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규범의 재구성 - 베드로전서 2:20~25[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6-04-19 14:05
조회
609
2026년 4월 1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보편적 규범의 재구성
본문: 베드로전서 2:20~25
베드로전서는 히브리서, 요한계시록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로마 사회에서 박해를 받는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교의 근본 도리가 무엇이며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어떠한 삶의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일깨워주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희망을 지니고 살아가라는 것을 역설합니다.
‘산 돌’의 비유(2:5)라든지, ‘나그네’로서 그리스도인(2:11)의 비유는 여전히 신앙적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그 비유에 이어지는 본문 말씀은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위로이자 동시에 권면에 해당합니다.
사실 본문 말씀은 그 맥락상 오늘의 시선에서 상당한 논란거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인들에게 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인’(오이케테스)으로 번역된 말은 전형적인 ‘종’, 곧 ‘노예’(둘로스)를 뜻하는 개념과는 구별되고 대체로 가사에 종사하는 하인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종의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 노예제라는 사회적 맥락 안에서 말씀의 의미를 새겨야 하는 까닭에 상당한 논란거리를 지니는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노예제라는 역사적·사회적 환경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 3:28) 이 말씀은 모든 차별과 위계를 부정합니다. ‘종도 자유인도 없다’고 명시합니다. 이 전망 안에서 노예제는 용인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당대의 현실 가운데서 노예제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실제로 노예제 타파 운동을 펼치지는 않았습니다. 그 운동이 일어난 것은 근세의 일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노예제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엄연히 자리하고 있는 현실적 사회제도를 직접 타파하기 위한 운동을 펼치지는 못하였지만, 그대로 용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제도의 원리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도망한 노예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그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그대의 곁에 있을 겁니다. ··· 나를 맞이하듯이 그를 맞이하여 주십시오.”(빌레 1:16~17) 이는 주인과 종의 구도를 허무는 것입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 관계를 형성할 것을 권합니다. 노예제도가 현존하고 있더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 제도의 구속을 벗어나 형제애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제도 자체를 철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현존하는 조건들을 철폐하는 것에 앞서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내적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현실의 조건과 제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당한 제도를 안으로부터 무너뜨리는 삶의 태도입니다.
베드로전서는 초점을 달리합니다. 하인들이 처한 실존적 정황을 주목하고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과 대비하며 의미를 부여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위로와 더불어 격려를 하고자 한 것입니다.
먼저 서신은 하인들이 겪는 부당한 현실을 주목합니다.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2:20)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부당하게 겪는 현실을 직시한 것입니다. 이는, 부당하게 겪는 고난 그 자체가 은혜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견뎌내는 것이 은혜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견뎌내는 것은 부당한 고난 그 자체에 매몰되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겨내는 것을 뜻합니다. 악에 빠져 자기를 잃어버리거나, 악에 악으로 대응하면서 더 큰 죄악에 빠지지 않고, 부당한 현실을 드러내며 자신을 지키는 길입니다. 견뎌낸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를 갖습니다. 비단 종의 신분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를 따른다는 이유로 박해와 고난을 겪는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옳은 일을 하면서 부당하게 고통을 겪는 모든 사람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는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그 위로의 근거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제시합니다.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2:21a)
“그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그는 우리 죄를 자기의 몸에 몸소 지시고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매를 맞아 상함으로 여러분이 나음을 얻었습니다.”(2:22~24)
부당한 고통을 일상적으로 겪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이 어떻게 들렸을까요? 숙명론을 강변하는 말씀으로 들렸을까요? 그보다는 자신들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닮았다는 것을 깨닫고 진정한 삶의 희망과 용기를 지니게 되지 않았을까요? 자신들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재현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진실을 깨달았을 때 부당한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희망과 용기가 더해졌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그대로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수난의 종과 같은 모습입니다(이사 53:1~12). 그분은 죄를 지은 적이 없고 거짓을 말한 적이 없으나 부당하게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고 위협하지 않으며 고난을 감내하면서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뜻도 의미도 모르며 그저 고난을 겪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명백히 부당한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부당하게 고난을 가하는 이들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며 맞서지 않고 온전히 정의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에 맡겼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의의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그 불의한 체제에 연루된 모든 이들의 잘못을 드러냄으로써, 거꾸로 사람들이 그로부터 구원받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2:24b) 이는, 죄의 유혹에 노출된 육체의 죽음으로 온전히 의를 이루게 된 진실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할 가능성이 단절되었다는 것을 뜻하며, 그것으로 온전히 의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죄와 타협하지 않고 온전히 의를 이루는 삶이 가능하다는 진실을 극적으로 표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그 삶의 가능성을 뜻합니다.
