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집으로서의 공동체, 그 안에서의 나눔과 배움 - 히브리서 10:19~25[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6-05-01 18:27
조회
9487
2016년 5월 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공동체, 그 안에서의 나눔과 배움
본문: 히브리서 10:19~25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요? 무슨 말부터 해야 지금 느끼는 감동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을지 아직까지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했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공동체에 있지, 그 어떤 물질적 실체나 가시적 건축물에 있지 않다는 믿음을 확고하게 갖고 있고, 결국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그 의미를 재삼 확인하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의 집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요, 기쁘기 한량없는 일이며 또한 무한히 감사할 일입니다. 저번의 교회당으로 이사할 때(사실상 다섯 번째) ‘다음에 이사할 때는 우리 집으로 갑시다.’ 했었는데, 그 기대가 이렇게 실현되었습니다.
제가 입버릇처럼 이야기해왔듯이, 저는 목회여정에서 저 스스로 계획하고 예정하지 않은 놀라운 일들을 연이어 겪어왔습니다. 서생으로 살아가려는 뜻을 지니고 있었기에 목회를 하게 될지 몰랐는데 목회를 하게 되었고, 교회개척을 하게 될지 몰랐는데 교회개척을 하게 되었고, 막연한 어떤 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앞서 말한 것처럼) 교회당건축을 하게 될지 몰랐는데 교회당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저에게 뜻하는 바는, 저의 삶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으로 연이어진 삶이라는 사실, 그래서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 한편으로 그것은 제가 그만큼 큰 사랑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지금 말씀드린 그 계기 계기마다, 그 한 마디 한 마디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사연들이 있고, 큰 어려움들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두 번의 계기는 저 개인적인 어려움과 결단의 과정이었지만, 세 번째 교회당을 건축하게 된 일은 여기 있는 우리들 모두가 함께 겪어야 했던 어려움과 순간순간 결단의 과정이었습니다. 지금도 기뻐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다들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어려움이 간단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사롭지 않은 과정이었고, 그런 만큼 어려움이 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로서 참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거듭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고, 그 여정을 함께 해온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가 집을 짓고 그 집에서 처음 예배드리는 이 때, 그러니까 입당예배로서 의미를 부여하고 드리는 이 예배에서 함께 읽은 히브리서 본문말씀의 의미를 새기며 이 집이 주는 의미를 생각하고, 이 집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그간 계속해서 정해진 성서일과를 따라 본문말씀을 함께 나눠왔지만, 오늘 본문말씀은 교단의 예식서가 제시하는 입당예배 본문말씀에 해당합니다.
히브리서 본문말씀을 대할 때마다 환기해왔지만, 먼저 히브리서의 기본적인 성격부터 재삼 확인합니다. 저자가 불분명한 히브리서는, 엄밀하게 말해 특정한 공동체를 겨냥한 서신이라기보다는 서신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일종의 권고문으로서 매우 광범위한 청중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책입니다.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뛰어난 그리스어를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히브리서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함축적으로 집약하여 증언하고 있는 일종의 개설서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히브리서라고 붙여진 것은, 그 내용이 히브리의 전통을 충실히 이해하고 있고 그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설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두드러진 초점 가운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온전한 화해를 이룬 대제사장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유대교적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유대교를 뛰어넘는 이해방식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희생제물이자 동시에 스스로를 바친 온전한 제사장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과거 유대교적 관습이나 교리에 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첫머리에서도 그 사실을 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번역상의 논란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직역하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담대함을 갖게 되었습니다.”로 번역될 수 있고, 여기서 ‘담대함’은 ‘권리’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습니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유대교적 전통을 이해해야만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말로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구나 성전 한 가운데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관념에 비춰볼 때 놀라운 선언입니다.
유대교의 전통에서 볼 때 지성소에 이르는 경계는 무려 10단계의 관문을 거쳐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땅→예루살렘도성→성전이 있는 산→이방인이 지나갈 수 없는 난간이 달린 테라스→ 여성의 뜰→이스라엘 민족의 뜰→사제들의 뜰→현관과 제단 사이의 공간→성소→지성소에 이르는 단계입니다. 이 공간과 집의 경계는, 일종의 우주관이요 세계관을 뜻합니다.
