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우리는 무엇과 싸워야 하는가? - 에베소서 6:12[정용택 목사 / 음성]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16-10-30 20:01
조회
11365
2016년 10월 23(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우리는 무엇과 싸워야 하는가?

본문: 에베소서 6:12

정용택 목사




•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개역한글)

•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공동번역)

• “우리의 싸움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와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표준새번역)

•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개역개정)

•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새번역)


오늘 본문은 에베소서 전체에서 정형화된 최종 문안인사 단락(6:21-24)을 제외하고, 사실상 신학적 논설 및 목회적 권면으로는 마지막에 해당하는 6장 10-20절 단락 가운데 들어 있는 문장으로서, 그 단락에서도 특히 유명한 말씀입니다. 바로 앞의 단락인 5장 21-6장 9절까지가 이른바 ‘가족규례’의 견지에서 부부관계, 부모자식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와 같은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삶의 규범을 설명하고 있다면, 에베소서 6장 10-20절 단락은 전신갑주, 즉 갑옷과 무기들이라는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통치자와 권세자들과 이 어둠의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진행 중인 싸움에 관한 마지막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 이 단락은 위치상 서신의 전체 주제를 요약하는 결론부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14-17절에 나오는 전신갑주의 세세한 내용을 오늘 여기서 굳이 되풀이하여 설명하진 않겠습니다. 그보다는 바울이 이 싸움의 대상을 누구로 규정하고 있는가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혈과 육 즉 인간이 아니라, 우리의 진정한 싸움의 대상이라고 바울이 말한 ‘정사와 권세’ 즉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그리고 그들과 같은 범주에서 나란히 언급되고 있는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왜 바울은 그것들을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 묶어서 함께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요? 적어도 바울이 그들에 대한 투쟁과 인간에 대한 투쟁을 명확히 구별짓고 있다면, 정사와 권세들과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은 일단 그 모두가 인간은 아니라는 얘기가 성립됩니다. 인간이 아닌데, 어째서 바울은 그들을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이라고 마치 인간인 것처럼 지칭한 것일까요? 왜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이 인간이 아니라 어둠의 세계의 지배자들 및 하늘에 있는 악령들과 동일한 범주로 묶이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는 바울서신 도처에서 통치자들/정사들(아르케), 통치자(아르콘), 권세자(뒤나미스), 주관하는 자(엑쑤시아), 보좌들(뜨로노스), 지배자들/주인들(퀴리오테스)로 다양하게 불리는 어떤 지배적인 권력을 가진 적대세력들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세력들의 존재론적 성격입니다. 이들은 영적인 세력인가 아니면 지상의 권력자들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는가를 두고 해석의 논란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많은 신학자들이 이러한 세력을 초자연적 존재라고 해석해왔습니다. 그러나 성서에 대한 탈신화적인 해석을 추구하는 현대의 성서학자들은 이 세력들이 사람들을 억압하는 인간 사회의 실제적인 통치자들, 즉 하늘에 있는 악한 영의 지상적 대리자로서 현실의 지배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보십니까? 바울이 말하는 것은 초자연적인 실재로서 악한 영, 즉 사탄이나 악령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아니면 지상의 억압적인 통치자들에 대한 상징적인 은유로 봐야 할까요?


