 및 신분이 어느 정도였는지 중요한 정보를 말해 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 여인이 바울일행의 유럽 선교의 처음 열매가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바울의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셔 묵게 했습니다. 이 여인에 대한 개별적 정보는 이후에 더 등장하지 않지만, 바울의 선교에 의한 유럽지역에서의 첫 교회인 빌립보교회가 바울의 선교활동에 적지 않은 후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심에 이 여인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본문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재구성하여 살펴봤습니다만, 오늘 말씀의 제목이자 동시에 처음에 던졌던 물음에 대한 답은 아직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다시 한 번 확인하지만, 본문말씀에 의하면 성령이, 예수의 영이,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믿으면 그만이지 뭘 그렇게 애써 또 다른 이유를 찾으려고 하느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성서의 증언이 의도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울이 순전히 임의대로 선교활동을 펼친 게 아니라는 것을 증언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인간적 노력이 허사였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스스로 예정하고 계획한 범위, 다시 말해 바울 자신의 인식 범위를 벗어난 사건이 전개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 뜻을 모르는 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굳이 바울이 서쪽으로 간 까닭을 재삼 캐묻는 것은, 그 사건이 바울 자신에게는 어떤 경험으로 다가왔을까 하는 것을 헤아려보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서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암만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를 바라고 산다고 하지만, 항상 우리의 인식과 판단은 구체적인 경험의 세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험의 세계에 비추어 이해한다면 바울의 그 경험이 어떤 경험이었을까 이해함으로써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깨달으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수요 성서연구 시간을 통해 바울의 서신들을 읽어나가며 바울의 행적을 살펴보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해서 우리가 알게 된 정보, 그리고 어느 정도는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정보들을 통해 우리는 바울의 그 인간적 경험을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단서 가운데 하나가 바울의 선교활동이 언제나 유대인의 회당을 거점으로 해서 진행되었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전향 이후에 이미 이방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만 볼 것 같으면 바울은 아시아지역 선교를 하지 못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성서연구 본문으로 삼고 있는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지역 교회에 보낸 서신입니다. 그 갈라디아지역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터키의 중부지역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이미 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의 열매를 거뒀습니다. 오늘 본문이 증언하는 바에 의하면 바울은 그 지역에서 더 많은 열매를 거두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역은 더 많은 열매를 거두기에 확실히 유리한 조건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지역 역시 예루살렘과는 떨어진 이방인 지역이지만 주요 도시 거점마다 유대인 공동체들이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그 공동체들은 바울이 선교활동을 펼치기에 중요한 거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증언하는 것처럼, 바울은 유럽지역에서조차도 유대인이 있는 곳을 찾았을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틀림없이 그렇게 주요 거점들을 다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전략을 세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 계획이 계속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 상황을 일러 성령이, 예수의 영이 막았다고 전하고 있고, 마침내 하나님이 완전히 낯선 땅으로 인도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계획을 방해한 결정적 요인이 무엇이었을까요? 선교 여행길 자체가 험난한 사정이거나 어떤 천재지변이었을까요? 그러한 요인 바울의 계획을 방해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바울의 증언에 따르면 수없이 많은 난관을 겪으면서도 선교여행을 했습니다. 보다 현실적인 이유는 역시 유대인 회당과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을 비방하고 반대하는 세력의 존재, 소위 정통 유대교의 입장에서 바울의 낯선 복음을 공격하는 세력들의 존재가 보다 현실적인 이유일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과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는데 그것이 방해요인이었을까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지만, 바울 일행은 그 때문에 수없이 현실적 위협을 겪었습니다. 유럽지역인 빌립보에서도, 데살로니카에서도 그런 반대에 부딪혀 공격 당하고 고발 당해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유대인 공동체가 미약한 지역에서도 그랬으니 유대인 공동체가 더 강고한 소아시아지역에서 그 반발은 아예 처음부터 발도 내딛지 못하게 할 만큼 컸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 공동체를 거점으로 한 바울의 선교활동의 양극적인 상황입니다.
스스로 이방인 지역 출신으로 자신의 출신 지역에서 더욱 유리한 이점을 활용하여 선교활동을 펼치고자 했던 바울은 그런 현실적인 난관 때문에 전적으로 낯선 지역으로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현실적인 난관에 봉착했을 때 바울에게는 그야말로 낯선 땅이 시야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 때 환상을 봅니다.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그 목소리를 듣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길로 접어듭니다.
로마의 식민지로서 철저하게 이방문화가 지배하는 도시, 유대인 공동체도 미약하여 어디 의존하려 해도 여의치 않은 도시, 전적으로 낯선 땅에 바울은 발을 내딛습니다. 거기에서 호응하는 사람도 기대 밖이었습니다. 결국 반대자로 돌아설지언정 그래도 우선 말귀를 알아들을 법한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 여인이 그의 말귀를 알아듣는 놀라운 체험을 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이방 세계에서 꽤나 영향력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낯선 미지의 땅에서 놀라운 경험을 한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에게서 그 낯선 땅에서의 놀라운 경험은 이방인 선교사로서 바울의 활동 기간 내내 커다란 용기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미지의 땅에 나서는 두려움이 앞섰을 텐데, 그 놀라운 경험으로 바울은 용기를 얻고 기대감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감히 바울의 선교 의의에 비교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오늘 본문말씀의 의미를 헤아리다 보니 살림교회 14년의 역사가 동시에 떠오릅니다. 두려움반 기대반으로 시작했던 걸음이 지금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사연이 어디에 있을까요? 계획했던 대로만 될 수 없었던 형편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예기치 않게 누리게 된 열매 덕분에 우리는 지금까지 희망을 품고 지속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또한 동시에 떠오릅니다. 그의 삶의 여정 자체가 당장 눈에 보이는 가시적 보상이 불확실한 상황이었지만 약속을 믿고 따랐던 삶이었습니다. 그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가운데 가장 극적인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나그네를 대접했다가 하나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미지의 낯선 세계, 낯선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건이 어떻게 놀라운 결과를 빚어내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서쪽으로 간 까닭, 그것은 익숙한 길에서 떠나 미지의 낯선 세계로 나서고자 한 데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요 우리의 세계를 확장하는 길입니다. 자기 안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세계와 통하는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특별히 입학과 졸업을 하는 학생들을 격려하고자 합니다. 하나의 과정을 마치고 또 다른 과정에 진입하는 것은 낯선 세계로 나서는 것을 뜻합니다. 낯선 세계 안에서 자신의 세계가 더욱더 확장되는 우리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들 모두 그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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