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쁨 - 요한복음 15:1~8[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6-04-26 13:28
조회
405
2026년 4월 2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사랑의 기쁨
본문: 요한복음 15:1~8
포도나무의 비유는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고별설교의 일부로서, 이로부터 쭉 이어지는 요한복음 15장 전반의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하게 일깨워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로 말미암아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15:1~5).
우리가 이해하는 데 하나도 어려움을 느낄 이유가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마치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 줄기에 달려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 뜻을 그렇게 풀이해 주고 있습니다. 각각의 개체는 각각의 개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존재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에 자기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어쩌라는 이야기일까요? 포도나무의 비유가 끝난 다음 이어지는 말씀은 그 뜻을 더욱더 구체적으로 밝혀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15:9~11)
참 포도나무의 가지가 된다는 것, 곧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을 베푸시면서 기쁨을 누린 것과 같이 우리도 그 기쁨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지상 명령은 오직 사랑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더더욱 분명하게 그 진실을 말합니다.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15:12~17).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종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부릅니다. 도반으로 부릅니다. 종은 주인이 말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옳든 그르든 주인이 명하면 이의 없이 주인의 명에 순종하는 것이 종의 미덕입니다. 친구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친구 사이에서는 일방적인 명령이 통용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밑도 끝도 없이 막무가내로 명령을 행할 수 없습니다. 친구가 하는 말이 뭔지 알아야 동의를 표하고 공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제자들에게, 친구에게 말하는 것과 똑같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밝히며 그에 따를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사실 이 대목은 이렇게 번역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본문 말씀,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요한복음 15장 말씀의 요체는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근본 요체를 일깨워줌과 동시에 사랑으로 구체화하는 그 신앙의 상호성을 일깨워줍니다.
우리의 신앙은 두려움의 불안을 넘어 사랑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깊은 죄책의 굴레에 매여 하나님의 눈치를 보는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것일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에게 신앙은 그렇게 타락해 있습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그렇게 타락한 신앙의 행태를 보여주는 구호일 뿐입니다. 그로부터 이편 저편을 가르고 배제와 혐오를 정당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은 사랑의 기쁨을 맘껏 누리는 신앙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사랑으로 구현되는 삶은 철저하게 상호적입니다. 본문 말씀은 또 하나의 중요한 초점으로 그 진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포도나무 줄기와 가지의 비유는 생명의 이치를 깊이 생각하게 해줍니다. 이 비유는 한편으로는 가지가 줄기에 이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줄기에 생명력을 더해 주는 가지의 역할 또한 환기합니다. 뿌리를 내리고 줄기가 솟아 있지만 가지가 제거되면 나무가 말라 죽는 일도 흔히 있습니다. 나무가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은 여러 요인의 상호작용 결과입니다. 그것을 요한복음 15장은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겠다.”(14~15) 이렇게 친절하게 해설을 덧붙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여러 지체와 더불어 완성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은 특별히 근대 이후 개별적 인간의 자율성에 근거한 인간문명에 대한 깊은 성찰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오늘 모든 사람이 살고 있는 자본주의적 산업사회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인류 역사에서 근대 자본주의적 산업화 과정은 이른바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근대화의 과정은 신과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고, 또한 그것을 강화해 왔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이 특별한 존재이기에 자연적 질서의 일부라는 사실을 부정했습니다. 그것은 곧 모든 외적 지배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탈영성화’ 곧 ‘세속화’와 동일시되기도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무엇이든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이 명제는 그 믿음을 단적으로 표현합니다. 모든 것을 대상화해 놓고 그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확보하면 그 대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저 ‘많이 알면 좋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대상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한 지식에 대한 믿음, 아는 것은 곧 지배의 의지와 동일시되는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믿음에 따라 인간은 개개인이 신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결국 나 아닌 모든 세상의 모든 대상을 객체로 떨어트렸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그 조건 안에서 개개 인간은 모두가 격렬한 경쟁 관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홀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항상 불안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때 자신이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고 안정감을 누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항상 불안에 시달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나 아닌 모든 것을 그저 대상으로만 여기는 인간은 스스로 어찌할 줄 모르는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고 그 불안과 두려움을 회피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수단을 찾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내보이고 있는 많은 증상은 오늘의 자본주의적 문명이 빚어낸 불안 내지는 두려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즐겁지도 않은데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거의 유일한 길이기에 일에 매여 있는 경우, 결코 내적인 자아와 동일시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허영심을 채워주는 소유물에 집착하는 현상, 아예 어떤 쾌락에만 내맡기는 모든 형태의 중독증상 등이 그런 것입니다.