일찍이 민중신학자 서남동 선생은 그 진실을 두고 ‘한의 속량적 성격’이라 말했습니다. 부당한 지배체제에 의해 쌓인 한을 민중이 스스로 극복해가는 한풀이에서 그 속량적 성격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한은 “민중적 저변감정으로서 한편으로는 약자의 패배의식, 허무감과 체념이 지배하는 감정상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약자로서의 삶의 집념을 담고 있는 감정”이기도 합니다(서남동). 삶의 집념으로서 그 한은 예술적으로 승화되기도 하며 혁명의 힘으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이로써 한은 보복의 악순환을 벗어나 민중 자신을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합니다. 원한에 쌓인 민중이 자기를 부정하고 초월함으로써 그 한을 승화시키는 가운데 그 놀라운 사건이 벌어집니다. ‘한(恨)과 단(斷)의 변증법’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영적 쇄신과 사회적 변혁을 통합하는 지속적인 혁명의 원동력이 됩니다.
우리 역사는 그 놀라운 민중의 각성으로 오늘의 민주주의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마침 4.19혁명 66주년 기념일입니다. 4.19뿐입니까? 저 지난해에서 지난해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빛의 혁명 또한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격렬한 저항 행위이지만 평화롭기까지 합니다. 불의에 내맡기지 않고 온전히 의를 이루고자 한 그 열망이 오늘의 세계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자랑스러운 역사에 도취해 있을 수 없습니다. 지난 주간 우리는 4.16 세월호 12주기를 맞이했습니다. 불행히도 그와 같은 사회적 참사는 연이어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게 참사가 계속되는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잘못된 사회적 요인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당연하게 여겨온 관행 가운데 그 불의의 요인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시민사회에서는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4.16 12주기 전까지 제정하려는 목표를 지니고 있었지만,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4.16 12주기 기념식에 처음으로 대통령이 참석하였고, 애초 그 법의 발의자 가운데 한 사람인 국회의장이 동석하였습니다. 대통령은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뜻을 분명히 했습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을 약속하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대통령의 국정 철학이 반드시 실질적인 결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그간 세월호 유족들은 얼마나 아픈 시간을 보내왔습니까? 자기 잘못으로 빚어진 일도 아닌데, 그 아픔을 호소하는 목소리를 이 사회는 어떻게 대응해 왔습니까? 오히려 숱한 모욕을 가하지 않았습니까? 그 모욕의 대열에 교회까지 가담하였습니다. 그 모욕을 견뎌내며 모든 사람이 생명과 안전을 보장받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헌신해 온 가족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의를 이루기 위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들이 고통과 모욕을 견뎌냈기에 우리는 더불어서 모든 사람의 생명과 안전이 보장받는 사회에 대한 희망을 더욱 굳건히 하게 되었습니다. 국정의 최고책임자까지 그 책임을 확인하고 결의를 다지게 만들었습니다.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지만, 그 희망을 구현할 수 있다는 기대를 안게 되었습니다.
대통령은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팔레스타인 사람을 향한 이스라엘의 비인도적 행위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이의 발언이 지니는 무게는 새삼 말할 것 없습니다. 부당하게 고통을 겪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고, 그들과 함께하는 이들이 용기를 얻었습니다. 각 나라의 주권과 모든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는 규범이 무너지고 보복의 악순환에 빠진 오늘 세계 현실 가운데서 보편적 규범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뜻을 만천하에 확인한 것입니다.
