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는 자리 - 빌립보 2:5~11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5-03-29 22:25
조회
9221
2015년 3월 2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아무것도 없는 자리
본문: 빌립보 2:5~11
오늘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잎을 들고 환영했다고 해서 종려주일이라 부릅니다. 오늘이 지나 내일부터 부활주일 직전까지 이어지는 고난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절정기에 해당합니다. 흔히 삶의 절정기라고 하면 가장 화려한 어떤 시점을 일컫지만, 그런 의미에서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장 잘 응축하여 보여주는 시기에 해당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신 까닭을 보여 주고 있는 마지막 삶의 절정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빌립보서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와 그 뜻을 따르는 것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찬가입니다.
진정한 신학자요 동시에 목회자였던 사도 바울의 서신은 한결같이 논쟁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확신과 그것을 온전히 지켜내기 위한 열정에서 비롯됩니다. 빌립보서 역시 예외없이 논쟁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3장의 서두를 보면 매우 심한 말로 유대주의자들을 공격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합니다.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악한 일꾼들을 조심하십시오.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3:2)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서는 전반적으로, 진정으로 위로를 받는 삶이 무엇인지, 기쁨을 누리는 삶이 무엇인지 금방 느낄 수 있는 기조로 일관합니다. 말하자면, 바울의 서신 가운데 갈라디아서 같은 책이 마치 ‘날선 검’과 같은 책이라면 빌립보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따뜻한 ‘위로의 손길’과도 같은 책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지켜내기 위한 예리한 신학자로서 면모를 갖고 있음과 동시에 교회 구성원들의 하나 됨을 이루기 위해 섬세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목회자로서 면모를 동시에 갖고 있는데, 빌립보서는 그 목회자로서 바울의 진면목을 잘 읽어낼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최초의 이방지역 교회로서 빌립보교회에서 아주 짧은 기간이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사도 바울의 선교활동을 물심양면으로 뒷받침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각별하게 뒷받침을 해준 빌립보교회이기에 아무래도 그 교우들에게 전하는 서신의 내용이 더욱 각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서두에서부터 말미에 이르기까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일관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인 그리스도의 찬가가 등장하는 대목은, 빌립보교회 안에 모종의 문제가 있는 상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빌립보교회 안에도 다소간 분쟁과 불화가 일어난 것을 전해 듣고, 바울은 그에 대해 염려하며 진정으로 하나 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그리스도의 찬가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앞부분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투쟁에서 교회의 일심협력을 말했다면, 이 대목에서는 그 일심협력을 위해서 공동체 성원간의 화목을 강조합니다. 공동체 성원간의 화목을 위한 구체적인 덕목으로 바울은 네 가지를 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 사랑의 위로, 영의 교제, 자비와 동정심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은 그리스도인의 근본적 지향점을 일깨우는 것을 말하고, 사랑의 위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과 상통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친밀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영의 교제, 그리고 자비와 동정은 상호간의 수평적 관계를 규정하는 덕목입니다. 이 권면은 빌립보 공동체에 그 덕목들이 빈약해서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심정에서 비롯되는 권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질책이라기보다는 격려에 해당한다는 것은 계속 이어지는 밝은 권면에서도 드러납니다.
이어지는 권면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고, 한 마음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같은 생각은 바울이 올바른 인간관계를 말하고자 할 때 빈번하게 사용하는 말로써(1:7; 롬 12:3,16; 15:5), 이어지는 말들은 같은 의미를 되풀이해서 강조하는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권면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툼(저열한 마음, 시기심)이나 허영(자기과시, 자랑)이 아닌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겸손을 중요한 덕목으로 제시함으로써 그리스적 가치관을 전도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바울만의 고유한 가치전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치전도는 겸손에 대한 그리스 세계와 유대교적 세계의 이해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그리스적 세계에서 겸손은 저열한 마음, 노예근성, 비굴함의 의미로 통용된 반면 유대교의 세계에서는 선한 공동체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유대교 세계에서는 그것은 진리, 사랑의 결속과 함께 중요한 덕목으로 인정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겸손의 덕목을 그리스도의 본질과 결부시켜 더더욱 격상시킵니다. 또한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남의 일도 돌보라는 권면은 사도 바울이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고전 13:5)을 그대로 연상시킵니다.