신앙생활 또한 그 비슷한 것으로 전락하였습니다. 많은 경우 신앙생활은, 근원적 불안을 넘어 적극적인 삶을 지향하는 것이기보다는 일시적인 환각이나 중독에 빠지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종교가 아편이 되는 경우입니다. 끊임없이 지옥의 불안을 조장하고 그에 대한 대체재로서 천당을 희구하는 신앙생활이라면 그 전형적인 경우입니다. 놀랍게도 한국교회 현실에서 가장 평균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 주류 교회가 이단시하는 신흥 종파들이 별종이 아닌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배태하였습니다. 거기서 좀 더 자극적으로 환상적인 만족을 추구할 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지옥의 징벌이 두려워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아니면 구원의 희망이 주는 기쁨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안 지키면 벌 받을까 두려워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를 드립니까? 아니면 구원의 희망으로 함께 하는 형제자매들간에 나누는 사랑의 기쁨, 또는 내 삶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주는 그 진실 때문에 예배를 드리고 신앙의 공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요한복음의 말씀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처럼 서로 근원에 잇대어 있고 더불어 외부와 교통하는 삶, 그리고 그 삶의 구체적인 표현으로서 서로 사랑을 나누는 삶, 서로를 동등한 존재로, 친구로 인정하며 사는 삶이 그 답입니다.
우리들 각자 저마다의 삶이 참 포도나무 줄기에 붙은 가지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이 교회 공동체가 그렇게 한 줄기에 연결되어 건강하게 자라고 열매 맺는 포도나무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일 때마다 만날 때마다 사랑을 나누며 위로를 받고 힘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제목: 사랑의 기쁨
본문: 요한복음 15:1~8
포도나무의 비유는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고별설교의 일부로서, 이로부터 쭉 이어지는 요한복음 15장 전반의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하게 일깨워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로 말미암아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15:1~5).
우리가 이해하는 데 하나도 어려움을 느낄 이유가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마치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 줄기에 달려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 뜻을 그렇게 풀이해 주고 있습니다. 각각의 개체는 각각의 개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존재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에 자기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어쩌라는 이야기일까요? 포도나무의 비유가 끝난 다음 이어지는 말씀은 그 뜻을 더욱더 구체적으로 밝혀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15:9~11)
참 포도나무의 가지가 된다는 것, 곧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을 베푸시면서 기쁨을 누린 것과 같이 우리도 그 기쁨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지상 명령은 오직 사랑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더더욱 분명하게 그 진실을 말합니다.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15:12~17).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종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부릅니다. 도반으로 부릅니다. 종은 주인이 말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옳든 그르든 주인이 명하면 이의 없이 주인의 명에 순종하는 것이 종의 미덕입니다. 친구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친구 사이에서는 일방적인 명령이 통용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밑도 끝도 없이 막무가내로 명령을 행할 수 없습니다. 친구가 하는 말이 뭔지 알아야 동의를 표하고 공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제자들에게, 친구에게 말하는 것과 똑같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밝히며 그에 따를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사실 이 대목은 이렇게 번역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본문 말씀,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요한복음 15장 말씀의 요체는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근본 요체를 일깨워줌과 동시에 사랑으로 구체화하는 그 신앙의 상호성을 일깨워줍니다.
