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잔치를 누리려면 - 누가복음 14:15~24[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5-06-14 14:50
조회
9185
2015년 6월 1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하나님 나라 잔치를 누리려면
본문: 누가복음 14:15~24
우리 교회에서는 매 주일 교회에서 밥을 함께 나눕니다. 교회에서 나누는 공동식사는 그저 때가 되었으니 한 끼 때우는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갖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재현하는 것인 동시에 우리 신앙의 중요한 한 내용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함께 나누는 밥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삶을 사시는 동안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했던 일을 기억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징적인 의미만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밥상을 함께 하면서 실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눕니다. 그 시간은 지난 한 주간의 일들을 함께 나누기도 하고, 당면하고 있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함께 생각을 나누기도 하고, 여러 가지 개인적인 일들을 함께 나누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용기와 격려를 얻습니다.
오늘 우리는 잔치자리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읽었습니다. 마태복음(22:1~10)에도 동시에 전해지고 있는 이 비유는 세부적인 내용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큰 줄거리에서 공통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누가복음 본문이기에 누가복음의 본문을 따라 그 의미를 헤아리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먼저 잔치에 초대를 하고 드디어 예정한 날에 그 초대한 사람들을 맞을 준비를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잔치 시간이 되어 주인은 초대 받은 사람들에게 종을 보내 모셔오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로마나 유대 사회에서 매우 정중한 예법에 해당합니다. 잔치에 초대했을 경우에는 잔치시간에 맞춰 손님을 모셔오는 것이 마땅하고 정중한 예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핑계를 대기 시작했습니다. 잔치를 베푼 사람은 정중하게 예를 갖추고 있는데,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무례를 범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밭을 샀다는 것이 핑계였습니다. 밭을 산 것이 잔치에 참석하지 못할 이유가 된다면, 아마도 밭을 나소 난 후 법적 처리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시험하러 가야 한다는 핑계였습니다. 겨리란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쟁기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다섯 쌍의 소를 샀다는 것은 상당한 부농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 막 소를 샀으니 마음이 급했을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막 장가를 가서 갈 수 없다는 핑계를 댔습니다. 이건 좀 납득하기 어렵지만, 막 결혼한 사람이 어딘가 돌아다녀야 할 처지는 아니라는 것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사업과 가사라고 할까요? 어쨌든 자신이 가진 것 때문에 초청에 응하지 못하는 사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 펼쳐지자 잔치를 베푼 주인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종을 시켜 예정에 없던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합니다.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들을 초대하여 자리를 채우고 났는데도 자리가 비었습니다. 이번에는 큰 길과 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성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불러 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맺습니다. “초대를 받은 사람 가운데서는, 아무도 나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과연 이 비유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비유란 원래 매우 간결한 함축적인 의미를 던져주는 이야기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도 애초 매우 단순한고 간결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우리가 비유를 대할 때 어려운 점은, 오늘날 성서에 기록된 비유의 내용이 예수님의 시대를 지나 초대교회의 시대로 옮겨져 해석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단순한 의미를 지닌 이야기가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는 다른 종류의 이야기로 바뀐 것입니다. 이 비유 역시 그와 같은 변형의 흔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본래 이 비유의 골자가 뭘까요? ‘어떤 사람이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초대했다. 그러나 먼저 초대 받은 사람은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 자기 일로 바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아무나 잔치자리에 오게 하여 성대하게 잔치를 베풀었다.’ 이 비유의 본래 골자는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을 통해 증거된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비유한 것입니다.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 나라는 잔치자리로 비유됩니다. 잔치자리는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요 동시에 실제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기쁨의 잔치, 기쁨의 축제입니다. 예수께서는 실제 당신의 삶으로 그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께서 증거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데서 각기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이 비유에서는 아주 단순한 두 가지 사실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한편의 사람들은 잔치 자리에 초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초대에 응하지 않은 반면, 또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애초 초대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그 잔치 자리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냈을까요? 아니 이렇게 서로 다른 태도를 보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비유에서는 초대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은 밭을 사놓고 그 소유권을 확정하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 소를 사놓고 밭에 가서 일을 해야 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안락한 가정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뭔가 자기 소유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기 일이 바쁜 사람들입니다. 처음에 초대를 받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잔치자리를 누리게 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성 밖에서 초대된 사람들 역시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 아니면 더 어려운 조건에 있는 사람들이었을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도저히 잔치자리에 초대받기가 어려우리라 예상되는 사람들입니다.