이상과 같은 구체적인 권면은 여전히 질책이라기보다는 격려에 가깝지만, 빌립보 공동체 안에 있는 모종의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어떤 경쟁심 같은 것이 있었을 수 있고(4:2 참조), 전반적인 격려의 논조 가운데서도 그에 대해 분명히 경계하는 권면을 해야 할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통상 좋은 지도자와 회중 사이에서 권면은 오히려 특별히 귀담아 수용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특별할 게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경우라면 일반적인 교훈이나 권면의 성격을 벗어나 모종의 사태를 적시하는 권면이 필요합니다. 이 권면은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게 빌립보 공동체의 성원들에게 권면한 바울은 그 권면의 근거로 아마도 초대교회에서 널리 통용된 것으로 보이는 ‘그리스도의 찬가’를 제시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낫게 여김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은 단순한 윤리적 권면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곧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문맥상 그리스도의 찬가는 겸손한 태도의 모범으로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여기에 제시되는 그리스도의 찬가는 단순한 인격의 모범으로서 그리스도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리스도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찬가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의미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간결하고도 함축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격의 모범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역사로서 받아들여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곧 그리스도의 찬가 전반부는 철저하게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강조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본래 하나님의 모습을 지녔지만,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여 사람과 똑같이 되셨습니다. 그가 자기를 낮춘 것은 마침내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까지 철저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히 자기를 비워버렸습니다.
완전히 자기를 낮추고 완전히 자기를 비워버린 그리스도를 말할 때, 그것은 윤리적 권면 이상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앞서 말하고 있듯이 남을 먼저 생각하라든지, 겸손하라든지 하는 식으로 구체적으로 행할 수 있는 윤리적 덕목으로 구체화해서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불가피하기는 하지만, 그 말의 진정한 뜻은 그 이상의 근본적인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완전히 가치를 전환하라는 이야기이고, 철저하게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삶을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9절 이하에서 이와 같은 삶에 대역전이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와 같이 사셨기 때문에, 다시 말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까지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셨기 때문에, 이제 거꾸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찬미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 반전의 대목에서부터는 주어가 바뀝니다. 앞부분에서는 그리스도가 주체가 되었다면 이 부분에서는 하나님이 주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높이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었을 뿐 아니라 하늘과 땅위와 땅아래 있는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 예수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부르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된다는 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주권자들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세상 주권의 완전한 변화를 뜻합니다. 이것은 나를 버리고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써 마침내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새로운 세계를 살게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노예화했던 주권자들이 굴복하고 그리스도가 진정한 주권자가 될 때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비로소 진정한 삶을 누린다는 의미입니다. 부정과 긍정의 역설적인 통합의 경지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유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초기교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그리스도의 찬가를 사도 바울이 재삼 언급하였을 때,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우들이 그 찬가의 의미를 제대로 새길 수 있다면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거뜬히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말씀을 한 주간 내내 깊이 묵상했습니다. 완전히 자기를 비워버림으로써 오히려 세상의 진정한 주권자가 되고 영광을 누리게 된 그리스도의 의미, 그것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삶의 근거요, 교회공동체의 진정한 근거입니다. 그 근거가 사라진다면, 다시 말해 그 근거 위에 서는 그리스도인 각자의 삶, 공동체의 삶이 이뤄질 수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존재도 교회의 존재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 그리고 그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으로서 교회공동체가 그야말로 순결하게 그 정신을 구현할 수 있느냐 하는 물음 앞에서 우리는 감히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저는 이 점에서 좀 냉정한 현실적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제 책(『한국 기독교의 두 갈래 길』)에서도 말했지만, 현실의 세계질서에 대한 분명한 하나의 대안이지만 동시에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교회공동체는 기껏해야 상대적인 의미만을 지닌 대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늘 아래 새것이 없다고, 지금 이 땅위에 있는 교회들은 아무리 고상한 정신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기껏해야 이 세상의 질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 그러니 도저히 우리는 그것을 따라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표징 정도로서 의미를 지닐지 모릅니다.
