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잃어버린 이들을 찾아 - 누가복음 15:11~32[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6-06-12 15:51
조회
17341
2016년 6월 1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잃어버린 이들을 찾아  

본문: 누가복음 15:11~32




어린 시절 교회학교에서 자주 연극 대본으로 채택되는 성서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단연 1위는 아마도 예수님 탄생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 다음은 어떤 이야기일까요? 아마도 오늘 본문의 이야기, 아니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가 은메달과 동메달을 다툴 것입니다. 그 다음 들 수 있는 것으로, ‘키가 작은 삭개오 이야기’, 또는 ‘거지 나사로 이야기’ 등이 있지 않을까요? 어쨌든 교회생활을 꾸준히 한 사람에게는 뇌리에 박혀 있는 성경 말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억하고 있을 때, 본문말씀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아마도 대체로 ‘되돌아온 탕자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언뜻 봐서 본문말씀의 의미를 그렇게 생각해도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 둘이 있었는데, 작은아들이 자기가 받을 유산 몫을 미리 다 챙겨 집을 나갔습니다. 그러나 집을 나간 아들은 방탕한 생활로 그 재산을 다 탕진해버렸습니다. 그때서야 제 정신이 든 작은아들은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아버지께 되돌아 왔습니다.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다고 뉘우치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기뻐 맞이했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한편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며 열심히 일한 큰아들은 이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고 불만을 토로합니다. 이를 본 아버지는 큰아들을 설득하고 동생이 되돌아온 것을 함께 기뻐하자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대하면서 쉽사리 어떤 도덕적 교훈을 연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그러니까 작은아들을 보면서 자신의 처지를 이 탕자의 처지로 여기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저는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죄인입니다. 벌을 내리시면 달게 받을 터이니 제발 저를 거두어 주시기만이라도 하십시오.”라고, 마치 이 탕자처럼 기도하는 심정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뜻이 과연 거기에 있을까요? 과연 탕자와 같은 사람들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촉구하려는데 목적이 있었을까요?

오늘 말씀은 본래 그와는 다른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먼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오늘 본문말씀의 본래 뜻은 탕자가 회개한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잃었던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오늘 말씀은 ‘돌아온 탕자 이야기’이기에 앞서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기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다행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서 번역본들도 그 취지에 부합하는 소제목들을 달고 있습니다. <개역성경>은 ‘잃은 아들에 관하여’라고 하고 있고, <표준새번역성서>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라고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은 일관되게 잃어버린 것들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 이야기’와 ‘잃어버린 동전 이야기’가 나오고, 이어 오늘 본문 말씀 잃어버린 아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들을 지금 적대자들 앞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몰려오고 예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음식을 나누자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수군거립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15:2). “그래서”(15:3)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비유들을 말씀하셨습니다. 누누이 강조했지만 비유는 그 청중이 누구냐에 따라 그 의미의 초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적대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적대자들은 지금 예수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이 말은 예수의 행동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비난입니다. 예수는 상종하지 못할 인간들과 어울리는 사람으로서 역시 상종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그 비난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께서는 선포하십니다. ‘너희는 지금 잃어버린 것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것들을 소중히 하신다. 나는 지금 그 잃어버린 것들을 찾으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의도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뭘 잃어버렸다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는 분명히 잃어버린 것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뭘까요?