물론 지상의 현실적인 권력과 인간을 넘어선 초현실적이고 초자연적인 권세로 양분된 해석학적 대립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하는 해석을 제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바울은 당시의 세계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두 권세를 절대적으로 구별하진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공식적인 이교의 ‘신들’ 배후에서 그리고 그 내부에서 ‘다이모니아’(귀신들)가 역사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현실의 지배자들의 배후에 보이지 않는 세력이 역사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바울에게는 그 둘 다 실재적인 권세들이었다는 것, 그래서 그는 지상의 악한 권세와 그 배후에 존재하는 영적인 권세를 묶어서 하나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정세와 권세, 즉 통치자들과 지배자들의 범주에는 보좌에 앉아서 스스로 ‘신’이라 참칭하고 있는 로마 황제 카이사르에서부터 지방의 하급 관리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 세계의 권력자들이 포함됩니다. 카이사르 역시 결국엔 지배적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백성들을 억압하고 있는 통치자들과 능력들 중의 한 사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권력자들은 보다 큰 범주인 영적인 ‘능력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이러한 세력들을 빌립보서 2장 10절에서 보듯이, 하늘에 있는, 땅에 있는 그리고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로 통합하여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 39절에서도 천사들, 권세자들, 그리고 능력들이 나란히 같이 언급되며, 고린도전서 15장 24절에서도 모든 정사, 권세, 능력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진술됩니다. 결정적으로는 에베소서 2장 2절에서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과 동일시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을 보다 급진화하여, 성서 시대의 사람들이 경험한 정사와 권세들이 행사했던 힘의 실재성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대표적으로, 월터 윙크). 그들에 따르면, 바울은 자기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적 제도들을 아우르는 지배체제의 중심에서 작동하고 있는 권세들의 영적인 측면을 판별해냈습니다. 권세들의 영적인 측면, 또는 ‘권력의 영성’이라 표현할 수 있는 그것은 단순히 지배체제의 특성을 의인화하여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지배체제의 영성이란 한 사회의 전체적인 체제가 그에 속한 인간들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것으로 나타날 때 실재적 힘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그런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보기에 카이사르를 정점으로 하는 당시 로마제국의 지배적인 체제 역시 실재적이고도 ‘영적인 기운’(spiritual ethos)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비롯한 신약성서 시대의 사람들은 권력자들을 통해 행사되고 있는 체제의 지배적 폭력 속에서 직관적으로 영적인 기운을 감지했고, 그것을 오늘날 우리처럼 과학적인 언어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부터 지배하는 우주적인 힘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늘과 땅의 실재가 서로 뗄 수 없이 연합하고 있는 고대의 세계관에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권력의 실재성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요컨대, 오늘 본문을 포함하여 신약성서에서 사탄, 악마들, 권세들, 천사들 등으로 불리는 다양한 존재들은 사실상 그 시대의 사람들이 실재적으로 경험했던 지배체제의 압도적인 권력 및 그 폭력성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종교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세속적인 현대인들은 그러한 세계관을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워 합니다. 하지만, 체제나 구조가 행사하는 권력을 추상적이면서 비인격적이고 객관적인, 혹은 초주관적인 실재로 인식하는 것은 현대의 비판적인 사회이론에서도 더 이상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국가나 사회, 시장과 같은 체제, 제도, 구조들이 인간을 억압하는 지배적 힘으로 나타날 때, 그것을 ‘악마적’이라고 묘사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 여성신학, 흑인신학 같은 현대의 해방지향적인 신학담론들이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억압하는 독재국가, 식민지, 자본주의, 가부장제, 인종차별 등의 지배체제를 단순히 세속적인 관점에서만 문제시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을 신학적 관점에서 문제시했던 것도 그러한 사고와 깊이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지배체제를 이렇게 계속해서 종교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고대에나 현대에나 체제, 제도, 사회구조 등이 갖고 있는 초인간적인 특성 때문입니다. 가령 자본과 노동의 계급적 지배관계를 중심으로 구성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들의 체계적 총합으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의 사회구조는 분명히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구조는 그것을 만들어낸 인간 활동과 분리되어 그 자체로 존립할 수 없는 사물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회구조가 일단 창출되고 나면, “외부적 사실성과 강제적 도구성으로서 개인들에게 맞서고 있습니다.”(로이 바스카) 이러한 관점은 사회구조를 개별 인간 행위자들을 초월하여 그들 외부에 존재하는, 그렇기에 개인적‧심리적 사실로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 성격과 힘을 지닌 독자적(sui generis) 실재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회구조가 행사하는 지배 혹은 권력의 특징은, “그것들이 인간에 의해 구성되고 인간적인 제도를 두고 영속하도록 만들어졌지만, 결국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통제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특히 가치의 축적 또는 이윤의 창출만을 목표로 삼는 자본의 무한한 운동에서 명확히 볼 수 있듯이, 체제가 자율적으로 활동하면서 마침내는 인간 운명을 자의적으로 결정짓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지점입니다. 정사와 권세들, 즉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은 역사의 매순간마다 지배체제를 구체화하는 외부적인 동시에 내부적인 표현으로서 구조와 제도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도 지상의 가시적인 지배자들만큼이나 그들의 지배를 통해 표현되고 있는 비가시적이고 영적인 지배체제의 악마(적 영)성이 동일하게 중요했습니다. 구체적이고 감각적이며 물질적인 세계와 추상적이고 초감각적이며 정신적인 세계가 바울에겐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이 그의 저서 『민중신학 이야기』에서 예수와 지배체제의 관계를 설명하는 대목 역시 오늘 본문에 대한 해석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우선 예수는 죄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하지 않고 사탄이라는 것을 문제삼았습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대전제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사탄이 지배하는 세계와 상반되는 것이지요.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대전제로 하였다는 것은 곧 사탄과의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을 종식시키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탄의 실체는 무엇이겠습니까? 사탄의 실제, 그것은 구조악입니다. 결국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을 종식시킨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조악에 의해 속박당하고 그로 인해 죄인 취급을 당하던 민중들을 해방시킨다는 것이지요. 한 마디로 예수는 구조악의 법망이 얽혀져 있는 것은 개념치 않고 그것에 의해 속박당하는 소위 죄인들만을 보고 그들에게 뛰어들어가 그들과 더불어 살다 죽은 것입니다. 죄인취급을 당하던 민중의 해방을 위해 끝까지 구조악과 싸웠고 그 구조악에 속박된 소위 죄인들을 죄인이라 부르지 않고 가장 영예로운 이름인 “아브라함의 자녀” “하느님 나라의 새 백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는 구조악이 없어지면 죄가 없어지고 죄가 없어지면 곧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이 점에서 예수는 참된 공산 세계가 오면 소유욕도 불평등도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보았던 맑스와 일치합니다.]


