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 마태복음 6:5~15 [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6-05-10 14:31
조회
126
2026년 5월 1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본문: 마태복음 6:5~15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며, 과연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올바를까요? 본문 말씀은 그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올바른 자선(6:1~4) 및 금식(6:16~18)과 더불어 올바른 기도에 관해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길게 이어지는 산상수훈(마태 5~7장)의 한 내용으로서, 팔복선언(5:1~12)과 함께 그 핵심이 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앞부분은 기도의 방법 내지는 자세에 관한 것이고(5:6~8), 그다음 부분은 그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5:9~13).
의례화된 형식에 매인 종교를 비판하셨던 예수님의 평소 언행으로 볼 때 격식화된 어떤 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 법도 하지만, 본문 말씀은 평소 예수님의 가르침과 잘 부합합니다.

성서에는 또 다른 주기도문이 나옵니다. 누가복음(11:2~4)에 나오는 주기도문입니다. 그 기도문은 마태복음의 그것과 거의 일치하지만 보다 간결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고,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십시오.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십시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우리가 용서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성서학자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짧은 편집문이 긴 편집문 속에 완전히 다 실려 있다면 짧은 것이 더 원래적인 것이라 간주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마태의 것보다는 누가의 것이 더 원래적인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주기도문보다 간결한 형태로 되어 있던 것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안에서 전승되는 가운데 그 본래 뜻의 왜곡 없이 적절하게 보완되고 다듬어진 셈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예수님의 말씀으로서 기도의 내용이 전승되고 있었는데, 그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형태로 최종 기록된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앞부분은 진정한 기도의 태도와 방법을 일깨워 주십니다. 형식화된 종교를 비판하신 예수님의 입장이 아주 잘 드러나 있습니다.
첫 번째, 기도할 때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회당과 큰길 모퉁이 곧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장소에서, 그야말로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의 태도를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특정한 정치적 성격을 띤 집회에서 영어로 기도하기도 합니다. 조찬 기도회에서는 권력자를 앞에 두고 찬사를 늘어놓으며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은밀히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기도란 하나님과의 내밀한 소통 행위입니다. 기도는 일방적인 자기 욕망의 표출이 아닌 하나님과의 내밀한 상호 교통입니다. 요란하게 떠들며 기도할 때 과연 내밀한 소통이 가능할까요? 자기의 큰 목소리 때문에 상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그것은 상호 소통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깊은 내면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정한 기도가 됩니다.
세 번째,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이방인들처럼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이방인들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세네카는 그렇게 자신의 욕망을 채워달라고 떼를 쓰며 내면의 평온을 찾지 못한 채 외부 환경에 휘둘리는 어리석은 모습을 두고 “신들을 지치게 만든다”고 꼬집었습니다. 인간에게 언어가 의사소통의 결정적인 수단이지만, 혀끝을 통해 드러난 언어가 의사소통 수단의 전부는 아닙니다. 눈빛만 보아도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일일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 알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신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깊은 신뢰 가운데 내면의 깊은 대화야말로 진정한 기도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방법을 알려주신 다음에 예수께서는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의 내용을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늘 되풀이하고 있는 주기도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교회가 시작된 첫해, 그러니까 2000년 7월 30일에 국어학자 박창해 장로께서 주기도문의 의미와 더불어 우리말답게 번역한 주기도문을 제시해 준 이래 그 주기도문을 따르고 있습니다. 2003년도에는 수요 성서연구의 일환으로 주의 기도를 석 달간 12회에 걸쳐 공부한 적도 있습니다. 그때도 마지막 특강은 박창해 선생께서 맡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2004년 8월 22일 주일부터, 그 가사에 김삼락 교우가 우리 가락으로 곡을 붙인 ‘주기도문송’을 예배에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이 우리 교회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전통을 형성해 왔습니다. 그렇게 함께 애써온 헌신이 우리의 신앙을 형성하는 데 얼마나 소중한 유산이 되고 있는지 생각할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무려 12회에 걸쳐 그 뜻을 나눴던 과정을 재연할 수는 없습니다. 단 한 번으로 간결하게 그 뜻을 새겨야 합니다.
주의 기도는 한 가지 부름말과 일곱 가지 비는 말과 한 가지 기리는 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비는 말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셔야만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세 가지와, 우리가 필요한 것을 비는 말 네 가지와, 기리는 말 하나가 들어 있습니다(박창해). 오늘은 그 의미를 하나하나 새길 수 없기에 그 기도문의 큰 뜻을 집약하여 헤아리고 새길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주의 기도는 아버지 앞에서 그 자녀들이 기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성적 역할을 함축하는 말이기보다는 ‘부모’, ‘어버이’로 관계를 맺는 분을 표상합니다. 다시 말해 주의 기도는 어버이와 자녀의 대화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대의 관념에 비추어 볼 때 놀라운 전환을 함축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도 놀랍지만, 그 뜻을 따르는 모든 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하는 것은 신앙의 질적 전환을 뜻합니다. 위엄과 두려움으로 다스리는 분이 아니라 전적인 사랑과 신뢰 가운데 함께하는 분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주의 기도의 밑바탕입니다.
시인 윤동주는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하고 목이 메인 듯 호흡을 멈추었다가, ‘어머니’를 떠올리며 아름다운 삶의 기억을 고스란히 되살려냅니다. 주의 기도의 밑바탕은 그와 같은 마음입니다.