이 공간과 집의 구조는 이스라엘 백성의 세계관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어떤 민족 어떤 문명에서든 그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반영하여 공간과 집의 구도를 설정하는 것은 공통적입니다. 거의 기능적으로만 공간을 분할하는 방식(그것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은 근대 이후의 현상일 뿐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공간과 집의 구조, 그리고 각종 상징으로 그 나름의 고유한 우주관과 세계관을 표현했습니다. 그 공간과 집이 특별히 성소일 경우에는 더더욱 엄격했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세계관이라는 뜻은, 사실상 그 구도가 표현하는 바가 현실에서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정신을 나타내고, 그 점에서 그 구도는 해당 사회의 질서를 뜻하는 것이기 합니다.
첩첩이 분할되고 경계지어진 공간 구도의 정 가운데 자리한 지성소에는 일 년에 딱 한번 대제사장만이 백성들의 속죄를 위해 들어가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성소에 들어갈 권리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해왔던 세계관의 종식을 뜻하고, 이제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새로운 세계관이 요청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기존의 사회적 경계와 위계질서가 부정되고 전혀 새로운 삶의 질서가 형성되는 것을 뜻합니다. 단지 기존의 제의 자체가 부정되는 것을 뜻할 뿐 아니라 삶의 질서 자체가 새롭게 구성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데 어떤 경계도 없고, 하나님과 인간이 온전히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를 가르는 장벽이 무너진 것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꿰뚫어서,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제사장이 계십니다.”
히브리서가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유려한 문장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앞서 말했습니다만, 히브리서의 저자가 상징적 세계와 그 의미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게 숙고하고 그것을 언어로 제시하고 있는지 이 대목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 길지 않은 문장에는 실로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들 모두가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은, 이 대목에서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뚫린 것으로 표현되고 있고, 그 사건은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 생명의 길을 제시해주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설파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몸, 곧 살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예수 그리스도의 살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뜻입니다.
피로써 우리에게 지성소를 들어갈 자격을 주고, 다시 말해 피로써 우리가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게 하고, 또한 휘장을 꿰뚫음으로써, 다시 말해 당신의 몸을 찢음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 생명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피와 살, 살과 피로 말미암은 생명의 길이 지시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십자가를 뜻하며, 또한 나아가 함께 나누는 살과 피로써 성만찬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실존을 나타내는 것으로, 무엇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 사건의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 찢기고, 피를 쏟은 것,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지시합니다. 그 사건이 새로운 삶의 길, 생명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본문말씀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새로운 살 길, 생명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은 그것이 새로운 세계의 원점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요? 누차 그 의미를 새겨왔지만, 특별히 오늘 본문말씀과 관련하여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케노시스’ 곧 ‘자기비허(自己脾虛)’, 다시 말해 자기를 완전히 낮추고 완전히 비워버린 사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갖고 있고 모든 것이 완벽한 존재가 신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부정할 만큼 완전히 비워버린 사건의 주인공, 자신의 살을 찢고 피를 쏟아낸 바로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이라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입니다. 모든 것을 비워버린 그 자리에서라야 새로운 역사,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는 것이 십자가에 대한 믿음이 뜻하는 바입니다. 노자의 표현을 빌면, 텅 빈 구멍이 있어야 운동이 가능한 바퀴의 원리, 텅 비어 있어야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는 이치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순간순간 그 믿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놀라운 사건을 일으키고,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그 사건에 동참하게 하는 분이 곧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위대한 제사장’이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집은 무엇을 뜻할까요?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표현 하나를 통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유대인의 전통적 관념을 따르면 ‘성전’을 말합니다. 앞서 말했던 세계의 중심, 우주의 중심으로서 성전입니다. 이 때 성전은 하나님을 모시는 건축물로서 집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그리스어(οίκον του θεου)로 사용된 것을 감안하면 좀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집’은 곧 ‘세계’를 뜻하는 의미로도 자주 사용되고 있는 까닭에(에큐메니칼, 이코노미...). 하나님의 집은 세계 자체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집의 통치자’는 곧 ‘세계의 통치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 본문말씀의 문맥에서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과거의 성전을 필요로 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집은 곧 교회 공동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는 단순히 물리적 공간 내지는 건축물을 뜻하는 표현에 지나지 않았던 개념을 세계 안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뜻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건물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세계 안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나님, 그 현존의 구체적 표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히브리서 저자는 여기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의 이와 같은 의미는 초기 그리스도교가 생각한 교회의 의미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로 번역하는 말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그리스어로 ‘에클레시아’로 불렸습니다. 