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보장하지 않는 헛된 신화를 타파하라 - 야고보서 1:12~18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4-03-09 17:58
조회
8516
2014년 3월 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삶을 보장하지 않는 헛된 신화를 타파하라
본문: 야고보서 1:12~18
우리가 지금 수요 성서연구 시간에 바울의 서신들을 기록된 순서를 따라 읽어나가고 있기에 기회가 될 때마다 그 뜻을 재삼 환기하게 됩니다. 어떤 교리적 전제를 가지지 않고 읽다 보니까 바울 서신의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헤아릴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측면은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본의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을 충분히 헤아리는 것이요, 두 번째 측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본의에 상관없이 교회의 역사에서 해악을 끼치게 된 측면을 가늠해보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는 율법에 매인 종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유인을 역설한 바울이 그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구약성서에서 아브라함의 두 부인 하갈과 사라, 그리고 그 두 아들의 경우를 비유로 해석하는 본문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그 본의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지만, 비유, 정확히 말하면 비유라기보다는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방식이 좀 억지스럽다고 느꼈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의 주장을 위해 임의적으로 옛 성서본문을 해석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으면서, 동시에 제 멋대로 해석되고 있는 오늘 교회들 안에서의 성서해석의 실상을 화제 삼았습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바울의 서신은 오용된 경우가 많습니다. 본의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용될 소지를 남긴 경우도 있고, 그야말로 완전히 딴판으로 오용된 경우도 있습니다. 오용의 역사는 초기 기독교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 것은 자격과 업적의 논리를 부정함으로써 현실에 존재하는 차별을 철폐하는 데 그 본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맡겨버리고 인간 자신의 책임이나 노력은 무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오용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그 오용은 훨씬 심각합니다.
바로 그 즈음, 그러니까 바울의 가르침이 교회 안에서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됨과 동시에 한편으로 오용이 횡행할 즈음 이를 염려하는 경향이 교회 안에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 은혜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한 히브리서나,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환기하는 듯한 어조로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그 대표적 경우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이 포함된 야고보서는 통상 그 저자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일 것이라 추정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후대의 인물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야고보서가 바울의 서신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고, 생애 기간 바울과 충돌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에 그렇게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야고보서의 유려한 그리스어의 특징, 그리고 주후 62년경 순교한 것으로 알려진 야고보 생전에 이 편지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기록 연대가 훨씬 후대로서 저자가 야고보의 권위를 빌어 기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바울의 가르침이 교회 안에서 큰 영향력을 지님과 동시에 오용되기 시작할 즈음에야 등장한 서신으로 보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시험을 견뎌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시험은 특정한 시험을 말하기보다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광범위한 의미에서 시련과 유혹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련과 유혹을 이겨내는 사람은 복이 있어 마침내 생명의 면류관을 누릴 것이이라 말합니다. 야고보서가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신앙의 어떤 경향을 문제시하며 그에 대한 하나의 대안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 의도는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 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또 스스로 아무도 시험하시도 않으십니다.” 이 말씀은 접하면 어떤 상황이 연상됩니까? 초기 교회의 상황은 잘 몰라 연상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늘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독교인들의 태도가 쉽게 연상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고 스스로는 책임으로부터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의 태도를 곧바로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오늘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초기 교회에서, 그리고 이미 구약의 시대부터 만연되어 있는 하나의 종교적 태도였습니다.
야고보는 어떤 시험을 겪고 있을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시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서 하나님의 본성이라고 할까요, 일종의 신론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시험을 당하는 분도 아니거니와 누구를 시험하지도 않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야고보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시험이 어디에서 비롯되느냐는 문제에 답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자기에게 돌려야 할 일을 하나님에게 돌리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안에서 비롯되고 자기가 책임져야 할 일을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돌리고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여기서 유명한 명제로 회자되는 말씀을 선포합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표현은 사람 안의 욕심을 마치 하나의 인격적 실체로서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그것에 이끌리기도 하고 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냥 욕심이 생겨 사람이 잘못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욕심이라는 놈이 사람을 이끌고 꾀기도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진정한 자아와 대립되어 있는 어떤 속성을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 본성이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아에 맞서는 욕심이 사람을 괴롭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결국 죄에 빠트리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여기서 죽음은 육체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나 산 것 같지 않은 삶을 말합니다.
