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한 권세에 맞서는 사랑의 유대 - 베드로전서 5:5~11[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5-09-28 13:51
조회
1002
2025년 9월 2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악한 권세에 맞서는 사랑의 유대
본문: 베드로전서 5:5~11
베드로전서는 이른바 박해서신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로마 사회에서 박해를 받고 있을 때, 그리스도교의 근본 도리가 무엇이며 그 근본 도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어떠한 삶의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일깨워주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희망을 지니고 살아가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당시 지배적인 사회 질서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공동체의 질서와 가치관이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서 기록된 서신입니다. 이 서신은 베드로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지만, 그 뜻을 이어받은 교회 지도자의 서신으로, 그 연대는 대략 95년경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저자는 스스로 ‘장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5:1).
본문 말씀은 교회 공동체 안의 젊은이들을 향한 권면입니다. 하지만 문맥을 보면 사실상 교회 회중 모두를 향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앞에는 교회의 장로들을 향하여 권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5:1~4). 그러니까 교회 회중을 향한 일방적 권면이라기보다는, 교회 공동체 전체를 두고 권면하는 가운데 먼저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장로들에게 권면하고, 그 전제하에서 회중에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겸손의 옷을 입고 장로들 곧 나이가 많은 이들에게 순종을 권면하는 가운데, 온 세상을 배회하며 고통을 가하는 악마에 대적할 것을 권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권세를 믿는 믿음으로 희망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 결론으로 삼고 있습니다.
다시 확인하지만, 이 권면은 단지 젊은 회중을 향한 것만은 아닙니다. 먼저 장로들을 향한 권면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유대 안에서 고난을 함께 겪고 있는 공동체가 어떻게 존속할 수 있을지 일깨워주는 말씀의 일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장로들에게 주어진 말씀의 초점부터 먼저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장로들을 향한 말씀(1:1~4)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으로서 앞으로 영광을 함께 누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 몫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세 가지로 그 방법을 일깨웁니다. 부정적 상황에 대한 대비를 통해 긍정적 태도를 환기하는 방식입니다. 베드로전서가 당대 지배적인 사회 질서와 갈등을 겪는 교회 공동체의 올바른 지향을 일깨워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세 가지 교훈은 당대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과 곧바로 대비됩니다.
첫째로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하여” 하라고 합니다. 옳은 일을 하는 것이 강요된 어떤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의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행위하라.” 근대 철학자 칸트의 정언명령이 함축하는 바와 같습니다.
둘째로 “더러운 이익을 탐할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도자들이 받기 쉬운 경제적 유혹을 경계하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부정한 이익을 탐하여 어떤 몫을 감당하기보다는 기쁜 마음으로 마땅히 해야 할 몫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맡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떼의 모범이 되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권력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양떼에 대한 지배자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도자의 몫은 솔선수범하는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권위는 요구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마땅한 몫을 감당할 때 저절로 부여되는 것이라는 진실을 다시 환기해 줍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해줄 뿐 아니라 오늘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과 그 풍토를 철저하게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5:5~11)은 바로 그 말씀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모범을 보여주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더불어 그 회중 또한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함께 겸허히 나서라는 뜻입니다.