그것은 곧 ‘민회’를 뜻합니다. 그 ‘민회’라는 말을 그리스도인들은 그대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라는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기존 세계의 질서를 대체하는 대안적 공동체로서 교회의 의미를 부여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건축물로서 교회당의 의미도 변화됩니다. 우리가 굳이 ‘성전’이라 부르지 않고 ‘교회’ 또는 ‘교회당’, ‘예배당’이라 부르는 것은 그 집이 신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집이라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집의 구조가 변화된 것도 그 새로운 이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어받고 있는 교회당의 의미는,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현존하신 하나님으로 섬기며 그 새로운 삶의 길을 구현하기 위한 집으로서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새기며 새로운 세계를 이루고자 하는 뜻으로 모인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분명히 자기 집(물리적 의미에서)이 없어도 명백히 교회입니다. 그 공동체가 자리한 교회당은 새로운 삶의 길을 걷고자 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공동체의 온전한 정신을 구현할 때 또한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새로운 삶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믿음에 흔들림이 없이 나아가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음에다가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신앙을 굳게 잡읍시다.”
세상의 모든 경계를 허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의 그 어떤 장애물도 그 믿음을 흔들 수 있는 것이 될 수 없다는 이 선언은, 지금 이 서신을 받아 읽는 사람들에게 모종의 장애로 인한 흔들림이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 장애물이 무엇이었을까요? 이 히브리서가 기록된 시점은 1세기 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뚜렷이 드러났다는 사실은 자신을 비로소 드러낼 수 있는 호기를 만났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존재로서 이목의 집중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고, 그것은 곧 박해와 그로 인한 고통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그 박해를 이겨 낼 힘은 곧 도래할 하나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었던 것과 같은 형태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 자체를 저버리는 일들이 발생한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이 말씀은 바로 그 상황을 유념하면서,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지금 당장 닥친 어려움 때문에 믿음을 저버려서야 되겠느냐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 믿음의 동요의 상태가 어떤 것이었는지 더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것을 이겨낼 방법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어떤 사람들과 같이, 모이는 일을 그만두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수록 더 힘써 모입시다.”
동요는 그저 마음의 동요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이는 일을 그만둔 사람들이 생기기까지 했습니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그 동요에서 벗어나는 길은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공동체성을 이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의 존재의의를 상기시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교회가 이 집을 지으면서 이름붙인 ‘나눔과 배움의 터’의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하는 것은 일방적 지배의 원리와는 다른 길입니다. 그것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 나누고 배움으로써 성숙해지는 공동체의 정신을 함축합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표현은 ‘그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수록’이라는 말씀입니다. ‘볼 수 있도록’이 아니라 ‘볼수록’입니다.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가 현존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의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보여준 일이 지금 세상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서로에게 마음을 쓰며 사랑과 선한 일을 하고 있는 바로 그 당사자들 가운데 실현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박해와 동요 가운데 오히려 더욱 단단한 교회를 형성한 초기 기독교의 역사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온전히 되새기고, 그 뜻을 바로 자신들의 삶 속에서 구현하는 길을 통해서였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말씀에 이 집에 들어선 우리의 공동체가 새삼 새겨야 할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집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매 순간 새기며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하고, “그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수록 더 힘써 모여야 할 것”입니다.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하는 것은 우리 공동체 내부의 과제만은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이웃과 더불어 나아가야 할 바입니다. 우리는 우리끼리 나누고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이웃과 더불어 나누며 배우는 정신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이 집이 비로소 하나님의 집으로서 성별되는 것이며, 또한 동시에 우리가 귀한 선물로서 이 집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또한 우리 모두의 정성과 헌신으로 누리게 된 이 아름다운 집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섬기는 가운데 서로 나누고 배움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교회로서 본분을 다하고 새롭게 도약하는 천안살림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제목: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공동체, 그 안에서의 나눔과 배움
본문: 히브리서 10:19~25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요? 무슨 말부터 해야 지금 느끼는 감동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을지 아직까지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했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공동체에 있지, 그 어떤 물질적 실체나 가시적 건축물에 있지 않다는 믿음을 확고하게 갖고 있고, 결국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그 의미를 재삼 확인하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의 집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요, 기쁘기 한량없는 일이며 또한 무한히 감사할 일입니다. 저번의 교회당으로 이사할 때(사실상 다섯 번째) ‘다음에 이사할 때는 우리 집으로 갑시다.’ 했었는데, 그 기대가 이렇게 실현되었습니다.
