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가족의 재구성 - 마가복음 3:31~35[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5-09-14 16:00
조회
1185
2025년 9월 1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가족의 재구성
본문: 마가복음 3:31~35



예수님에게 혈연으로서 가족은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요? 너무 엉뚱한 물음일까요?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가족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면 예수님에게서 혈연적 가족의 의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존재로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사셨던 예수님은 분명히 혈연적 가족의 일원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목수인 아버지 요셉,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과 병행구절(마태 12:46~50; 누가 8:19~21)에 따르면, 그 형제는 적어도 두 명 이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구절(마태 13:54~56; 마가 6:3)에 따르면, 남동생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그리고 적어도 두 명의 여동생을 포함해서 최소 여섯 명의 동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예수께서는 ‘맏아들’이었습니다(누가 2:7). 그 형제들 가운데 잘 알려진 사람으로는 동생 야고보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누가복음에 의하면(1:36),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친척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가족은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가족과 다르지 않은 역할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삶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가족관계 안에서 책임과 의무를 졌을 것이고, 그 가족관계 안에서 삶의 안정과 갈등을 동시에 겪었을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그 한 단면을 보여 줍니다.

본문 말씀은 특별히 예수께서 혈연적 가족관계 안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 바로 앞에 전하는 바를 따르면(3:21), 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미쳤다고 해서 그 가족이 예수를 찾아 나섭니다. 단순히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붙잡으러 나섰다고 했습니다.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을 두고 사람들은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가족들은 걱정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찾아 나선 것입니다.
급기야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와 예수를 불러내려 합니다.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 생존해 있지 않은 탓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불러내려 할 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3:33)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3:34~35). 이만하면 참 독한 이야기이지요? 어떻게 곁에 있는 어머니와 형제를 두고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극적으로 전하고자 한 복음서 기자의 표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첫 번째는 기존의 혈연적 가족에 대한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종종 ‘가족이기주의’라는 말을 쓸 때가 있습니다. 사회적 명분이나 대의는 안중에 없고 자기 가족밖에는 모르는 태도를 두고 이를 때 하는 말합니다. 그저 ‘가족주의’라 하기도 합니다.
꼭 적나라한 어떤 이해관계를 관철하고자 하는 경우만은 아닙니다. 아주 단순히 일상사에서 어떤 시비가 붙었을 때, 그래도 ‘내 자식’이, 또는 ‘내 형제’가 ‘내 부모’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엄격한 법의 논리에서도 이러한 ‘가족주의’는 어느 정도 보호를 받습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가족이 그를 보호할 경우 ‘불고지죄’의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반적 정서요 당연한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본문 말씀에서 보여 주는 태도는, 아주 단호하게 이와 같은 ‘가족주의’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전후 문맥을 통해 예수님의 그와 같은 태도를 더욱 분명하게 강조합니다. 악한 세대를 말하는 문맥 바로 뒤에 이 이야기를 함으로써 가족이 악한 세대와 동조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마태 10:34~38).
종교적 열광주의를 내세우는 말씀이 아닙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필연적으로 부딪혀야만 하는 악한 세상과의 갈등을 구체적인 가족관계를 들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족관계, 가족주의가 ‘악한 세대’를 그대로 구현하고 있고 그것을 강화하는 온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내 가족밖에 모르는 삶의 태도는 하나님의 평화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는 가족관계, 그러한 역할을 정당화하는 가족주의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족이 갖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나를 길러준 보금자리로서의 가정, 사랑의 유대로 맺어진 가족, 그래서 삶의 안정을 누리게 해주는 그 가족의 의미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족, 하나님의 가족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3:35).
이 말씀은 바로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을 역설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족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새로운 대안적인 가족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족의 재구성입니다. 이것은 그 새로운 관계를 여전히 가족관계의 언어로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의 새로운 관계가 진정한 의미의 가족관계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평화와 대립하는 세상의 평화, 곧 거짓 평화를 정당화하고 강화해 주는 가족주의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써 연결된 새로운 가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 말씀의 두 번째 초점이요, 예수께서 진정으로 하시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자면, 우리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가정과 가족의 경험이 ‘내 가족’만의 것으로 머물지 않고 ‘우리 모두의 가족’의 경험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거듭난 가족’ ‘가족의 거듭남’입니다. 그것은 ‘가족의 해체’가 아니라 ‘가족의 사회화’ ‘사회의 가족화’를 말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가족이기주의를 넘어선 진정한 가족’으로서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말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유대로 다시 구성되는 사회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혈육만을 위해서 헌신하는 가족, 그래서 자신을 위한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해가 될 수도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유지되고 있는 가족관계를 부정하고, 그 대안으로 제시한 ‘하나님의 가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뭉친 새로운 공동체요, 혈연이 아닌 공의로 뭉친 공동체입니다. 혈연적 가족관계의 유익함을 누렸고, 그 가족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제 새로운 가족,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임을 자각하라고 일깨우시는 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참뜻입니다.
오늘날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한 자녀라고 믿는 보편적 인류 공동체의 이상이 바로 이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리스도교의 믿음이 온 인류에게 가장 심대하게 영향을 끼친 바로 그 믿음, 이 땅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을 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던 그 진실입니다.