맨 먼저 권하는 말씀은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 세계 안에서 겸손은 권장되어야 할 덕목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겸손을 최상의 덕목으로 격상시켰습니다. 가치의 전도입니다. 겸손은 이제 자신을 드러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삶의 법칙에서 벗어나 자신을 먼저 내세우지 않고 상대를 존중할 때 오히려 모두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기본적인 덕목으로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신 섬김의 길을 따른 것입니다. 그 길은 근본적으로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겸손하다고 해서 그것이 비굴을 뜻하거나 영원한 자기 부정에 머물러 있는 상태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 가운데서 더욱 빛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다음 이어지는 말씀은, 정신 차리고 깨어 있어서 악마를 대적하라는 것입니다.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길 자를 두루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에 맞서 싸우라고 합니다. 겸손의 미덕을 말했다가 느닷없이 악마에 맞서 싸우라고 하는 이야기는 언뜻 보기에 예상 밖의 반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앞선 이야기(5:1~4)와 이어지는 이야기(5:9 하반절)를 보면 그 의미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먼저 이어지는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도 다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겪고 있는 고난의 상황, 박해의 상황을 말합니다. 악마와 맞서 싸우라는 이야기는 그 고난을 함께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악마와 맞서 싸울 수 있는 무기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의 문맥에서 보면, 겸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중대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인이 겪는 고난의 실체가 무엇인지 분명히 하면 그에 맞서는 겸손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더욱 확연히 드러납니다. 지금 그리스도인이 겪는 고난의 실체가 무엇일까요? 로마 제국 안에서 겪는 박해입니다. 그것은 공권력에 의한 박해일 수도 있고, 사회적 편견에 따른 차별의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당대 그리스도인이 어째서 그런 고통을 받아야만 했을까요? 로마 제국이 강요하는 권력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황제숭배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권력에 대한 불복종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권력에 대한 불복종을 그렇게 표했을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 권력이 보장하는 질서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사랑의 유대입니다. 서로 존중하고 섬기는 삶입니다. 그 사랑의 유대 관계 안에서 권력은 자리할 틈이 없습니다. 권력은 타인을 지배하는 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유대 안에서는 그 힘이 무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기득권 세력이 평등을 싫어할까요? 왜 평등을 불온시할까요? 권력이 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악마는 세상을 속속들이 지배하는 권력을 뜻하며, 그에 맞서는 겸손은 사랑의 유대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을 뜻합니다. 그 겸손은 그저 한 윤리적 성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방식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유대를 가능하게 하는 삶의 방식의 기초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그 삶의 방식이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을 때 권력은 함부로 틈새를 노릴 수 없습니다. 본문 말씀은 그 진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 청년세대가 겪는 상실감과 고통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일부 청년들이 극우화의 경향을 띠게 되는 것도 그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20대 청년들에게 가볍게 물어본 설문 결과가 흥미롭습니다. “무엇을 해줄까?”라고 물었더니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1위가 “집 사주세요”, 그다음으로 “취직시켜 주세요”, “애 낳으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1년 여행비 대주세요”, “잔소리 좀 그만하세요” 순이었다고 합니다(김현수 『극우청년의 심리적 탄생』, 177).
청년세대의 가치관이 속물적이라고 탓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집과 취직, 곧 먹고사는 일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은 그만큼 생존의 위기가 절박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금수저가 아닌 한 가족 안에서 해결되지도 않고, 사회적으로도 보장이 안 되니 그만큼 절박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역시 심각하고 우울한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권위주의적 권력체제를 지지하고 극우화하는지를 알려주는 연구 결과입니다.
미국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을 다른 후보에게 투표한 유권자와 비교했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친구와 이웃이 더 적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역사회에서 공동체 활동에 참여하지 않은 시간은 2배 많았습니다. 반면에 공동체에서 봉사활동과 모임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행복감과 삶에 대한 만족감이 늘어났고 불안감과 외로움은 이전보다 더 적게 느낀다고 답했습니다(노리나 허츠, 『고립의 시대』, 72; 김현수 『극우청년의 심리적 탄생』, 46).
사회적 유대의 결핍이 권위주의적 성향에 빠지게 만드는 중요한 한 요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겸손으로 맺어지는 사랑의 유대가 악마에 맞서는 힘이 된다는 말씀의 진실과 통합니다.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사랑도 할 수 없습니다. 자유가 없는 곳에 기독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박형규, 『질그릇』, 138). 1970년대 빈민들을 돌보며 조직화했던 박형규 목사가 당시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야 했던 사연도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불러들이신 분께서, 잠시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권세가 영원히 하나님께 있기를 빕니다. 아멘.”(5:10~11)
이 말씀이 함축하는 진실을 깊이 새기기를 바랍니다. 오직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다는 고백은, 그러므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서로 사랑하는 삶을 이루는 것이라는 믿음의 궁극적 근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누구의 권세든 인정될 수 없고, 서로 존중하며 동등하게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그 믿음으로 정진하기를 기원합니다.*
제목: 악한 권세에 맞서는 사랑의 유대
본문: 베드로전서 5:5~11
베드로전서는 이른바 박해서신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로마 사회에서 박해를 받고 있을 때, 그리스도교의 근본 도리가 무엇이며 그 근본 도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어떠한 삶의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일깨워주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희망을 지니고 살아가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당시 지배적인 사회 질서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공동체의 질서와 가치관이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서 기록된 서신입니다. 이 서신은 베드로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지만, 그 뜻을 이어받은 교회 지도자의 서신으로, 그 연대는 대략 95년경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저자는 스스로 ‘장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5:1).