이 비유의 상황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실 때 유대 사회 지도층들은 예수를 배척한 반면 가난하고 천대받는 민중들은 예수의 초대에 적극 응한 사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한편의 사람들은 축제에 응하지 않고 한편의 사람들은 축제에 응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동의 여부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그야말로 잔치의 삶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기쁨의 축제를 누리고 형제자매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나누는 삶입니다. 이 삶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 삶의 진정성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 삶이 진지해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항상 엄숙하고 심각한 일에 매여 있습니다. 잔치에 가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들로 늘 분주한 사람들입니다. 잔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 잔치자리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어떤 일보다 기쁨을 누리는 일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기존의 질서 안에서 주어진 일을 맡는 것보다는 전혀 새로운 삶의 환경에서 직접적인 형제자매애를 나누는 것을 진정한 기쁨으로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실상을 전하며 지금 완고한 지도자들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고 있는 이 이야기를 보면 대개 그 의미를 그렇게 알 수 있습니다. 애초 초대받은 사람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초대받고도 정작 잔치 상이 준비되었을 때 핑계를 대고 거부했으니 그 사람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금방 알 수 있다는 것은,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 이 이야기를 듣는 청중이 곧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와 자신을 일치시키게 될 것인지 또한 금방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가난한 사람들과 일치시키며 안도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와 병행하는 이야기가 도마복음 64절에도 나오는데, 그 이야기는 훨씬 간결합니다.
64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손님들을 위해 잔치를 준비했습니다. 잔치가 준비되자 주인은 종을 보내 손님들을 초청했습니다. 종은 처음 사람에게 가서 ‘제 주인이 손님을 초청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 손님이 말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 몇이 내게 빚을 졌는데, 그들이 오늘 저녁에 오기로 하여 그들에게 할 이야기가 있기에 가봐야 하네. 부디 저녁 초대에 응하지 못하는 실례를 용서하게.’ 종은 다른 손님에게 가서 ‘제 주인이 손님을 초청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손님은 말했습니다. ‘내가 집을 사서 하루 종일 나가 있기에 시간이 없네.’ 종은 또 다른 손님에게 가서 ‘제 주인이 손님을 초청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손님이 말했습니다. ‘내 친구가 결혼하게 되어 내가 피로연을 준비해야 하기에 갈 수가 없네. 부디 저녁 초대에 응하지 못하는 실례를 용서하게.’ 종은 다른 손님에게 가서 ‘제 주인이 손님을 초청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손님은 말했습니다. ‘나는 밭을 샀는데 세를 받으러 가야 하기에 갈 수가 없네. 부디 저녁 초대에 응하지 못하는 실례를 용서하게.’ 그 종은 돌아가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주인께서 잔치에 초청한 사람들이 모두 초대에 응하지 못하는 실례를 용서해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말했습니다. ‘길거리에 나가서 네가 보는 사람은 모두 데리고 와서 내 잔치에서 먹게 하라.’ 장사하는 사람들[거래인들]과 상인들은 아버지의 곳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줄거리상 다른 복음서의 내용과 비슷한 것 같지만 상황설정과 주인공에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어떤 사람이 미리 잔치 초대를 하였으나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이에 응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고, 마태복음 역시 그 상황 설정은 유사하나 잔치초대의 주체가 어떤 임금으로 되어 있고, 더욱이 나중에 초대를 받은 사람 가운데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쫓겨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도마복음의 이야기는 군더더기가 없이 간결합니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다른 병행구들이 미리 초대를 받고도 응하지 않은 무례한 사람들을 말하는 데 반해 도마복음은 어느 날 갑자기 잔치를 벌여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마태나 누가의 병행구에서는 초대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이 비난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으나 도마복음에서는 상식적으로 볼 때 초대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비난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비유의 본래적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잔치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일상적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로 저마다 사연이 있어 갑작스러운 초청에 응할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초청대상들이 흥미롭습니다. 이들은 말미에 거래인들[사업가]과 상인들로 일컬어지는데, 구체적으로 사채업자, 부동산재테크로 한몫 본 사람, 웨딩홀사장, 농장지주 등입니다. 사회적으로 부를 축적하여 많은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충분한 교양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이들의 약속위반 또는 무례함을 질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성실하게 일상적인 삶을 누리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비유의 결론은, 바로 그들의 그러한 삶이 ‘아버지의 곳’, 곧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이들은 잔치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정당한 이유가 있는데도, 바로 그런 태도가 바로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일상적 삶에 성실하지만 멈춰 서서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삶의 실상을 꼬집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삶의 잔치, 진정한 진리의 깨달음과는 먼 사람들의 실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 예수운동에 무심했던 이들의 상황입니다.