제가 입버릇처럼 이야기해왔듯이, 저는 목회여정에서 저 스스로 계획하고 예정하지 않은 놀라운 일들을 연이어 겪어왔습니다. 서생으로 살아가려는 뜻을 지니고 있었기에 목회를 하게 될지 몰랐는데 목회를 하게 되었고, 교회개척을 하게 될지 몰랐는데 교회개척을 하게 되었고, 막연한 어떤 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앞서 말한 것처럼) 교회당건축을 하게 될지 몰랐는데 교회당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저에게 뜻하는 바는, 저의 삶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으로 연이어진 삶이라는 사실, 그래서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 한편으로 그것은 제가 그만큼 큰 사랑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지금 말씀드린 그 계기 계기마다, 그 한 마디 한 마디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사연들이 있고, 큰 어려움들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두 번의 계기는 저 개인적인 어려움과 결단의 과정이었지만, 세 번째 교회당을 건축하게 된 일은 여기 있는 우리들 모두가 함께 겪어야 했던 어려움과 순간순간 결단의 과정이었습니다. 지금도 기뻐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다들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어려움이 간단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사롭지 않은 과정이었고, 그런 만큼 어려움이 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로서 참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거듭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고, 그 여정을 함께 해온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가 집을 짓고 그 집에서 처음 예배드리는 이 때, 그러니까 입당예배로서 의미를 부여하고 드리는 이 예배에서 함께 읽은 히브리서 본문말씀의 의미를 새기며 이 집이 주는 의미를 생각하고, 이 집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그간 계속해서 정해진 성서일과를 따라 본문말씀을 함께 나눠왔지만, 오늘 본문말씀은 교단의 예식서가 제시하는 입당예배 본문말씀에 해당합니다.
히브리서 본문말씀을 대할 때마다 환기해왔지만, 먼저 히브리서의 기본적인 성격부터 재삼 확인합니다. 저자가 불분명한 히브리서는, 엄밀하게 말해 특정한 공동체를 겨냥한 서신이라기보다는 서신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일종의 권고문으로서 매우 광범위한 청중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책입니다.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뛰어난 그리스어를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히브리서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함축적으로 집약하여 증언하고 있는 일종의 개설서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히브리서라고 붙여진 것은, 그 내용이 히브리의 전통을 충실히 이해하고 있고 그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설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두드러진 초점 가운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온전한 화해를 이룬 대제사장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유대교적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유대교를 뛰어넘는 이해방식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희생제물이자 동시에 스스로를 바친 온전한 제사장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과거 유대교적 관습이나 교리에 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첫머리에서도 그 사실을 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번역상의 논란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직역하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담대함을 갖게 되었습니다.”로 번역될 수 있고, 여기서 ‘담대함’은 ‘권리’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습니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유대교적 전통을 이해해야만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말로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구나 성전 한 가운데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관념에 비춰볼 때 놀라운 선언입니다.
유대교의 전통에서 볼 때 지성소에 이르는 경계는 무려 10단계의 관문을 거쳐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땅→예루살렘도성→성전이 있는 산→이방인이 지나갈 수 없는 난간이 달린 테라스→ 여성의 뜰→이스라엘 민족의 뜰→사제들의 뜰→현관과 제단 사이의 공간→성소→지성소에 이르는 단계입니다. 이 공간과 집의 경계는, 일종의 우주관이요 세계관을 뜻합니다.