“길 잃은 양과 같았으나 이제는 영혼의 목자이며 감독이신 그에게로 돌아왔습니다.”(2:25) 마침내 그 뜻이 이 세계 가운데 이뤄지기를 소망합니다.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뜻을 따를 때 우리는 그 세계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뜻을 신실하게 따르기를 기원합니다.*
제목: 보편적 규범의 재구성
본문: 베드로전서 2:20~25
베드로전서는 히브리서, 요한계시록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로마 사회에서 박해를 받는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교의 근본 도리가 무엇이며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어떠한 삶의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일깨워주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희망을 지니고 살아가라는 것을 역설합니다.
‘산 돌’의 비유(2:5)라든지, ‘나그네’로서 그리스도인(2:11)의 비유는 여전히 신앙적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그 비유에 이어지는 본문 말씀은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위로이자 동시에 권면에 해당합니다.
사실 본문 말씀은 그 맥락상 오늘의 시선에서 상당한 논란거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인들에게 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인’(오이케테스)으로 번역된 말은 전형적인 ‘종’, 곧 ‘노예’(둘로스)를 뜻하는 개념과는 구별되고 대체로 가사에 종사하는 하인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종의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 노예제라는 사회적 맥락 안에서 말씀의 의미를 새겨야 하는 까닭에 상당한 논란거리를 지니는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노예제라는 역사적·사회적 환경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 3:28) 이 말씀은 모든 차별과 위계를 부정합니다. ‘종도 자유인도 없다’고 명시합니다. 이 전망 안에서 노예제는 용인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당대의 현실 가운데서 노예제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실제로 노예제 타파 운동을 펼치지는 않았습니다. 그 운동이 일어난 것은 근세의 일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노예제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엄연히 자리하고 있는 현실적 사회제도를 직접 타파하기 위한 운동을 펼치지는 못하였지만, 그대로 용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제도의 원리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도망한 노예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그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그대의 곁에 있을 겁니다. ··· 나를 맞이하듯이 그를 맞이하여 주십시오.”(빌레 1:16~17) 이는 주인과 종의 구도를 허무는 것입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 관계를 형성할 것을 권합니다. 노예제도가 현존하고 있더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 제도의 구속을 벗어나 형제애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제도 자체를 철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현존하는 조건들을 철폐하는 것에 앞서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내적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현실의 조건과 제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당한 제도를 안으로부터 무너뜨리는 삶의 태도입니다.
베드로전서는 초점을 달리합니다. 하인들이 처한 실존적 정황을 주목하고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과 대비하며 의미를 부여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위로와 더불어 격려를 하고자 한 것입니다.
먼저 서신은 하인들이 겪는 부당한 현실을 주목합니다.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2:20)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부당하게 겪는 현실을 직시한 것입니다. 이는, 부당하게 겪는 고난 그 자체가 은혜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견뎌내는 것이 은혜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견뎌내는 것은 부당한 고난 그 자체에 매몰되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겨내는 것을 뜻합니다. 악에 빠져 자기를 잃어버리거나, 악에 악으로 대응하면서 더 큰 죄악에 빠지지 않고, 부당한 현실을 드러내며 자신을 지키는 길입니다. 견뎌낸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를 갖습니다. 비단 종의 신분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를 따른다는 이유로 박해와 고난을 겪는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옳은 일을 하면서 부당하게 고통을 겪는 모든 사람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는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그 위로의 근거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제시합니다.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2:21a)
“그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그는 우리 죄를 자기의 몸에 몸소 지시고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매를 맞아 상함으로 여러분이 나음을 얻었습니다.”(2:22~24)
부당한 고통을 일상적으로 겪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이 어떻게 들렸을까요? 숙명론을 강변하는 말씀으로 들렸을까요? 그보다는 자신들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닮았다는 것을 깨닫고 진정한 삶의 희망과 용기를 지니게 되지 않았을까요? 자신들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재현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진실을 깨달았을 때 부당한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희망과 용기가 더해졌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그대로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수난의 종과 같은 모습입니다(이사 53:1~12). 그분은 죄를 지은 적이 없고 거짓을 말한 적이 없으나 부당하게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고 위협하지 않으며 고난을 감내하면서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뜻도 의미도 모르며 그저 고난을 겪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명백히 부당한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부당하게 고난을 가하는 이들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며 맞서지 않고 온전히 정의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에 맡겼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의의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그 불의한 체제에 연루된 모든 이들의 잘못을 드러냄으로써, 거꾸로 사람들이 그로부터 구원받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2:24b) 이는, 죄의 유혹에 노출된 육체의 죽음으로 온전히 의를 이루게 된 진실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할 가능성이 단절되었다는 것을 뜻하며, 그것으로 온전히 의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죄와 타협하지 않고 온전히 의를 이루는 삶이 가능하다는 진실을 극적으로 표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그 삶의 가능성을 뜻합니다.
