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배제의 논리를 무력화시키는 믿음 - 마태복음 15: 21~28[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5-09-27 13:44
조회
9115
015년 9월 2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배제의 논리를 무력화시키는 믿음

본문: 마태복음 15: 21~28




가는 곳마다 화제를 낳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쿠바를 방문한 데 이어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미국과 쿠바의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데 현 교황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 이번 행보는 그 의미를 새삼 드러내는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준비하는 날 신문에, 교황이 이번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일어난 일 한 가지를 보도했습니다. 경찰의 촘촘한 경호망을 뚫고 다섯 살 난 꼬마 소피가 교황을 만난 사건이었습니다. 경호원이 제지하는 걸 교황이 보고 대열을 멈춰 아이를 만나 안아주었다고 하지요. 소피는 준비해온 편지와 티셔츠를 교황께 전했습니다. 편지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마음이 슬프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교황님이 대통령과 의회에 말해 우리 부모님의 체류를 합법화시켜 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난 매일 그들이 언젠가 부모님을 내게서 떼어갈까 두려워요.” 소피와 언니는 미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지만, 그 부모는 불법 이민자 상태로 있기에, 그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간청이었습니다.

교황은 이후 백악관 환영행사와 교회의 미사에서 기후변화 문제와 함께 이민자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했습니다. 자신도 이민자의 후예임을 밝히면서 미국이 이민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꺼이 받아들일 것을 말했는가 하면, 이민자들이 미국과 교회를 풍요롭게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기사가 소개된 신문의 첫 면에는 탈북 할머니를 따라 온 15살 은주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사연을 이야기하면 길고 기구하지만 간략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엄마는 행방불명이 되고 아빠는 사고로 숨진 은주는 친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지만, 현행법상 부모가 행방불명되거나 사망한 경우여서 국적 취득이 불가능한 무국적자입니다. 할머니는 관계요로에 다 호소하고 심지어 유전자 검사까지 했는데도 소용이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은주는 대안학교를 다니고 있기는 하지만, 검정고시를 볼 수도 없고, 같은 또래의 소녀들이 하듯이 극장이나 공연 예약을 인터넷으로도 할 수 없는 상태일 뿐 아니라, 아파도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기에 비싼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그냥 끙끙 앓은 채 견뎌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할머니와 손녀는 이번 추석을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 큰 위로를 삼고 있고, 앞으로 모든 일이 잘 될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 두 가지 이야기 말고도, 최근 중동의 난민 사태에 관한 기사가 연일 보도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바닷물에 떠밀려 모래톱에 박힌 세 살짜리 어린 아이 아일란 쿠르디가 전 세계를 울렸고, 난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세계적 여론을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고, 사람인 한 그 누구나 존엄성을 보장받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오늘의 인권 개념입니다. 그러나 오늘 현실은 놀랍도록 그와 같은 가치기준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자신의 귀속 집단이 불분명한 사람은 자신을 보호해줄 공동체가 없기에 어려움을 겪는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인권이라는 척도는 상당히 강화되었고, 그에 따라 과거 시대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인권보장이 성취되고 있지만, 귀속성에 따른 인권보장의 정도는 놀랍게도 그 차이가 큽니다. 나와 나 아닌 집단에 대한 차별은 오히려 더 미묘하게 강화된 측면이 있습니다. 오늘 어떤 사회 구성원에 대한 자격의 부여 기준은, 또 다른 한편으로 매우 심각한 차별과 배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은 어떻게 보면 매우 묘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찌 보면 그리스도교 진리 가운데 매우 단순한 하나의 원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믿음의 힘, 큰 믿음이 여인의 소망을 이루고 구원에 이르게 했다는 간단명료한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최종적 결론 이전에 이 이야기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기본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의 문제에 관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주석가들은 이 말씀을 이방선교의 문제, 이방인의 구원 가능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본문으로 보며 논란을 삼아 왔습니다. 지금 우리들 역시 유대의 전통에 입각해 볼 것 같으면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이고 그런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빛 안에서 살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도 바울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방인의 구원 문제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구약성서에도 보면 이 주제가 심심치않게 등장하고 있지만(룻기/요나서 등)그 이방인들이 과연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유대인들은 쉽사리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이 본문은 이방인 선교를 둘러싼 문제를 함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본문이 전하는 상황에는 죽음의 논리와 삶의 논리, 배제의 논리와 상생의 논리가 대립하고 있습니다.