그 믿음의 바탕 위에서 주의 기도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의 하나님을 향한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땅의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전반부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달라는 기도입니다(9~10). 이 기도는 곧바로 땅의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할 소망으로 연결됩니다. 일용할 양식과 용서를 구하고 아울러 유혹과 악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로 이어집니다(11~13).

사실상 산상수훈의 핵심에 해당하는 주의 기도는 예수님의 믿음을 드러내 주며,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정체성을 제시해 줍니다. 이 기도는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의 분리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곧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할 희망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신앙은 마음 한켠에서 고고하게 지키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받드는 사람은 그 뜻이 땅 위의 사람들 사이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기를 염원해야 합니다.
주의 기도는 그 진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늘을 향한 뜻과 땅을 향한 뜻은 그렇게 긴장 관계 속에서 얽혀 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 기도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역사 밖을 바라다보면서도 동시에 역사 안을 향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현실의 굴레를 뛰어넘어 모든 것을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합당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그와 같이 주의 기도는 온전한 인간의 해방을 염원하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민중신학자 문동환 목사는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주의 기도를 입에 올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독한 독설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주의 기도가 바로 그와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주의 기도는, 유식한 신학자의 신학적 담론도 교리주의자의 교리도 아닙니다. 바로 구체적인 땅의 현실을 처절한 아픔으로 느꼈던 이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일용할 양식 때문에 늘 허덕이는 현실, 서로 물고 물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고통스러운 현실, 언제나 떨치기 어려운 유혹을 겪어야 하는 현실, 마음은 원이로되 도무지 선을 행할 수 없게 만드는 악의 현실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실존적 체험이 주의 기도의 밑바탕입니다.
그 현실은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지고, 하나님의 뜻이 가로막힌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느꼈던 그 현실, 그리고 모두가 느끼고 있는 그 현실을 회피해서 위선적인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주의 기도는, 그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찾을 때 진실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주의 기도가 절망의 탄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의 기도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희망의 외침입니다. 그 믿음이 없이는 드릴 수 없는 기도입니다. 이 점에서 주의 기도는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첫째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자각 없이 드릴 수 없는 기도요, 둘째 그러나 희망 없이 드릴 수 없는 기도, 그것이 주의 기도입니다.
주의 기도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사건을 염원하고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땅의 현실 가운데 평화스러운 하늘의 실재가 임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곧 주의 기도입니다.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드리는 주의 기도는 빈말이 됩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삶 가운데서 그렇게 하늘과 땅이 만나는 체험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역사의 현장 가운데서 그 놀라운 사건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 안에서 그 체험은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하늘의 뜻이 땅에 이뤄지기를 바라는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이 땅의 삶 안에서 어버이로 부르고 자녀로 부르는 그 관계 안에서, 내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서, 신실한 믿음으로 함께하는 공동체 안에서 그 체험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그 모든 것들을 감사히 여기고 신실한 믿음으로 함께할 때 우리에게 그 놀라운 사건이 일어날 것입니다. 어버이에게서, 자녀에게서, 함께하는 동반자에게서, 동료와 이웃에게서, 뿐만 아니라 전혀 낯선 이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면 놀라운 일이요 감사할 일입니다. 주의 기도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주의 기도를 반복할 때,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 가운데서 진정한 하늘의 평화를 누리고자 하는 소망을 다시금 확인하고, 그 놀라운 사건에 동참하기 위한 결단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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