마태와 누가의 이야기가 예수님 이후의 선교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면, 도마의 이 이야기는 예수님 당시의 상황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유대의 지도자’가 문제라고 딱 지정하기보다는 일상의 삶에 성실하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실상을 이야기하려는 뜻을 지닌 것입니다. 누구나가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게끔 깨우침을 주는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본래 이 비유의 의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 비유의 말씀은, 일상의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모두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도록 촉구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나의 일상의 분주함 때문에, 나의 그 일상의 삶을 지탱시켜주는 중요한 그 어떤 것 때문에 정말 망각하고 사는 것은 없는가 하는 것을, 새삼 생각하도록 오늘 말씀은 우리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바로 그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새김으로써, 우리의 일상의 삶을 진정으로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하나님 나라의 실제, 그것을 망각하지 않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하며, 그것이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제목: 하나님 나라 잔치를 누리려면
본문: 누가복음 14:15~24
우리 교회에서는 매 주일 교회에서 밥을 함께 나눕니다. 교회에서 나누는 공동식사는 그저 때가 되었으니 한 끼 때우는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갖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재현하는 것인 동시에 우리 신앙의 중요한 한 내용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함께 나누는 밥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삶을 사시는 동안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했던 일을 기억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징적인 의미만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밥상을 함께 하면서 실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눕니다. 그 시간은 지난 한 주간의 일들을 함께 나누기도 하고, 당면하고 있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함께 생각을 나누기도 하고, 여러 가지 개인적인 일들을 함께 나누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용기와 격려를 얻습니다.
오늘 우리는 잔치자리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읽었습니다. 마태복음(22:1~10)에도 동시에 전해지고 있는 이 비유는 세부적인 내용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큰 줄거리에서 공통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누가복음 본문이기에 누가복음의 본문을 따라 그 의미를 헤아리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먼저 잔치에 초대를 하고 드디어 예정한 날에 그 초대한 사람들을 맞을 준비를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잔치 시간이 되어 주인은 초대 받은 사람들에게 종을 보내 모셔오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로마나 유대 사회에서 매우 정중한 예법에 해당합니다. 잔치에 초대했을 경우에는 잔치시간에 맞춰 손님을 모셔오는 것이 마땅하고 정중한 예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핑계를 대기 시작했습니다. 잔치를 베푼 사람은 정중하게 예를 갖추고 있는데,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무례를 범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밭을 샀다는 것이 핑계였습니다. 밭을 산 것이 잔치에 참석하지 못할 이유가 된다면, 아마도 밭을 나소 난 후 법적 처리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시험하러 가야 한다는 핑계였습니다. 겨리란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쟁기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다섯 쌍의 소를 샀다는 것은 상당한 부농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 막 소를 샀으니 마음이 급했을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막 장가를 가서 갈 수 없다는 핑계를 댔습니다. 이건 좀 납득하기 어렵지만, 막 결혼한 사람이 어딘가 돌아다녀야 할 처지는 아니라는 것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사업과 가사라고 할까요? 어쨌든 자신이 가진 것 때문에 초청에 응하지 못하는 사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 펼쳐지자 잔치를 베푼 주인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종을 시켜 예정에 없던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합니다.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들을 초대하여 자리를 채우고 났는데도 자리가 비었습니다. 