본문 말씀은 교회 공동체 안의 젊은이들을 향한 권면입니다. 하지만 문맥을 보면 사실상 교회 회중 모두를 향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앞에는 교회의 장로들을 향하여 권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5:1~4). 그러니까 교회 회중을 향한 일방적 권면이라기보다는, 교회 공동체 전체를 두고 권면하는 가운데 먼저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장로들에게 권면하고, 그 전제하에서 회중에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겸손의 옷을 입고 장로들 곧 나이가 많은 이들에게 순종을 권면하는 가운데, 온 세상을 배회하며 고통을 가하는 악마에 대적할 것을 권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권세를 믿는 믿음으로 희망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 결론으로 삼고 있습니다.
다시 확인하지만, 이 권면은 단지 젊은 회중을 향한 것만은 아닙니다. 먼저 장로들을 향한 권면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유대 안에서 고난을 함께 겪고 있는 공동체가 어떻게 존속할 수 있을지 일깨워주는 말씀의 일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장로들에게 주어진 말씀의 초점부터 먼저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장로들을 향한 말씀(1:1~4)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으로서 앞으로 영광을 함께 누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 몫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세 가지로 그 방법을 일깨웁니다. 부정적 상황에 대한 대비를 통해 긍정적 태도를 환기하는 방식입니다. 베드로전서가 당대 지배적인 사회 질서와 갈등을 겪는 교회 공동체의 올바른 지향을 일깨워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세 가지 교훈은 당대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과 곧바로 대비됩니다.
첫째로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하여” 하라고 합니다. 옳은 일을 하는 것이 강요된 어떤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의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행위하라.” 근대 철학자 칸트의 정언명령이 함축하는 바와 같습니다.
둘째로 “더러운 이익을 탐할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도자들이 받기 쉬운 경제적 유혹을 경계하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부정한 이익을 탐하여 어떤 몫을 감당하기보다는 기쁜 마음으로 마땅히 해야 할 몫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맡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떼의 모범이 되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권력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양떼에 대한 지배자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도자의 몫은 솔선수범하는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권위는 요구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마땅한 몫을 감당할 때 저절로 부여되는 것이라는 진실을 다시 환기해 줍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해줄 뿐 아니라 오늘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과 그 풍토를 철저하게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5:5~11)은 바로 그 말씀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모범을 보여주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더불어 그 회중 또한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함께 겸허히 나서라는 뜻입니다.