이 공간과 집의 구조는 이스라엘 백성의 세계관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어떤 민족 어떤 문명에서든 그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반영하여 공간과 집의 구도를 설정하는 것은 공통적입니다. 거의 기능적으로만 공간을 분할하는 방식(그것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은 근대 이후의 현상일 뿐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공간과 집의 구조, 그리고 각종 상징으로 그 나름의 고유한 우주관과 세계관을 표현했습니다. 그 공간과 집이 특별히 성소일 경우에는 더더욱 엄격했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세계관이라는 뜻은, 사실상 그 구도가 표현하는 바가 현실에서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정신을 나타내고, 그 점에서 그 구도는 해당 사회의 질서를 뜻하는 것이기 합니다.
첩첩이 분할되고 경계지어진 공간 구도의 정 가운데 자리한 지성소에는 일 년에 딱 한번 대제사장만이 백성들의 속죄를 위해 들어가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성소에 들어갈 권리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해왔던 세계관의 종식을 뜻하고, 이제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새로운 세계관이 요청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기존의 사회적 경계와 위계질서가 부정되고 전혀 새로운 삶의 질서가 형성되는 것을 뜻합니다. 단지 기존의 제의 자체가 부정되는 것을 뜻할 뿐 아니라 삶의 질서 자체가 새롭게 구성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데 어떤 경계도 없고, 하나님과 인간이 온전히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를 가르는 장벽이 무너진 것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꿰뚫어서,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제사장이 계십니다.”
히브리서가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유려한 문장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앞서 말했습니다만, 히브리서의 저자가 상징적 세계와 그 의미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게 숙고하고 그것을 언어로 제시하고 있는지 이 대목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 길지 않은 문장에는 실로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들 모두가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은, 이 대목에서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뚫린 것으로 표현되고 있고, 그 사건은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 생명의 길을 제시해주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설파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몸, 곧 살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예수 그리스도의 살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뜻입니다.
피로써 우리에게 지성소를 들어갈 자격을 주고, 다시 말해 피로써 우리가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게 하고, 또한 휘장을 꿰뚫음으로써, 다시 말해 당신의 몸을 찢음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 생명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피와 살, 살과 피로 말미암은 생명의 길이 지시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십자가를 뜻하며, 또한 나아가 함께 나누는 살과 피로써 성만찬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실존을 나타내는 것으로, 무엇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 사건의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 찢기고, 피를 쏟은 것,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지시합니다. 그 사건이 새로운 삶의 길, 생명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본문말씀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새로운 살 길, 생명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은 그것이 새로운 세계의 원점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요? 누차 그 의미를 새겨왔지만, 특별히 오늘 본문말씀과 관련하여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케노시스’ 곧 ‘자기비허(自己脾虛)’, 다시 말해 자기를 완전히 낮추고 완전히 비워버린 사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갖고 있고 모든 것이 완벽한 존재가 신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부정할 만큼 완전히 비워버린 사건의 주인공, 자신의 살을 찢고 피를 쏟아낸 바로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이라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입니다. 모든 것을 비워버린 그 자리에서라야 새로운 역사,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는 것이 십자가에 대한 믿음이 뜻하는 바입니다. 노자의 표현을 빌면, 텅 빈 구멍이 있어야 운동이 가능한 바퀴의 원리, 텅 비어 있어야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는 이치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순간순간 그 믿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놀라운 사건을 일으키고,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그 사건에 동참하게 하는 분이 곧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위대한 제사장’이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집은 무엇을 뜻할까요?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표현 하나를 통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유대인의 전통적 관념을 따르면 ‘성전’을 말합니다. 앞서 말했던 세계의 중심, 우주의 중심으로서 성전입니다. 이 때 성전은 하나님을 모시는 건축물로서 집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그리스어(οίκον του θεου)로 사용된 것을 감안하면 좀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집’은 곧 ‘세계’를 뜻하는 의미로도 자주 사용되고 있는 까닭에(에큐메니칼, 이코노미...). 하나님의 집은 세계 자체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집의 통치자’는 곧 ‘세계의 통치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 본문말씀의 문맥에서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과거의 성전을 필요로 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집은 곧 교회 공동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는 단순히 물리적 공간 내지는 건축물을 뜻하는 표현에 지나지 않았던 개념을 세계 안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뜻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건물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세계 안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나님, 그 현존의 구체적 표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히브리서 저자는 여기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의 이와 같은 의미는 초기 그리스도교가 생각한 교회의 의미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로 번역하는 말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그리스어로 ‘에클레시아’로 불렸습니다. 