이번에는 큰 길과 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성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불러 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맺습니다. “초대를 받은 사람 가운데서는, 아무도 나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과연 이 비유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비유란 원래 매우 간결한 함축적인 의미를 던져주는 이야기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도 애초 매우 단순한고 간결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우리가 비유를 대할 때 어려운 점은, 오늘날 성서에 기록된 비유의 내용이 예수님의 시대를 지나 초대교회의 시대로 옮겨져 해석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단순한 의미를 지닌 이야기가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는 다른 종류의 이야기로 바뀐 것입니다. 이 비유 역시 그와 같은 변형의 흔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본래 이 비유의 골자가 뭘까요? ‘어떤 사람이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초대했다. 그러나 먼저 초대 받은 사람은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 자기 일로 바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아무나 잔치자리에 오게 하여 성대하게 잔치를 베풀었다.’ 이 비유의 본래 골자는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을 통해 증거된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비유한 것입니다.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 나라는 잔치자리로 비유됩니다. 잔치자리는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요 동시에 실제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기쁨의 잔치, 기쁨의 축제입니다. 예수께서는 실제 당신의 삶으로 그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께서 증거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데서 각기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이 비유에서는 아주 단순한 두 가지 사실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한편의 사람들은 잔치 자리에 초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초대에 응하지 않은 반면, 또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애초 초대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그 잔치 자리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냈을까요? 아니 이렇게 서로 다른 태도를 보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비유에서는 초대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은 밭을 사놓고 그 소유권을 확정하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 소를 사놓고 밭에 가서 일을 해야 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안락한 가정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뭔가 자기 소유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기 일이 바쁜 사람들입니다. 처음에 초대를 받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잔치자리를 누리게 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성 밖에서 초대된 사람들 역시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 아니면 더 어려운 조건에 있는 사람들이었을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도저히 잔치자리에 초대받기가 어려우리라 예상되는 사람들입니다.
이 비유의 상황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실 때 유대 사회 지도층들은 예수를 배척한 반면 가난하고 천대받는 민중들은 예수의 초대에 적극 응한 사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한편의 사람들은 축제에 응하지 않고 한편의 사람들은 축제에 응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동의 여부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그야말로 잔치의 삶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기쁨의 축제를 누리고 형제자매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나누는 삶입니다. 이 삶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 삶의 진정성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 삶이 진지해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항상 엄숙하고 심각한 일에 매여 있습니다. 잔치에 가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들로 늘 분주한 사람들입니다. 잔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 잔치자리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어떤 일보다 기쁨을 누리는 일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기존의 질서 안에서 주어진 일을 맡는 것보다는 전혀 새로운 삶의 환경에서 직접적인 형제자매애를 나누는 것을 진정한 기쁨으로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실상을 전하며 지금 완고한 지도자들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고 있는 이 이야기를 보면 대개 그 의미를 그렇게 알 수 있습니다. 애초 초대받은 사람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초대받고도 정작 잔치 상이 준비되었을 때 핑계를 대고 거부했으니 그 사람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금방 알 수 있다는 것은,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 이 이야기를 듣는 청중이 곧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와 자신을 일치시키게 될 것인지 또한 금방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가난한 사람들과 일치시키며 안도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와 병행하는 이야기가 도마복음 64절에도 나오는데, 그 이야기는 훨씬 간결합니다.