멀쩡한 땅에 선을 긋고 나면 안과 밖 또는 좌우가 구별됩니다. 울타리를 치고 나면 울안과 밖이 구별됩니다. 성벽을 둘러싸면 성안과 밖이 구별됩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삶의 이치는 그와 같이 끊임없는 줄긋기요 울치기와 같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것은 선 안의 것, 울안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큰 울타리가 있지요? 만리장성입니다. ‘문명화된 한족의 세계’, 곧 ‘중화’를 지키기 위해 ‘변방의 야만적인 오랑캐들’을 막기 위한 방벽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군사시설일 뿐 아니라 중화와 변방을 구별하는 문화적 경계 표시이기도 합니다. 사실 만리장성은 군사시설로는 그다지 효과적인 방어벽이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일자형의 장성이란 한군데만 뚫려도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역대 제왕들이 그 장성을 증축하고 지켜낸 것은 오히려 제국의 위용을 자랑하고 싶고, 세계의 중심과 변방을 구별하기 위한 일종의 자만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경계가 갖는 의미는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의 순수성을 지키고 또한 그 경계를 기준으로 그 밖을 통제할 수 있으므로 오로지 자기만이 중심이고 그 밖은 하잘것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의식과 질서를 만듭니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예컨대 그 장성 밖에 있는 우리 민족이 어째서 야만적인 ‘오랑캐’입니까? 우리는 우리대로 고유한 문화가 있고 우리 나름의 문명을 지켜왔습니다. 근대 여명기 홍대용은 ‘역외춘추론’을 말하며, 그 중심의 상대성을 역설했습니다. 우주와 세계에 관한 실상의 일면을 알았기에 가능한 인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심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자기 세계가 일방적이요 편협하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자기 경계 밖의 존재를 무시하고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구성원을 확정하는 일은 항상 그로부터 배제되는 존재를 낳는 삶의 질서 가운데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말씀하신 ‘잃어버린 것들’은 바로 그들이 정한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이라 해서 ‘죄인’ 취급해버리고, 병든 사람이라 해서 ‘저주받은 사람들’이라고 내몰아쳐 버린 그 태도를 예수님께서는 지금 지적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다 보니 불가피하게 지키지 못한 것이고, 그들이 병든 것은 힘들게 살고 어렵게 살다 보니 얻게 된 고통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찾고 싶어하고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자기들이 옳다고 정해놓은 정당성을 고집함으로써 사랑을 잃어버리고 냉혹한 정의만을 지킨 것으로 자족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꼬집고 계십니다. 그 이름부터가 ‘구별한다’는 뜻을 지니지 않았습니까? 그 태도를 문제시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말씀의 본래 초점이 있습니다.


이미 본문말씀의 의미를 충분히 헤아렸지만, 본문말씀의 이야기를 가만히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글쎄요? 오늘날 같으면 둘째아들의 요구가 일면 용납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재산의 분깃 가운데 제 몫을 미리 받아 모종의 어떤 일을 하려는 의욕적인 아들이 있다면 용납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상황에서도 흔쾌히 용납되기 어려운지 모릅니다. 더욱이 본문말씀의 배경이 되는 고대사회에서 그 행동은 더더욱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에서 그 요구는 허락되었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자식의 입장에서 보면 거의 사실상 기존 가족으로부터의 절연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가족 구성원으로서 자격상실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작은아들이 나중에 돌아와서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은, 꼭 허랑방탕한 생활을 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미 가족관계를 절연한 그 사실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그렇게 자식으로서 자격을 상실한 것으로 여겨지는 아들조차도 아버지는 아무런 조건 없이 아들로서 다시 받아들이고 그 기뻐한 데 있습니다. 먼  발치에서 감히 접근하지도 못하는 아들을 보고 달려가 껴안고,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긴 것은 아들로서 자격을 완전히 회복시켜 준 것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이 이야기를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말하였을 때, ‘봐라,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 부모의 마음이다!’ 하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자의로 떠난 아들이라도 다시 받아주는 것이 부모의 심정이거늘, 자의가 아니라 그야말로 자신들을 용납하지 않은 사회적 조건들 때문에 ‘죄인’이 된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사실 이것으로 충분하지만, 본문말씀의 비유는 큰아들의 반응을 보여주고 그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를 부연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큰 아들의 태도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태도, 또는 더 나아간다면 그들이 당연시하는 질서를 역시 당연시하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태도를 암시한다고 할 것입니다. 보다 직접적으로 이 이야기를 듣는 청중 자신이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라는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상식대로 어떤 능력과 업적이 있어야만 자격이 인정되는 것을 당연시하는 태도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이 부연설명으로 말미암아 오늘 본문말씀은 두 가지 초점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애초 비유의 초점은 ‘잃어버린 것’ 그 자체에 관심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잃어버린 은전 한 닢,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은, 이 세계에서 상실된 모든 존재를 나타내고, 그 한 존재의 소중함을 나타냅니다. 그 어떤 공리주의적 계산법으로 따져서는 안 되고 하나하나 존재의 소중함을 일깨웁니다.

여기에 더하여 큰아들에게 그 잃어버렸던 작은아들을 찾은 기쁨에 동참하라는 이야기는 그 잃어버린 존재를 다시 얻는 기쁨을 강조함으로써 그 잃어버렸던 존재를 회복하고 함께 하는 연대의 정신을 환기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의미는 교회에 요구되는 바이요, 또한 나아가 이 세계 자체에 요구되는 바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말씀을 나누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또한 공동의 친교를 나눌 때 오늘 말씀의 진실을 더욱 깊이 새기고 실현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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