겨우 그런 정도의 의미밖에 지니지 못하는 교회공동체를 위하여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시간과 물질을 바쳐 헌신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겨우 세상의 질서에 문제가 있다는 경고등을 반짝이는 정도에 지나지 않을 뿐, 그리스도의 찬가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극적인 변화라고는 도대체 그 낌새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교회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필요가 있을까요?
목사가 회중 앞에서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이 약이 될지 독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물음을 던졌으니 저 나름대로의 답은 제시하는 것이 예의라 생각하여, 성급히 답하면 저는 그나마 경고등 역할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상하고 숭고한 정신을 따르고자 해도 현실은 녹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안살림교회가 아무리 대안적인 이상을 추구한다 해도 엄연히 교회 자체가, 그리고 이 교회를 구성하는 지체들 하나하나가 모두 현실의 압도적 영향하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런 만큼 우리의 마음은 절박하고 급할지 모르지만 실제 변화는 그렇게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 각자, 그리고 교회공동체의 근거를 끊임없이 환기하며 나아갈 수 있고, 그것으로 세상의 경고등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렇게 허망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며칠 전 신문에 각 나라의 행복지수에 관한 보도가 나왔지만, 우리의 삶이 그렇게 처참하게 망가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우리의 삶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가운데 있다는 것을 믿고 나아갈 수 있다면, 그래도 희망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십보소백보라고 말하지만, 현실의 상대적인 세계에서는 그 50보의 차이도 소중한 것입니다. 윤리란 사실 그 상대적 차이, 상대적 선함을 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 상대적 차이를 무시해버린다면 현실에서 어떤 변화도 이뤄내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교회가 그 차이만이라도 인식하고 실현할 수 있다면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것은 궁극적인 푯대를 상실하지 않을 때, 진정한 기초가 붕괴되지 않을 때 그나마 가능한 것입니다.
그나마 그렇게 의의를 둘 만한 것일지언정, 의의가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위해 헌신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기껏 정도뿐이기에 우리의 교회는 그저 또 하나의 인간관계일 뿐인 것으로 언제든 걷어치울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까요?
정말 약이 될지 독이 될지 모르는 소리를 한마디만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저는 저의 목회에 대해 깊은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백하고 있듯이, 목회할 줄 몰랐는데 목회를 하게 되었고, 교회를 개척할 줄 몰랐는데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고, 교회당 건축을 하게 될 줄 몰랐는데 교회당 건축을 하게 된 것을 매우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 왔습니다. 그것은 내 계획대로가 아니라 예기치 않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계기, 곧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된 계기라 느꼈기에 그 과정이 저의 삶에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때마다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감당하는 것, 그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새 저 자신의 삶의 여정을 깊이 돌아보면서, 목회를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목회를 하고, 감히 교회개척을 할 수 없는 사람이 개척을 하고, 교회당을 지을 수 없는데 짓겠다고 나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그냥 한 길로 공부만 하던지, 아니면 기성교회에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신비에 싸인 목회자로서 그럭저럭 몫을 감당하면 족한 것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정말 깜냥이 안 되는데, 마지못해 감당하기 힘든 일을 맡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머리로 이치를 따지고 그런 눈으로 성서를 새롭게 보는 데는 눈꼽만큼 성과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마음으로 하나 되는 길은 터득하지도 못하고 교회 안에서 구현하지도 못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실토를 하는 것은, 정말 목회자로서 저의 몫을 되돌아보기 위함이며, 여러분과 더불어 길을 찾기 위함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말씀을 특히 깊이 묵상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아무것도 없는 자리, 바로 그 자리에 서라!” 바로 그러한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고난주간을 앞둔 주일 아침, 그것이 저에게 다가온 말씀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또 다시 자기정당화의 논리로 둔갑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기를 돌아보는 근거, 서로를 바라보는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자리에 서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각자의 몫, 그리고 우리 교회공동체의 몫을 다시 생각하는 우리들, 그 마음으로 하나 되는 이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제목: 아무것도 없는 자리
본문: 빌립보 2:5~11
오늘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잎을 들고 환영했다고 해서 종려주일이라 부릅니다. 오늘이 지나 내일부터 부활주일 직전까지 이어지는 고난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절정기에 해당합니다. 흔히 삶의 절정기라고 하면 가장 화려한 어떤 시점을 일컫지만, 그런 의미에서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장 잘 응축하여 보여주는 시기에 해당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신 까닭을 보여 주고 있는 마지막 삶의 절정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빌립보서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와 그 뜻을 따르는 것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찬가입니다.