우리의 신앙은 두려움의 불안을 넘어 사랑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깊은 죄책의 굴레에 매여 하나님의 눈치를 보는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것일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에게 신앙은 그렇게 타락해 있습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그렇게 타락한 신앙의 행태를 보여주는 구호일 뿐입니다. 그로부터 이편 저편을 가르고 배제와 혐오를 정당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은 사랑의 기쁨을 맘껏 누리는 신앙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사랑으로 구현되는 삶은 철저하게 상호적입니다. 본문 말씀은 또 하나의 중요한 초점으로 그 진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포도나무 줄기와 가지의 비유는 생명의 이치를 깊이 생각하게 해줍니다. 이 비유는 한편으로는 가지가 줄기에 이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줄기에 생명력을 더해 주는 가지의 역할 또한 환기합니다. 뿌리를 내리고 줄기가 솟아 있지만 가지가 제거되면 나무가 말라 죽는 일도 흔히 있습니다. 나무가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은 여러 요인의 상호작용 결과입니다. 그것을 요한복음 15장은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겠다.”(14~15) 이렇게 친절하게 해설을 덧붙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여러 지체와 더불어 완성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은 특별히 근대 이후 개별적 인간의 자율성에 근거한 인간문명에 대한 깊은 성찰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오늘 모든 사람이 살고 있는 자본주의적 산업사회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인류 역사에서 근대 자본주의적 산업화 과정은 이른바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근대화의 과정은 신과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고, 또한 그것을 강화해 왔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이 특별한 존재이기에 자연적 질서의 일부라는 사실을 부정했습니다. 그것은 곧 모든 외적 지배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탈영성화’ 곧 ‘세속화’와 동일시되기도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무엇이든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이 명제는 그 믿음을 단적으로 표현합니다. 모든 것을 대상화해 놓고 그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확보하면 그 대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저 ‘많이 알면 좋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대상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한 지식에 대한 믿음, 아는 것은 곧 지배의 의지와 동일시되는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믿음에 따라 인간은 개개인이 신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결국 나 아닌 모든 세상의 모든 대상을 객체로 떨어트렸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그 조건 안에서 개개 인간은 모두가 격렬한 경쟁 관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홀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항상 불안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때 자신이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고 안정감을 누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항상 불안에 시달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나 아닌 모든 것을 그저 대상으로만 여기는 인간은 스스로 어찌할 줄 모르는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고 그 불안과 두려움을 회피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수단을 찾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내보이고 있는 많은 증상은 오늘의 자본주의적 문명이 빚어낸 불안 내지는 두려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즐겁지도 않은데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거의 유일한 길이기에 일에 매여 있는 경우, 결코 내적인 자아와 동일시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허영심을 채워주는 소유물에 집착하는 현상, 아예 어떤 쾌락에만 내맡기는 모든 형태의 중독증상 등이 그런 것입니다.
신앙생활 또한 그 비슷한 것으로 전락하였습니다. 많은 경우 신앙생활은, 근원적 불안을 넘어 적극적인 삶을 지향하는 것이기보다는 일시적인 환각이나 중독에 빠지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종교가 아편이 되는 경우입니다. 끊임없이 지옥의 불안을 조장하고 그에 대한 대체재로서 천당을 희구하는 신앙생활이라면 그 전형적인 경우입니다. 놀랍게도 한국교회 현실에서 가장 평균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 주류 교회가 이단시하는 신흥 종파들이 별종이 아닌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배태하였습니다. 거기서 좀 더 자극적으로 환상적인 만족을 추구할 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지옥의 징벌이 두려워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아니면 구원의 희망이 주는 기쁨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안 지키면 벌 받을까 두려워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를 드립니까? 아니면 구원의 희망으로 함께 하는 형제자매들간에 나누는 사랑의 기쁨, 또는 내 삶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주는 그 진실 때문에 예배를 드리고 신앙의 공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요한복음의 말씀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처럼 서로 근원에 잇대어 있고 더불어 외부와 교통하는 삶, 그리고 그 삶의 구체적인 표현으로서 서로 사랑을 나누는 삶, 서로를 동등한 존재로, 친구로 인정하며 사는 삶이 그 답입니다.
우리들 각자 저마다의 삶이 참 포도나무 줄기에 붙은 가지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이 교회 공동체가 그렇게 한 줄기에 연결되어 건강하게 자라고 열매 맺는 포도나무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일 때마다 만날 때마다 사랑을 나누며 위로를 받고 힘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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