일찍이 민중신학자 서남동 선생은 그 진실을 두고 ‘한의 속량적 성격’이라 말했습니다. 부당한 지배체제에 의해 쌓인 한을 민중이 스스로 극복해가는 한풀이에서 그 속량적 성격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한은 “민중적 저변감정으로서 한편으로는 약자의 패배의식, 허무감과 체념이 지배하는 감정상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약자로서의 삶의 집념을 담고 있는 감정”이기도 합니다(서남동). 삶의 집념으로서 그 한은 예술적으로 승화되기도 하며 혁명의 힘으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이로써 한은 보복의 악순환을 벗어나 민중 자신을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합니다. 원한에 쌓인 민중이 자기를 부정하고 초월함으로써 그 한을 승화시키는 가운데 그 놀라운 사건이 벌어집니다. ‘한(恨)과 단(斷)의 변증법’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영적 쇄신과 사회적 변혁을 통합하는 지속적인 혁명의 원동력이 됩니다.
우리 역사는 그 놀라운 민중의 각성으로 오늘의 민주주의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마침 4.19혁명 66주년 기념일입니다. 4.19뿐입니까? 저 지난해에서 지난해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빛의 혁명 또한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격렬한 저항 행위이지만 평화롭기까지 합니다. 불의에 내맡기지 않고 온전히 의를 이루고자 한 그 열망이 오늘의 세계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자랑스러운 역사에 도취해 있을 수 없습니다. 지난 주간 우리는 4.16 세월호 12주기를 맞이했습니다. 불행히도 그와 같은 사회적 참사는 연이어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게 참사가 계속되는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잘못된 사회적 요인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당연하게 여겨온 관행 가운데 그 불의의 요인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시민사회에서는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4.16 12주기 전까지 제정하려는 목표를 지니고 있었지만,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4.16 12주기 기념식에 처음으로 대통령이 참석하였고, 애초 그 법의 발의자 가운데 한 사람인 국회의장이 동석하였습니다. 대통령은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뜻을 분명히 했습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을 약속하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대통령의 국정 철학이 반드시 실질적인 결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그간 세월호 유족들은 얼마나 아픈 시간을 보내왔습니까? 자기 잘못으로 빚어진 일도 아닌데, 그 아픔을 호소하는 목소리를 이 사회는 어떻게 대응해 왔습니까? 오히려 숱한 모욕을 가하지 않았습니까? 그 모욕의 대열에 교회까지 가담하였습니다. 그 모욕을 견뎌내며 모든 사람이 생명과 안전을 보장받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헌신해 온 가족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의를 이루기 위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들이 고통과 모욕을 견뎌냈기에 우리는 더불어서 모든 사람의 생명과 안전이 보장받는 사회에 대한 희망을 더욱 굳건히 하게 되었습니다. 국정의 최고책임자까지 그 책임을 확인하고 결의를 다지게 만들었습니다.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지만, 그 희망을 구현할 수 있다는 기대를 안게 되었습니다.
대통령은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팔레스타인 사람을 향한 이스라엘의 비인도적 행위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이의 발언이 지니는 무게는 새삼 말할 것 없습니다. 부당하게 고통을 겪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고, 그들과 함께하는 이들이 용기를 얻었습니다. 각 나라의 주권과 모든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는 규범이 무너지고 보복의 악순환에 빠진 오늘 세계 현실 가운데서 보편적 규범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뜻을 만천하에 확인한 것입니다.
“길 잃은 양과 같았으나 이제는 영혼의 목자이며 감독이신 그에게로 돌아왔습니다.”(2:25) 마침내 그 뜻이 이 세계 가운데 이뤄지기를 소망합니다.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뜻을 따를 때 우리는 그 세계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뜻을 신실하게 따르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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