진정한 신학자요 동시에 목회자였던 사도 바울의 서신은 한결같이 논쟁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확신과 그것을 온전히 지켜내기 위한 열정에서 비롯됩니다. 빌립보서 역시 예외없이 논쟁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3장의 서두를 보면 매우 심한 말로 유대주의자들을 공격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합니다.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악한 일꾼들을 조심하십시오.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3:2)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서는 전반적으로, 진정으로 위로를 받는 삶이 무엇인지, 기쁨을 누리는 삶이 무엇인지 금방 느낄 수 있는 기조로 일관합니다. 말하자면, 바울의 서신 가운데 갈라디아서 같은 책이 마치 ‘날선 검’과 같은 책이라면 빌립보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따뜻한 ‘위로의 손길’과도 같은 책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지켜내기 위한 예리한 신학자로서 면모를 갖고 있음과 동시에 교회 구성원들의 하나 됨을 이루기 위해 섬세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목회자로서 면모를 동시에 갖고 있는데, 빌립보서는 그 목회자로서 바울의 진면목을 잘 읽어낼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최초의 이방지역 교회로서 빌립보교회에서 아주 짧은 기간이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사도 바울의 선교활동을 물심양면으로 뒷받침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각별하게 뒷받침을 해준 빌립보교회이기에 아무래도 그 교우들에게 전하는 서신의 내용이 더욱 각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서두에서부터 말미에 이르기까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일관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인 그리스도의 찬가가 등장하는 대목은, 빌립보교회 안에 모종의 문제가 있는 상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빌립보교회 안에도 다소간 분쟁과 불화가 일어난 것을 전해 듣고, 바울은 그에 대해 염려하며 진정으로 하나 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그리스도의 찬가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앞부분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투쟁에서 교회의 일심협력을 말했다면, 이 대목에서는 그 일심협력을 위해서 공동체 성원간의 화목을 강조합니다. 공동체 성원간의 화목을 위한 구체적인 덕목으로 바울은 네 가지를 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 사랑의 위로, 영의 교제, 자비와 동정심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은 그리스도인의 근본적 지향점을 일깨우는 것을 말하고, 사랑의 위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과 상통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친밀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영의 교제, 그리고 자비와 동정은 상호간의 수평적 관계를 규정하는 덕목입니다. 이 권면은 빌립보 공동체에 그 덕목들이 빈약해서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심정에서 비롯되는 권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질책이라기보다는 격려에 해당한다는 것은 계속 이어지는 밝은 권면에서도 드러납니다.
이어지는 권면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고, 한 마음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같은 생각은 바울이 올바른 인간관계를 말하고자 할 때 빈번하게 사용하는 말로써(1:7; 롬 12:3,16; 15:5), 이어지는 말들은 같은 의미를 되풀이해서 강조하는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권면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툼(저열한 마음, 시기심)이나 허영(자기과시, 자랑)이 아닌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겸손을 중요한 덕목으로 제시함으로써 그리스적 가치관을 전도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바울만의 고유한 가치전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치전도는 겸손에 대한 그리스 세계와 유대교적 세계의 이해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그리스적 세계에서 겸손은 저열한 마음, 노예근성, 비굴함의 의미로 통용된 반면 유대교의 세계에서는 선한 공동체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유대교 세계에서는 그것은 진리, 사랑의 결속과 함께 중요한 덕목으로 인정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겸손의 덕목을 그리스도의 본질과 결부시켜 더더욱 격상시킵니다. 또한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남의 일도 돌보라는 권면은 사도 바울이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고전 13:5)을 그대로 연상시킵니다.