예수가 상대했던 사탄이 구조악을 가리킨다면, 바울이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라고 말했던 정사와 권세들 역시 그것과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을 우리는 이렇게 다시 진술해야 합니다. “우리의 투쟁은 타락한 구체적 개인들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권력자들과 그들의 권위, 그리고 전지구적 질서와 그것을 존속시키는 이데올로기적 신비화를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슬라보예 지젝) 이러한 진술은 우리가 오늘의 상황 가운데서 이 본문을 어떻게 새롭게 적용해야 할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있어서 지배의 주체와 투쟁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의 범위를 단순히 타락한 몇 몇의 구체적인 권력자들—그것이 박근혜든 최순실이든—로 한정짓지 않고, 언제든지 남용될 수 있고 변질될 수 있는 권력 그 자체의 일반성, 시민들이 견제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권력자들에게 부여된 강력한 권위, 권력자들이 누리는 온갖 종류의 특혜와 이권들로까지 확장해야만 합니다.


‘지배’(domination)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다른 개인이나 집단, 또는 자연적이거나 인간적인 집합적 자원으로부터 잉여의 이익을 이끌어낼 수 있는 곳에서 발생합니다. 지금 한국사회를 충격과 분노로 몰아넣고 있는 ‘최순실게이트’ 아니 ‘박근혜게이트’ 역시 선출된 권력자—물론 선거 과정과 결과도 여전히 합법성과 정당성의 논란이 많지만—의 뒤에서 자격은커녕 자질 자체가 의심스러운 어떤 인물과 그 주변인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온갖 부당한 특혜와 이익을 누려왔다는 점에서, 매우 부당한 지배의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어제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대통령의 하야 및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벌어진 시위와 집회의 정당성을 우리는 충분히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비추어서 볼 때도,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당연히 그런 부당한 지배를 행사한 통치자와 권력자를 상대로 싸움을 벌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에는 이러한 유형의 지배 외에 또 다른 형태의 지배가 일어나고 있기도 합니다. 앞서의 유형이 합법적으로든 불법적으로든 또는 착취가 되었건 수탈이 되었건, 결국 어떤 식으로든 한 개인이나 집단이 다른 개인이나 집단으로부터 이익과 자원을 추출해내는 형태의 지배를 가리킨다면, 또 다른 유형의 지배는 공동체의 규범들, 관행들, 관례들, 관습들, 가치들, 이념들이 거의 전적으로 합법적 권위의 형태를 통해서 작동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즉 권력의 형식과 사회적 관계와 집단적 목표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자들의 합리성이 형성되는 바로 그곳에서 작동하고 있는 지배입니다. 학자들은 그러한 지배를 구성적 지배(constitutive domination)라고 부릅니다. 구성적 지배에서 행사되는 구성적 권력이란 사회의 공통적인 가치들, 규범들, 인지적 역량들을 형성하거나 구성하는 어떤 행위주체 또는 제도의 역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형태의 지배를 이렇게 구별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장과 종업원의 관계에서 사장이 종업원을 권위적으로 대하고, 심지어 규정된 노동 이외에 다른 일들까지 암묵적으로 하도록 강요하면서 말 그대로 ‘갑질’을 저질렀다고 했을 때, 사장은 종업원으로부터 다양한 이익과 자원을 추출하는 방식으로 그를 지배했고, 권력을 행사한 것이 됩니다. 보통 우리는 이렇게 상관이나 고용주로부터 ‘갑질’로 불리는 비인격적인 처우나 권위적인 대우를 받았을 때, 그때 비로소 그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고 혹은 그가 나에게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지배권력에 대하여 저항이든 순응이든 회피이든 어떤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지배관계를 확립한 원래의 구성적 규칙, 그리고 사장과 종업원이라고 하는 관계 그 자체에서 이미 지배가 발생하고 있다고는 잘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강합니다. 주인이 종업원에게 갑질을 하건, 아니면 정말 인격적으로 대우해주건, 그런 구체적인 행동의 양상들은 두 사람이 상호작용할 때 생겨나는 다양한 형태의 전략적이고 비공식적인 규칙들 및 관행들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진짜 결정적인 지배는 둘 사이의 관계를 처음부터 확립한 원래의 구성적 규칙이나 제도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관계 그 자체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순실을 예로 들자면, 그녀가 벌인 온갖 종류의 갑질들은 애초에 그렇게 지배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만든 원래의 구성적 규칙, 즉 (그녀가 대통령을 조종했건 대통령이 그녀를 조종했건 관계 없이) 대통령이라는 지위에 부여된 막강한 권위와 권력, 그리고 그 대통령이라는 구성적 규칙에 의해 확립된 다른 이들과의 지배적 우위관계 없이는 성립이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다시 말해, 최순실이 갑질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와 40년 세월을 함께 하며 가족이나 다름없던 박근혜라는 인물이 차지한 대통령이라는 지위 자체의 일반적 권위, 그리고 그 권위에 거의 자동으로 수반되는 대통령과 다른 이들과의 지배관계 덕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문제를 삼아야 하는 것은 단순히 최순실이라는 구체적인 개인의 국정 농단 행위에만 그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농단이 언제라도 가능하게 하는, 심지어 역사적으로 보건대 그와 유사한 농단을 끊임없이 동기지어 온, 한국에서 대통령이 차지하는 그 막강한 지위와 통제 불가능한 권력, 나아가 그 위상과 권력으로 인해 성립하는 대통령과 다른 이들 사이의 압도적인 지배관계를 차제에 근본적으로 문제삼아야 합니다. 대통령과 그 주변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부당한 지배권력을 어떻게 제도적으로 견제하고 감시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편, 정치권력자들과 경제권력자들이 공유해온 서로의 이해관계도 한 사회의 구성적 지배를 관철시키는 대표적인 힘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뉴스 보도에 따르면, 최순실이 주도한 미르재단에 출연금을 낸 기업들 가운데 다수가 현재 그룹 승계가 진행 중이거나 완료된 기업들이었다고 합니다. 마치 대기업들이 대통령을 앞세운 비선 실세에게 돈을 강탈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과연 그들이 아무런 보상이나 이익을 기대하지 않고 그렇게 했을까요? 지난 4년의 임기동안 박근혜 정부가 벌인 각종 규제완화, 실질 세율 인하, 노동시장 개혁정책 등을 돌아보면 쉽게 답이 나올 것입니다.