64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손님들을 위해 잔치를 준비했습니다. 잔치가 준비되자 주인은 종을 보내 손님들을 초청했습니다. 종은 처음 사람에게 가서 ‘제 주인이 손님을 초청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 손님이 말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 몇이 내게 빚을 졌는데, 그들이 오늘 저녁에 오기로 하여 그들에게 할 이야기가 있기에 가봐야 하네. 부디 저녁 초대에 응하지 못하는 실례를 용서하게.’ 종은 다른 손님에게 가서 ‘제 주인이 손님을 초청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손님은 말했습니다. ‘내가 집을 사서 하루 종일 나가 있기에 시간이 없네.’ 종은 또 다른 손님에게 가서 ‘제 주인이 손님을 초청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손님이 말했습니다. ‘내 친구가 결혼하게 되어 내가 피로연을 준비해야 하기에 갈 수가 없네. 부디 저녁 초대에 응하지 못하는 실례를 용서하게.’ 종은 다른 손님에게 가서 ‘제 주인이 손님을 초청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손님은 말했습니다. ‘나는 밭을 샀는데 세를 받으러 가야 하기에 갈 수가 없네. 부디 저녁 초대에 응하지 못하는 실례를 용서하게.’ 그 종은 돌아가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주인께서 잔치에 초청한 사람들이 모두 초대에 응하지 못하는 실례를 용서해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말했습니다. ‘길거리에 나가서 네가 보는 사람은 모두 데리고 와서 내 잔치에서 먹게 하라.’ 장사하는 사람들[거래인들]과 상인들은 아버지의 곳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줄거리상 다른 복음서의 내용과 비슷한 것 같지만 상황설정과 주인공에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어떤 사람이 미리 잔치 초대를 하였으나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이에 응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고, 마태복음 역시 그 상황 설정은 유사하나 잔치초대의 주체가 어떤 임금으로 되어 있고, 더욱이 나중에 초대를 받은 사람 가운데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쫓겨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도마복음의 이야기는 군더더기가 없이 간결합니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다른 병행구들이 미리 초대를 받고도 응하지 않은 무례한 사람들을 말하는 데 반해 도마복음은 어느 날 갑자기 잔치를 벌여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마태나 누가의 병행구에서는 초대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이 비난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으나 도마복음에서는 상식적으로 볼 때 초대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비난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비유의 본래적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잔치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일상적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로 저마다 사연이 있어 갑작스러운 초청에 응할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초청대상들이 흥미롭습니다. 이들은 말미에 거래인들[사업가]과 상인들로 일컬어지는데, 구체적으로 사채업자, 부동산재테크로 한몫 본 사람, 웨딩홀사장, 농장지주 등입니다. 사회적으로 부를 축적하여 많은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충분한 교양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이들의 약속위반 또는 무례함을 질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성실하게 일상적인 삶을 누리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비유의 결론은, 바로 그들의 그러한 삶이 ‘아버지의 곳’, 곧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이들은 잔치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정당한 이유가 있는데도, 바로 그런 태도가 바로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일상적 삶에 성실하지만 멈춰 서서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삶의 실상을 꼬집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삶의 잔치, 진정한 진리의 깨달음과는 먼 사람들의 실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 예수운동에 무심했던 이들의 상황입니다.
마태와 누가의 이야기가 예수님 이후의 선교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면, 도마의 이 이야기는 예수님 당시의 상황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유대의 지도자’가 문제라고 딱 지정하기보다는 일상의 삶에 성실하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실상을 이야기하려는 뜻을 지닌 것입니다. 누구나가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게끔 깨우침을 주는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본래 이 비유의 의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 비유의 말씀은, 일상의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모두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도록 촉구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나의 일상의 분주함 때문에, 나의 그 일상의 삶을 지탱시켜주는 중요한 그 어떤 것 때문에 정말 망각하고 사는 것은 없는가 하는 것을, 새삼 생각하도록 오늘 말씀은 우리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바로 그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새김으로써, 우리의 일상의 삶을 진정으로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하나님 나라의 실제, 그것을 망각하지 않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하며, 그것이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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