이상과 같은 구체적인 권면은 여전히 질책이라기보다는 격려에 가깝지만, 빌립보 공동체 안에 있는 모종의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어떤 경쟁심 같은 것이 있었을 수 있고(4:2 참조), 전반적인 격려의 논조 가운데서도 그에 대해 분명히 경계하는 권면을 해야 할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통상 좋은 지도자와 회중 사이에서 권면은 오히려 특별히 귀담아 수용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특별할 게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경우라면 일반적인 교훈이나 권면의 성격을 벗어나 모종의 사태를 적시하는 권면이 필요합니다. 이 권면은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게 빌립보 공동체의 성원들에게 권면한 바울은 그 권면의 근거로 아마도 초대교회에서 널리 통용된 것으로 보이는 ‘그리스도의 찬가’를 제시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낫게 여김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은 단순한 윤리적 권면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곧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문맥상 그리스도의 찬가는 겸손한 태도의 모범으로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여기에 제시되는 그리스도의 찬가는 단순한 인격의 모범으로서 그리스도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리스도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찬가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의미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간결하고도 함축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격의 모범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역사로서 받아들여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곧 그리스도의 찬가 전반부는 철저하게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강조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본래 하나님의 모습을 지녔지만,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여 사람과 똑같이 되셨습니다. 그가 자기를 낮춘 것은 마침내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까지 철저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히 자기를 비워버렸습니다.
완전히 자기를 낮추고 완전히 자기를 비워버린 그리스도를 말할 때, 그것은 윤리적 권면 이상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앞서 말하고 있듯이 남을 먼저 생각하라든지, 겸손하라든지 하는 식으로 구체적으로 행할 수 있는 윤리적 덕목으로 구체화해서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불가피하기는 하지만, 그 말의 진정한 뜻은 그 이상의 근본적인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완전히 가치를 전환하라는 이야기이고, 철저하게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삶을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9절 이하에서 이와 같은 삶에 대역전이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와 같이 사셨기 때문에, 다시 말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까지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셨기 때문에, 이제 거꾸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찬미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 반전의 대목에서부터는 주어가 바뀝니다. 앞부분에서는 그리스도가 주체가 되었다면 이 부분에서는 하나님이 주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높이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었을 뿐 아니라 하늘과 땅위와 땅아래 있는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 예수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부르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된다는 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주권자들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세상 주권의 완전한 변화를 뜻합니다. 이것은 나를 버리고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써 마침내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새로운 세계를 살게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노예화했던 주권자들이 굴복하고 그리스도가 진정한 주권자가 될 때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비로소 진정한 삶을 누린다는 의미입니다. 부정과 긍정의 역설적인 통합의 경지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유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초기교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그리스도의 찬가를 사도 바울이 재삼 언급하였을 때,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우들이 그 찬가의 의미를 제대로 새길 수 있다면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거뜬히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말씀을 한 주간 내내 깊이 묵상했습니다. 완전히 자기를 비워버림으로써 오히려 세상의 진정한 주권자가 되고 영광을 누리게 된 그리스도의 의미, 그것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삶의 근거요, 교회공동체의 진정한 근거입니다. 그 근거가 사라진다면, 다시 말해 그 근거 위에 서는 그리스도인 각자의 삶, 공동체의 삶이 이뤄질 수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존재도 교회의 존재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 그리고 그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으로서 교회공동체가 그야말로 순결하게 그 정신을 구현할 수 있느냐 하는 물음 앞에서 우리는 감히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저는 이 점에서 좀 냉정한 현실적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제 책(『한국 기독교의 두 갈래 길』)에서도 말했지만, 현실의 세계질서에 대한 분명한 하나의 대안이지만 동시에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교회공동체는 기껏해야 상대적인 의미만을 지닌 대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늘 아래 새것이 없다고, 지금 이 땅위에 있는 교회들은 아무리 고상한 정신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기껏해야 이 세상의 질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 그러니 도저히 우리는 그것을 따라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표징 정도로서 의미를 지닐지 모릅니다.