그 욕심에 넘어가지 않은 삶을 권면하는 야고보 기자는 긍정적인 언어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다음 주제로 넘어갑니다. “나의 사랑하는 신도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사람을 괴롭히는 한 속성을 하나님이 심어준 본성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말씀에서 야고보의 기자는 마지막으로 온전한 하나님에 대해 최고의 긍정적인 언어로 하나님에 관해 말합니다. 이러니까 속지 말라는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는 셈입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인데, 곧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변하는 것이나 움직이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뜻을 정하여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 주셔서, 우리를 피조물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심오한 이야기입니다만, 하나님이 사람 하나 두고 시험이나 거는 째째한 분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본문말씀을 그대로 따라 새기자면 하나님께서 좋은 선물과 완전한 은사를 주셨고, 진리의 말씀으로 낳아 주셨으니, 그 진실을 새기라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연상시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참된 자아요, 참된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함에 상응하는 인간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말씀은 욕심에 꾀여 죽음에 이를 것이냐 진정한 삶을 누릴 것이냐 선택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줍잖은 핑계를 대면서 엉뚱한 길로 빠지지 말고 진정한 삶을 누리는 길을 선택하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그것이 마땅한 길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말씀은 적극적인 삶의 의지를 강조한 것이요, 적극적인 삶의 대안을 찾아나서라는 것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의 삶에서 뜻하는 바가 과연 무엇일까요? 결코 진리일 수 없는 것을 진리로 착각하고 꾐에 빠져드는 모든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라는 것을 뜻합니다.
지난 주간 학교가 개강했는데, 신학대학원 <경제윤리> 첫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현대 주류 경제학의 가장 큰 문제가 경제적 법칙을 불가항력적인 자연법칙으로 간주할 뿐 아니라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인간의 동기를 전적으로 이기적이라고 확고하게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라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경제윤리는 그 신화에 대해 의심하고 나아가 진정으로 경제의 원래 목적대로 인간 삶에 기여하는 대안이 무엇인지 찾아보자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제가 이 시간에 재삼 강조하고 싶은, 한갓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형성된 인간의 이기적 속성을 만고불변의 인간 본성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는 태도를 믿음이 신실하다고 칭찬하지 않고 오히려 잘못된 것이라 질책하고 있는 오늘 본문말씀의 뜻은, 인간이 그런 잘못된 신화에 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잘못된 신화에 대한 믿음은 갖가지 형태로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철도를 민영화해야 하고, 의료법인을 영리법인화 해야 질 좋은 서비스가 이뤄진다는 엉터리 주장도 그 잘못된 신화에 대한 믿음에 기초해 있습니다. 철의 여인이라 불린 대처도 그것만큼은 손대지 못했던 일인데, 이 나라에서는 그것부터 손대고자 하는 잘못된 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 신화를 타파해라, 결코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닌데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믿는 잘못된 믿음을 버려라,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 무엇인지 깨닫고 스스로 감당해야 할 책임을 감당해라, 하나님이 그것을 보장해주신다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 주셨다는 오늘 말씀의 의미를 새기며, 우리가 진정한 삶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제목: 삶을 보장하지 않는 헛된 신화를 타파하라
본문: 야고보서 1:12~18
우리가 지금 수요 성서연구 시간에 바울의 서신들을 기록된 순서를 따라 읽어나가고 있기에 기회가 될 때마다 그 뜻을 재삼 환기하게 됩니다. 어떤 교리적 전제를 가지지 않고 읽다 보니까 바울 서신의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헤아릴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측면은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본의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을 충분히 헤아리는 것이요, 두 번째 측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본의에 상관없이 교회의 역사에서 해악을 끼치게 된 측면을 가늠해보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는 율법에 매인 종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유인을 역설한 바울이 그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구약성서에서 아브라함의 두 부인 하갈과 사라, 그리고 그 두 아들의 경우를 비유로 해석하는 본문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그 본의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지만, 비유, 정확히 말하면 비유라기보다는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방식이 좀 억지스럽다고 느꼈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의 주장을 위해 임의적으로 옛 성서본문을 해석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으면서, 동시에 제 멋대로 해석되고 있는 오늘 교회들 안에서의 성서해석의 실상을 화제 삼았습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바울의 서신은 오용된 경우가 많습니다. 본의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용될 소지를 남긴 경우도 있고, 그야말로 완전히 딴판으로 오용된 경우도 있습니다. 오용의 역사는 초기 기독교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 것은 자격과 업적의 논리를 부정함으로써 현실에 존재하는 차별을 철폐하는 데 그 본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맡겨버리고 인간 자신의 책임이나 노력은 무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오용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그 오용은 훨씬 심각합니다.