그것은 곧 ‘민회’를 뜻합니다. 그 ‘민회’라는 말을 그리스도인들은 그대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라는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기존 세계의 질서를 대체하는 대안적 공동체로서 교회의 의미를 부여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건축물로서 교회당의 의미도 변화됩니다. 우리가 굳이 ‘성전’이라 부르지 않고 ‘교회’ 또는 ‘교회당’, ‘예배당’이라 부르는 것은 그 집이 신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집이라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집의 구조가 변화된 것도 그 새로운 이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어받고 있는 교회당의 의미는,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현존하신 하나님으로 섬기며 그 새로운 삶의 길을 구현하기 위한 집으로서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새기며 새로운 세계를 이루고자 하는 뜻으로 모인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분명히 자기 집(물리적 의미에서)이 없어도 명백히 교회입니다. 그 공동체가 자리한 교회당은 새로운 삶의 길을 걷고자 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공동체의 온전한 정신을 구현할 때 또한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새로운 삶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믿음에 흔들림이 없이 나아가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음에다가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신앙을 굳게 잡읍시다.”
세상의 모든 경계를 허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의 그 어떤 장애물도 그 믿음을 흔들 수 있는 것이 될 수 없다는 이 선언은, 지금 이 서신을 받아 읽는 사람들에게 모종의 장애로 인한 흔들림이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 장애물이 무엇이었을까요? 이 히브리서가 기록된 시점은 1세기 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뚜렷이 드러났다는 사실은 자신을 비로소 드러낼 수 있는 호기를 만났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존재로서 이목의 집중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고, 그것은 곧 박해와 그로 인한 고통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그 박해를 이겨 낼 힘은 곧 도래할 하나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었던 것과 같은 형태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 자체를 저버리는 일들이 발생한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이 말씀은 바로 그 상황을 유념하면서,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지금 당장 닥친 어려움 때문에 믿음을 저버려서야 되겠느냐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 믿음의 동요의 상태가 어떤 것이었는지 더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것을 이겨낼 방법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어떤 사람들과 같이, 모이는 일을 그만두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수록 더 힘써 모입시다.”
동요는 그저 마음의 동요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이는 일을 그만둔 사람들이 생기기까지 했습니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그 동요에서 벗어나는 길은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공동체성을 이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의 존재의의를 상기시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교회가 이 집을 지으면서 이름붙인 ‘나눔과 배움의 터’의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하는 것은 일방적 지배의 원리와는 다른 길입니다. 그것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 나누고 배움으로써 성숙해지는 공동체의 정신을 함축합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표현은 ‘그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수록’이라는 말씀입니다. ‘볼 수 있도록’이 아니라 ‘볼수록’입니다.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가 현존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의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보여준 일이 지금 세상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서로에게 마음을 쓰며 사랑과 선한 일을 하고 있는 바로 그 당사자들 가운데 실현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박해와 동요 가운데 오히려 더욱 단단한 교회를 형성한 초기 기독교의 역사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온전히 되새기고, 그 뜻을 바로 자신들의 삶 속에서 구현하는 길을 통해서였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말씀에 이 집에 들어선 우리의 공동체가 새삼 새겨야 할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집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매 순간 새기며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하고, “그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수록 더 힘써 모여야 할 것”입니다.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하는 것은 우리 공동체 내부의 과제만은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이웃과 더불어 나아가야 할 바입니다. 우리는 우리끼리 나누고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이웃과 더불어 나누며 배우는 정신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이 집이 비로소 하나님의 집으로서 성별되는 것이며, 또한 동시에 우리가 귀한 선물로서 이 집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또한 우리 모두의 정성과 헌신으로 누리게 된 이 아름다운 집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섬기는 가운데 서로 나누고 배움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교회로서 본분을 다하고 새롭게 도약하는 천안살림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전체 0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