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의 너른 품 - 디모데전서 1:12~17[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5-07-06 17:26
조회
4516
2025년 7월 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하나님의 너른 품
본문: 디모데전서 1:12~17



사도 바울이 가장 아끼는 제자 디모데에게 주는 교훈으로서 서신은 초기 교회 신앙생활의 면모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서신은 바울의 친서라기보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계승한 후대 교회의 교훈에 해당합니다. 교회가 조직화하는 국면에서 그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관심이 깊게 배어 있습니다. 그 점에서 급진적인 복음의 의미를 설파한 바울의 입장과는 그 성격을 달리합니다. 그럼에도 이 서신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을 가르친 것은 아니고 그 핵심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의 회심에 관한 고백입니다. 바울의 친서가 아니라면, 본문 말씀 또한 바울 자신의 직접적인 고백이라기보다는 바울의 심정을 깊이 헤아리며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교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교회의 시대에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었는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로서 임무를 맡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사도가 더더욱 감사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습니다.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자신에게 정반대의 임무를 감당하도록 맡겨주셨으니 더더욱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바울은 자신이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사연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1:13).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하는 가운데 훼방자, 박해자, 폭행자 노릇을 하다가, 이제 예수를 진정한 그리스도로 선포하는 사도로서 임무를 맡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헌신하게 되었으니 놀라운 은혜요, 따라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1:14). 바울은, 바른길을 오도하고,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며, 심지어 물리적 폭력을 가하기까지 했던 태도에서 바뀌어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믿음과 사랑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징표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입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뜻하지만, 동시에 사람들 사이에서 누리는 믿음과 사랑을 뜻합니다. 그것은 신앙적 차원과 동시에 윤리적 차원을 함축합니다. 그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된 바울은 진정으로 세상의 구원을 선포하는 사도로서 임무를 맡은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변모된 것을 통해 볼 때,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정말 믿을 만한 말씀이고, 모든 사람이 마땅히 받아들일 만한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덧붙입니다(1:15 이하). 죄인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자신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을 볼 때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끝까지 인내하시며 사람들이 바른길로, 구원의 길로 돌아서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예수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자신을 그렇게 변화시켰다고 역설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그것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원하신 왕, 곧 없어지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 무궁토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1:17).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장엄한 찬양사로 고백을 마무리합니다.

이 아름다운 고백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본문 말씀에서 특별히 바울 자신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까닭을 밝히는 대목을 주목합니다.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그가 이제 거꾸로 예수를 진정한 그리스로 선포하게 되었다는 바로 그 대목에서 덧붙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1:13).
이 고백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또한 오늘의 현실에서도 논란이 되는 쟁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고 한 것’이 죄가 되느냐, 아니면 변명의 여지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지가 죄가 되느냐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르고 지은 죄’가 무거운지, ‘알고 지은 죄’가 무거운지로 바꿔 이해해도 좋습니다.
물론 여기서 무지란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옳고 그름을 판별해 주는 진리 또는 어떤 척도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 말씀의 맥락에서 볼 것 같으면 그 무지는 변명의 여지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때는 내가 알지 못하여 그렇게 했고, 그래서 자비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다’는 조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르고 죄를 지었다는 고백인 셈입니다.

실제로 바울이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을까요? 묘한 변명 같은 이런 고백은 바울의 친서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회심과 관련하여 친서에서 이런 식으로 고백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로마 1:20). 사람에게는 이미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져 있으므로 그 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핑계를 댈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모르는 것 자체가 죄일 수 있고, 따라서 모르고 지은 죄가 엄중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바울의 선포에서도,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알지 못하고 예언자의 말씀의 참뜻을 몰라 예수를 정죄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고 있습니다(사도 13:27). 몰라서 중대한 죄를 저질렀다는 의미로 읽히는 대목입니다.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가운데 어느 편이 과연 엄중할까요? 불교에서는 모르고 지은 죄를 엄중하게 보는 것 같습니다. ‘무명’(無明), 곧 무지를 고통의 근원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생각에 비추어보더라도 모르고 지은 죄가 무거울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보면서 생각하지 않은 것 자체가 죄라고 보았고 ‘악의 평범성’을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그와는 다른 입장을 동시에 보여 줍니다. 본문 말씀처럼 모르고 지은 죄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있는 것처럼 보는 견해가 곳곳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예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두고 기도한 경우입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누가 23:34).
누가의 그 입장은 사도행전에서도 확인됩니다. 베드로의 설교에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무지의 탓이었던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해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사도 3:17). 바울의 아테네 설교에서는 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지했던 시대에는 눈감아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사도 17:30).
이상과 같은 말씀을 보면, 무지는 확실히 변명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따르면 ‘모르고 지은 죄’가 상대적으로 가벼운 반면 ‘알고 지은 죄’가 더 무겁다 할 것입니다. 현대의 사법 체계에서도 ‘모르고 지은 죄’에 대해서는 정상을 참작해 줍니다. 심신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저지른 죄에 대해 정상을 참작하는 경우입니다.

성서가 이처럼 서로 다른 입장을 증언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성서의 기록자마다 또한 어떤 국면에서마다 각각 그 강조점을 달리함으로써 인간 삶에 대한 다각적인 이해와 성찰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성서가 증언하는 서로 다른 입장 때문에 우리가 혼란에 빠져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 자체, 특별히 하나님 앞에 선 인간에 대한 풍요로운 이해로 인도합니다. 모르고 지은 죄를 엄중히 대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르고 지은 죄가 양해할 만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현실을 강조하고자 하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이 주제는 끊임없는 쟁점이 되어 왔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혜를 대립 구도로 하는 논쟁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 논쟁은 제기될 때마다 특정한 시대적 맥락을 지니지만, 그 논쟁이 제기될 때마다 교회는 대체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편을 공적인 견해로 채택해 왔습니다.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자는 뜻을 지닙니다. 하나님의 너른 품, 너른 마음을 받아들이자는 뜻이며, 동시에 인간 구원의 가능성을 더욱 폭넓게 받아들이자는 뜻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나 책임성을 부정하는 뜻을 지니기보다는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는 인간의 실존, 여러 관계 안에 있는 인간의 실존을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 진실을 받아들일 때 인간은 타자에 대해 너그러워질 수 있으며 그만큼 포용적인 삶을 지향하게 됩니다. 초기 교회는 그 이상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한국 교회에서는 그 진실이 곡해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실제 삶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업적을 강조하고 자격을 강조합니다. 구원을 값없이 누리고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 인간들의 삶의 관계 또한 그 믿음을 따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구원을 값없이 누린다는 사람들이 사람들 사이에 첩첩이 경계를 쌓고 자격을 논하고 업적과 기여를 논하는 일에 오히려 몰두합니다.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펼치는 데 선봉에 섭니다. 한국 교회에 만연한 기괴한 신앙 풍토입니다. 그 잘못된 신앙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은 한 해의 절반을 마감하고 새로운 절반을 맞이하는 맥추감사절입니다. 그 절기를 기리는 뜻이 어디에 있을까요? 마음을 가다듬고 우리가 거둔 열매를 확인하고, 어떻게 그 열매를 누리게 되었는지 되새기는 데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의 삶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돌아보고 감사하는 데 그 뜻이 있습니다. 설령 거둔 열매가 빈약해 보일지라도 다시금 내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 데 그 뜻이 있습니다. 나의 한계를 벗어난 도움의 손길을 인식하고 삶을 가다듬는 데 그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면, 그 은혜를 누리는 것을 아는 만큼 그 은혜를 나누기 위해 책임 있는 태도로 마땅히 내가 해야 할 바를 찾아 나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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