바로 그 즈음, 그러니까 바울의 가르침이 교회 안에서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됨과 동시에 한편으로 오용이 횡행할 즈음 이를 염려하는 경향이 교회 안에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 은혜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한 히브리서나,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환기하는 듯한 어조로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그 대표적 경우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이 포함된 야고보서는 통상 그 저자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일 것이라 추정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후대의 인물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야고보서가 바울의 서신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고, 생애 기간 바울과 충돌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에 그렇게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야고보서의 유려한 그리스어의 특징, 그리고 주후 62년경 순교한 것으로 알려진 야고보 생전에 이 편지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기록 연대가 훨씬 후대로서 저자가 야고보의 권위를 빌어 기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바울의 가르침이 교회 안에서 큰 영향력을 지님과 동시에 오용되기 시작할 즈음에야 등장한 서신으로 보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시험을 견뎌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시험은 특정한 시험을 말하기보다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광범위한 의미에서 시련과 유혹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련과 유혹을 이겨내는 사람은 복이 있어 마침내 생명의 면류관을 누릴 것이이라 말합니다. 야고보서가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신앙의 어떤 경향을 문제시하며 그에 대한 하나의 대안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 의도는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 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또 스스로 아무도 시험하시도 않으십니다.” 이 말씀은 접하면 어떤 상황이 연상됩니까? 초기 교회의 상황은 잘 몰라 연상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늘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독교인들의 태도가 쉽게 연상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고 스스로는 책임으로부터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의 태도를 곧바로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오늘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초기 교회에서, 그리고 이미 구약의 시대부터 만연되어 있는 하나의 종교적 태도였습니다.
야고보는 어떤 시험을 겪고 있을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시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서 하나님의 본성이라고 할까요, 일종의 신론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시험을 당하는 분도 아니거니와 누구를 시험하지도 않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야고보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시험이 어디에서 비롯되느냐는 문제에 답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자기에게 돌려야 할 일을 하나님에게 돌리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안에서 비롯되고 자기가 책임져야 할 일을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돌리고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여기서 유명한 명제로 회자되는 말씀을 선포합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표현은 사람 안의 욕심을 마치 하나의 인격적 실체로서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그것에 이끌리기도 하고 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냥 욕심이 생겨 사람이 잘못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욕심이라는 놈이 사람을 이끌고 꾀기도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진정한 자아와 대립되어 있는 어떤 속성을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 본성이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아에 맞서는 욕심이 사람을 괴롭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결국 죄에 빠트리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여기서 죽음은 육체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나 산 것 같지 않은 삶을 말합니다.
그 욕심에 넘어가지 않은 삶을 권면하는 야고보 기자는 긍정적인 언어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다음 주제로 넘어갑니다. “나의 사랑하는 신도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사람을 괴롭히는 한 속성을 하나님이 심어준 본성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말씀에서 야고보의 기자는 마지막으로 온전한 하나님에 대해 최고의 긍정적인 언어로 하나님에 관해 말합니다. 이러니까 속지 말라는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는 셈입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인데, 곧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변하는 것이나 움직이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뜻을 정하여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 주셔서, 우리를 피조물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심오한 이야기입니다만, 하나님이 사람 하나 두고 시험이나 거는 째째한 분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본문말씀을 그대로 따라 새기자면 하나님께서 좋은 선물과 완전한 은사를 주셨고, 진리의 말씀으로 낳아 주셨으니, 그 진실을 새기라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연상시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참된 자아요, 참된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함에 상응하는 인간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말씀은 욕심에 꾀여 죽음에 이를 것이냐 진정한 삶을 누릴 것이냐 선택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줍잖은 핑계를 대면서 엉뚱한 길로 빠지지 말고 진정한 삶을 누리는 길을 선택하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그것이 마땅한 길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말씀은 적극적인 삶의 의지를 강조한 것이요, 적극적인 삶의 대안을 찾아나서라는 것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의 삶에서 뜻하는 바가 과연 무엇일까요? 결코 진리일 수 없는 것을 진리로 착각하고 꾐에 빠져드는 모든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라는 것을 뜻합니다.
지난 주간 학교가 개강했는데, 신학대학원 <경제윤리> 첫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현대 주류 경제학의 가장 큰 문제가 경제적 법칙을 불가항력적인 자연법칙으로 간주할 뿐 아니라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인간의 동기를 전적으로 이기적이라고 확고하게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라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경제윤리는 그 신화에 대해 의심하고 나아가 진정으로 경제의 원래 목적대로 인간 삶에 기여하는 대안이 무엇인지 찾아보자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제가 이 시간에 재삼 강조하고 싶은, 한갓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형성된 인간의 이기적 속성을 만고불변의 인간 본성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는 태도를 믿음이 신실하다고 칭찬하지 않고 오히려 잘못된 것이라 질책하고 있는 오늘 본문말씀의 뜻은, 인간이 그런 잘못된 신화에 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잘못된 신화에 대한 믿음은 갖가지 형태로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철도를 민영화해야 하고, 의료법인을 영리법인화 해야 질 좋은 서비스가 이뤄진다는 엉터리 주장도 그 잘못된 신화에 대한 믿음에 기초해 있습니다. 철의 여인이라 불린 대처도 그것만큼은 손대지 못했던 일인데, 이 나라에서는 그것부터 손대고자 하는 잘못된 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 신화를 타파해라, 결코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닌데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믿는 잘못된 믿음을 버려라,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 무엇인지 깨닫고 스스로 감당해야 할 책임을 감당해라, 하나님이 그것을 보장해주신다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 주셨다는 오늘 말씀의 의미를 새기며, 우리가 진정한 삶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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