국가와 자본 간의 이러한 관계를 근본적으로 확립한 사회의 구성적 규칙, 이를테면 전경련과 같이 정경유착을 공식적으로 합법화한 제도, 친기업적이면서 반노동적인 사회 규범, 경제성장의 이데올로기, 상품-화폐-자본으로 이어지는 자본주의적 가치법칙 등을 문제삼지 않고, 단순히 국가와 기업 둘 사이에서 일어난 특정한 부당거래의 사례만을 문제삼는다면 그것 역시 지배에 대한 올바른 저항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오늘의 본문은 우리를 지배하는 주체이자 우리의 투쟁의 대상인 지배적 권력이 구체적인 개인들이나 집단들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우리의 싸움은 그러한 권력자들의 전횡을 가능하게 만든 원래의 공식적, 구성적 규칙, 그리고 그 규칙들에 의해 확립된 지배관계가 결합되어 나타나는 지배체제 전체를 향해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지배체제는 본질적으로 구조적인 차원에 속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개인들의 부도덕함이나 무능함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것은 비가시적이고 비인격적이며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성격을 띱니다. 그것은 자원과 권력이 없는 개인들에게는 가히 영적이고 초월적인 실재로서 자신의 위력을 압도적으로 드러냅니다.


성서는 특히 지배체제가 억압적이고 폭력적으로 약자들을 지배할 때, 그것을 악마로, 정사와 권세로, 사탄으로 명명하며, 우리에게 그것과 싸울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싸움은 결국 개인과 사회를 총체적으로 구성하는 가치와 규범, 이념, 정신의 성격을 둘러싼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다 자유롭고 보다 평등하며 보다 정의로운 그런 가치와 규범을 통해 개인과 사회를 구성할 것인가 아니면 지배와 불평등과 불공정을 정당화하는 그런 가치와 규범을 통해 개인과 사회를 구성할 것인가의 싸움인 것입니다.


물론 이 싸움은 개인이 홀로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버거운 싸움입니다. 오히려 이 싸움은 교회를 통해서건, 사회운동을 통해서건, 다양한 개인들의 조직적이고 집합적인 협력을 통해 전개해나가야 합니다. 어떤 방식이 되었건, 저와 여러분이, 그리고 우리 천안살림교회가 지배체제와의 싸움을 피하지 않는 그런 존재로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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