겨우 그런 정도의 의미밖에 지니지 못하는 교회공동체를 위하여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시간과 물질을 바쳐 헌신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겨우 세상의 질서에 문제가 있다는 경고등을 반짝이는 정도에 지나지 않을 뿐, 그리스도의 찬가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극적인 변화라고는 도대체 그 낌새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교회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필요가 있을까요?
목사가 회중 앞에서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이 약이 될지 독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물음을 던졌으니 저 나름대로의 답은 제시하는 것이 예의라 생각하여, 성급히 답하면 저는 그나마 경고등 역할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상하고 숭고한 정신을 따르고자 해도 현실은 녹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안살림교회가 아무리 대안적인 이상을 추구한다 해도 엄연히 교회 자체가, 그리고 이 교회를 구성하는 지체들 하나하나가 모두 현실의 압도적 영향하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런 만큼 우리의 마음은 절박하고 급할지 모르지만 실제 변화는 그렇게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 각자, 그리고 교회공동체의 근거를 끊임없이 환기하며 나아갈 수 있고, 그것으로 세상의 경고등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렇게 허망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며칠 전 신문에 각 나라의 행복지수에 관한 보도가 나왔지만, 우리의 삶이 그렇게 처참하게 망가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우리의 삶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가운데 있다는 것을 믿고 나아갈 수 있다면, 그래도 희망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십보소백보라고 말하지만, 현실의 상대적인 세계에서는 그 50보의 차이도 소중한 것입니다. 윤리란 사실 그 상대적 차이, 상대적 선함을 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 상대적 차이를 무시해버린다면 현실에서 어떤 변화도 이뤄내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교회가 그 차이만이라도 인식하고 실현할 수 있다면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것은 궁극적인 푯대를 상실하지 않을 때, 진정한 기초가 붕괴되지 않을 때 그나마 가능한 것입니다.
그나마 그렇게 의의를 둘 만한 것일지언정, 의의가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위해 헌신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기껏 정도뿐이기에 우리의 교회는 그저 또 하나의 인간관계일 뿐인 것으로 언제든 걷어치울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까요?
정말 약이 될지 독이 될지 모르는 소리를 한마디만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저는 저의 목회에 대해 깊은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백하고 있듯이, 목회할 줄 몰랐는데 목회를 하게 되었고, 교회를 개척할 줄 몰랐는데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고, 교회당 건축을 하게 될 줄 몰랐는데 교회당 건축을 하게 된 것을 매우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 왔습니다. 그것은 내 계획대로가 아니라 예기치 않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계기, 곧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된 계기라 느꼈기에 그 과정이 저의 삶에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때마다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감당하는 것, 그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새 저 자신의 삶의 여정을 깊이 돌아보면서, 목회를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목회를 하고, 감히 교회개척을 할 수 없는 사람이 개척을 하고, 교회당을 지을 수 없는데 짓겠다고 나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그냥 한 길로 공부만 하던지, 아니면 기성교회에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신비에 싸인 목회자로서 그럭저럭 몫을 감당하면 족한 것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정말 깜냥이 안 되는데, 마지못해 감당하기 힘든 일을 맡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머리로 이치를 따지고 그런 눈으로 성서를 새롭게 보는 데는 눈꼽만큼 성과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마음으로 하나 되는 길은 터득하지도 못하고 교회 안에서 구현하지도 못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실토를 하는 것은, 정말 목회자로서 저의 몫을 되돌아보기 위함이며, 여러분과 더불어 길을 찾기 위함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말씀을 특히 깊이 묵상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아무것도 없는 자리, 바로 그 자리에 서라!” 바로 그러한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고난주간을 앞둔 주일 아침, 그것이 저에게 다가온 말씀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또 다시 자기정당화의 논리로 둔갑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기를 돌아보는 근거, 서로를 바라보는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자리에 서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각자의 몫, 그리고 우리 교회공동체의 몫을 다시 생각하는 우리들, 그 마음으로 하나 되는 이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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