맨 먼저 권하는 말씀은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 세계 안에서 겸손은 권장되어야 할 덕목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겸손을 최상의 덕목으로 격상시켰습니다. 가치의 전도입니다. 겸손은 이제 자신을 드러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삶의 법칙에서 벗어나 자신을 먼저 내세우지 않고 상대를 존중할 때 오히려 모두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기본적인 덕목으로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신 섬김의 길을 따른 것입니다. 그 길은 근본적으로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겸손하다고 해서 그것이 비굴을 뜻하거나 영원한 자기 부정에 머물러 있는 상태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 가운데서 더욱 빛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다음 이어지는 말씀은, 정신 차리고 깨어 있어서 악마를 대적하라는 것입니다.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길 자를 두루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에 맞서 싸우라고 합니다. 겸손의 미덕을 말했다가 느닷없이 악마에 맞서 싸우라고 하는 이야기는 언뜻 보기에 예상 밖의 반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앞선 이야기(5:1~4)와 이어지는 이야기(5:9 하반절)를 보면 그 의미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먼저 이어지는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도 다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겪고 있는 고난의 상황, 박해의 상황을 말합니다. 악마와 맞서 싸우라는 이야기는 그 고난을 함께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악마와 맞서 싸울 수 있는 무기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의 문맥에서 보면, 겸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중대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인이 겪는 고난의 실체가 무엇인지 분명히 하면 그에 맞서는 겸손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더욱 확연히 드러납니다. 지금 그리스도인이 겪는 고난의 실체가 무엇일까요? 로마 제국 안에서 겪는 박해입니다. 그것은 공권력에 의한 박해일 수도 있고, 사회적 편견에 따른 차별의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당대 그리스도인이 어째서 그런 고통을 받아야만 했을까요? 로마 제국이 강요하는 권력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황제숭배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권력에 대한 불복종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권력에 대한 불복종을 그렇게 표했을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 권력이 보장하는 질서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사랑의 유대입니다. 서로 존중하고 섬기는 삶입니다. 그 사랑의 유대 관계 안에서 권력은 자리할 틈이 없습니다. 권력은 타인을 지배하는 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유대 안에서는 그 힘이 무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기득권 세력이 평등을 싫어할까요? 왜 평등을 불온시할까요? 권력이 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악마는 세상을 속속들이 지배하는 권력을 뜻하며, 그에 맞서는 겸손은 사랑의 유대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을 뜻합니다. 그 겸손은 그저 한 윤리적 성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방식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유대를 가능하게 하는 삶의 방식의 기초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그 삶의 방식이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을 때 권력은 함부로 틈새를 노릴 수 없습니다. 본문 말씀은 그 진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 청년세대가 겪는 상실감과 고통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일부 청년들이 극우화의 경향을 띠게 되는 것도 그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20대 청년들에게 가볍게 물어본 설문 결과가 흥미롭습니다. “무엇을 해줄까?”라고 물었더니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1위가 “집 사주세요”, 그다음으로 “취직시켜 주세요”, “애 낳으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1년 여행비 대주세요”, “잔소리 좀 그만하세요” 순이었다고 합니다(김현수 『극우청년의 심리적 탄생』, 177).
청년세대의 가치관이 속물적이라고 탓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집과 취직, 곧 먹고사는 일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은 그만큼 생존의 위기가 절박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금수저가 아닌 한 가족 안에서 해결되지도 않고, 사회적으로도 보장이 안 되니 그만큼 절박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역시 심각하고 우울한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권위주의적 권력체제를 지지하고 극우화하는지를 알려주는 연구 결과입니다.
미국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을 다른 후보에게 투표한 유권자와 비교했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친구와 이웃이 더 적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역사회에서 공동체 활동에 참여하지 않은 시간은 2배 많았습니다. 반면에 공동체에서 봉사활동과 모임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행복감과 삶에 대한 만족감이 늘어났고 불안감과 외로움은 이전보다 더 적게 느낀다고 답했습니다(노리나 허츠, 『고립의 시대』, 72; 김현수 『극우청년의 심리적 탄생』, 46).
사회적 유대의 결핍이 권위주의적 성향에 빠지게 만드는 중요한 한 요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겸손으로 맺어지는 사랑의 유대가 악마에 맞서는 힘이 된다는 말씀의 진실과 통합니다.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사랑도 할 수 없습니다. 자유가 없는 곳에 기독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박형규, 『질그릇』, 138). 1970년대 빈민들을 돌보며 조직화했던 박형규 목사가 당시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야 했던 사연도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불러들이신 분께서, 잠시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권세가 영원히 하나님께 있기를 빕니다. 아멘.”(5:10~11)
이 말씀이 함축하는 진실을 깊이 새기기를 바랍니다. 오직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다는 고백은, 그러므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서로 사랑하는 삶을 이루는 것이라는 믿음의 궁극적 근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누구의 권세든 인정될 수 없고, 서로 존중하며 동등하게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그 믿음으로 정진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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