하나님의 의로 뭉친 ‘새로운 가족’, ‘새로운 공동체’는 뜻으로만 뭉친 메마른 결사체는 아닙니다. 그저 비상한 일을 담당하기 위한 비밀결사나 어떤 업적을 지향하는 효율적인 조직이 아닙니다. 그 공동체는 밥상을 함께 나누는 친밀한 사랑의 공동체 정신을 밑바탕으로 합니다. 예수께서 늘 제자들과 함께 나눈 사랑의 식사가 이 공동체의 가장 본질적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친밀한 사랑의 식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우리들 자신의 몸으로, 삶으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식탁에는 누구든 참여함으로써 존중받고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원형이며 동시에 인류의 궁극적 이상입니다. 가족주의를 넘어선 가족으로서 하나님의 가족,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그 하나님의 가족은 사랑의 유대로 서로에게 힘이 될 뿐 아니라 공의 가운데 서로가 존중받고 저마다의 삶을 보장받는 관계를 뜻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회적 유대와 공동체성이 무너져 내리고, 따라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삶의 안정성이 흔들리고 있는 현실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존의 혈연적 가족의 위기가 깊어진 것도 오래되었고, 안전한 삶을 위한 사회적 연결망도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오늘의 세계는 촘촘히 짜여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낱낱이 흩어져 있습니다. 촘촘히 짜여있는 세계 안에서 저마다 고립감과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 피고용자의 85%가 자기 회사, 그리고 자기 일과 단절되어 있다고 느낍니다(노리나 허츠, 『고립의 시대』 14; http://www.gallup.com/workplace/238079/state-global-workplace-2017.aspx). 일찍이 칼 마르크스가 노동의 소외를 말했지만, 그 통찰이 지적하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명백히 어떤 회사나 기관에 소속되어 일을 하고 있음에도 그 일을 자기 일로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좌절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극우가 득세하는 토양입니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절대다수가 외로움에 휩싸이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우리 사회의 출산율이 극단적으로 떨어지고 비혼 가정, 독신 가정이 늘어가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것은 취향과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상 강요된 현실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현실 한가운데서 본문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저마다의 삶의 안정성을 위하여, 기존의 이른바 ‘정상적인’ 가족만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구성할 권리가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하고, 나아가 여러 형태의 사회적 돌봄이 강화되어야 합니다. 보편적 인류애의 이상,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의 진실은, 구체적으로 친밀한 신뢰와 사랑의 경험 가운데서 현실화합니다. 그 경험이 없다면 그 이상과 믿음이 얼마나 공허하게 느껴질까요? 그 친밀한 신뢰와 사랑의 기쁨을 누구나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불평등한 위계를 강화하는 가족이 아니라 존중과 사랑의 유대를 바탕으로 하는 가족의 경험이 소중하고, 그것이 전 사회적으로 확대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안정을 누릴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너져버린 사회를 향하여 진정한 하나님의 가족을 이룰 것을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저마다의 가족에서 사랑의 유대를 나누고 삶의 안정을 누리고 있다면, 그렇게 누리는 사랑의 유대와 삶의 안정을 오늘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더불어 누릴 수 있도록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 말씀을 지고의 이상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부름받은 공동체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 가운데서 그 뜻을 이룰 뿐 아니라 나아가 세상에서 그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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