말투나 분위기는 조금 다르지만,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서 7:24~30에서도 똑같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맥락까지도 같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 뒤에 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일행과 함께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갔을 때 그 지방에 사는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불렀습니다. 마가복음은 더 구체적으로 이 여인이 시로페니키아 출신으로 두로에 사는 그리스인이라고 말합니다. 두로 지방은 옛부터 페니키아인을 포함한 이방인들이 무역을 하기 위해 많이 살고 있었고, 본래 이 여인도 그와 같은 부류의 가족의 일원이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 여인이라고 하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예수님은 처음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말합니다. “그를 돌려보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말문을 여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간청을 합니다. 이 때 예수께서는 오늘 우리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여인의 간청을 거절한 셈입니다. 이 여인에게는 날벼락과 같은 소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제서야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 그 때 그 여자의 딸이 나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처음 태도에 상당한 의문을 갖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예수님이 어찌 그렇게 매정하게 이 여인의 간청을 뿌리칠까요? 오늘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랬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에 비춰볼 것 같으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먼저 제자들의 입을 통해 나왔고 급기야는 예수님의 입을 통해 나온 이야기는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까지 심한 모멸감을 주는 언사가 튀어나올 정도로 묘사된 이 상황은, 한편에서 보면 철저하게 유대인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전통을 무조건 부수려는 데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 나름대로 자신들의 전통을 따라 예수님이 자신들의 구세주라고 믿는 이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신중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는 것을 해명해 주는 복음서 기자의 배려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위대성은 그 유대인들을 위한 논리가 언제까지나 유대인들만을 위한 논리로 굳어지지 않고, 새롭게 제기되는 요청 앞에 무너지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람을 살리자고 하는 데, 유대인이 따로 있고 이방인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로 상황이 반전하고 있는 데 오늘 말씀의 참뜻이 있습니다. 더욱이 본문이 유대인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 다음에 곧바로 이어지고 있는 점은 그 뜻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줍니다. 앞에서 예수께서는 유대전통을 대변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보고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고 이사야서의 말씀을 빌러 호되게 비판합니다. 한마디로 전통을 소중히 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거짓을 일삼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자신들만이 의롭다고 함으로써 타인을 배제함으로써 죽음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음을 질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남자는 남자의 입장에서, 여자는 여자의 입장에서, 어른은 어른의 입장에서, 젊은이는 젊은이의 입장에서 생각합니다. 그것은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타인의 입장을 배제하는 것이 될 때 위험합니다. 그것은 곧 죽음의 논리가 됩니다. 바로 그 배제의 논리, 죽음의 논리를 뛰어넘는 데 오늘 본문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그 논리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 중심의 배제의 논리는 한 이방 여인의 믿음으로 무너집니다.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이야기가 아무리 유대인의 입장을 배려하고 있는 말이라 생각하더라도, 이 말을 들어야 했던 이방 여인의 입장에서는 그의 마음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그와 같은 이야기에 동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다시 말해 현실의 논리가 현재의 질서가 그렇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나의 소망을 완전히 꺾어 버릴 수는 없다는 자세입니다. 그러면서 매달리는 이 여인의 자세를 보면 무척이나 구차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굴욕적인 태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구차하게 여겨지는 모습까지 보여줘 가면서도 이 여인이 그와 같은 소망의 믿음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자기 딸의 목숨을 살리려는, 자기 딸이 사람답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심정 때문이었습니다. 생명을 살리려는 그 열망이 모든 상황을 감내하고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를 받아줄 수 없다는 그 질서와 논리까지도 감싸 안아 버린 정성이요 열정,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이 여인 개인의 소망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유대인만이 아니고 이방인도들도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안에 있다는 신앙의 유산을 확립하게 된 사건을 만들어놓게 되었습니다.

전설을 따르면, 이 어머니는 유스타이고 그 딸은 베르니케라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와 같이 구원의 지평을 넓혀 준 그 사건을 일으킨 이 여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옛부터 이 여인은, 신뢰에서는 ‘신앙의 모범’이요, 끈기에서는 ‘인내의 모범’이며, 예수님의 냉정한 말에 대한 그녀의 대답에서는 ‘겸손의 모범’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 여인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매달렸다는 점에서 또한 ‘기도의 모범’으로 받들어지고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이 세상을 변화시킬까요? 그것은 생명을 살려내고자 하는 의지와 희망입니다. 그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가족과 더불어 사랑의 식탁을 함께 나누며 감사하는 오늘 그 진실을 깊이 새기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