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진실 - 마태복음 11:25~30[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6-06-14 14:33
조회
907
2026년 6월 14(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단순한 진실
본문: 마태복음 11:25~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개역)
언제 들어도 절실한 말씀입니다. 저마다 짊어진 짐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수고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짐을 지지 않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삶 자체가 전적으로 고통일 수만은 없지만, 고통 없는 삶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언제나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이 말씀은 기록된 배경과 관련된 역사적 맥락, 그리고 더불어 바로 이 말씀 자체의 문맥에서 그 뜻을 분명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역사적 맥락은 거시적 배경 가운데서 마태 공동체가 처했던 처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며, 말씀 자체의 문맥은 그 공동체의 자기 인식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이 기록된 정황, 그 청중이 누구였는지는 대개 분명합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전쟁(66~73) 곧 로마가 유대를 완전히 멸망시킨 전쟁 직후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북부 시리아 남부의 유대계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기록되고 읽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청중이었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의 고통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 고통의 상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극한의 전쟁과 그에 이은 유대민족 국가의 멸망 상황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유대인이었기에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은 여전히 삶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건이었습니다. 사고방식, 의식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짓밟힌 민족의 백성으로서 실질적인 테러의 위협 아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소위 정통 유대인들로부터의 박해였습니다. 유대전쟁 후, 곧 나라가 사라진 후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전통을 강화함으로써 정체성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무리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박해받아 쫓겨납니다. 변방에 유대계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이를 계기로 해서였습니다. 복음서들은 사실 바로 그런 정황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의 극한적인 폭력 사태 이후 나라를 잃은 설움과 동시에 동족들로부터도 쫓겨나는 설움을 겪었던 것이 팔레스타인 주변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의 상황이었습니다. 이중의 폭력에 시달린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은 당시 유대계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공통되는 상황이었지만, 그 폭력적 상황, 특히 전쟁과 그 직후의 폭력적 상황을 가장 잘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 마태복음서입니다. 본문 말씀은 일차적으로 그 배경 가운데서 매우 절실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나한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11:28~30)
이 말씀이 얼마나 절실하게 다가왔을까요? 이 말씀은 바로 폭력적 상황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이방인들로부터 당하는 폭력, 동족들부터 당하는 폭력, 그것에서 벗어나 안식을 누리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그와 같은 거시적 배경 가운데서 의미뿐만 아니라 말씀 자체의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문맥에서 보면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자의식을 지니고 있는지 드러납니다.
본문 말씀은 크게 세 가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실이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 대신에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난 것에 대한 예수님의 감사 기도(11:25~26),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구현하신 예수님의 자의식(11:27), 그리고 진정한 평화로 이끄는 당신의 길을 따르라는 말씀(11:28~30)으로 이어집니다.
처음 두 마디의 말씀은 누가복음(10:21~22)과 거의 그대로 일치하며 그 문맥도 거의 유사합니다.
마태복음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탄식하는 말씀(11:20~24)에 이어집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는 데 반해 오히려 어린아이들이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감사하는 것으로 본문 말씀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조금 더 극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파송을 받았던 일흔두 사람이 파송 결과를 보고하는 대목(누가 10:17~20)에 이어집니다. 제자들이 보고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10:17) 그러자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10:18).
예수님께서 감사드린 일은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사탄이 무력하게 무너진 사건입니다. ‘대적하는 자’ ‘고발하는 자’라는 뜻을 지닌 ‘사탄’은 하나님의 뜻, 예수 그리스도의 길과 다른 세상의 지배 원리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섬김의 길이었다면 사탄의 길은 지배의 길이었습니다. ‘사탄이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일’, 그것은 세상 모든 사람을 사로잡고 있던 그 지배의 욕망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무너진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새로운 세계,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일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께 감사드린 사연은 단지 그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사건의 진실을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내 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예수께서는 더더욱 감사드립니다.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신 진실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은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와 지식에 능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밑지지 않는 영악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이며 그 권력자와 함께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철부지 어린아이들’은 그 세상에 물들지 않은 순진한 사람들입니다. 때 묻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영악한 세상의 지배 원리에 능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은 세상의 지배 원리에 능하지만 하늘의 일에는 무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도무지 모릅니다. 반면에 ‘철부지 어린아이’는 세상의 지배 원리에는 무지하지만 하늘의 뜻에는 밝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을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이들 앞에서 사탄은 무력해집니다. 암만 화려한 권세도 무력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께 감사드린 일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고귀한 몫을 맡겨주셨다는 것을 확인합니다(마태 11:27). 이 문맥에서 등장하는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철부지 어린아이들이야말로 그 진실을 제대로 알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거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현된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 헤아려 알 수 있습니다. 철부지 어린아이들이 알만한 진실이라면 그것이 결코 복잡하고 현란한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말씀(11:28~30)은 바로 그 진실을 따르는 길이 초래하는 결과와 그 요체를 밝혀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정한 안식을 누리고 싶은 모든 사람, 모든 영혼에 주는 진정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바로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길이요, 진정한 안식을 누리는 길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심리적 안정을 뛰어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현실을 벗어나 도피처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어딘가 도피하지 않고 삶 자체가 평화와 안식을 누리는 것을 뜻합니다. 평화로운 삶, 안식을 누리는 일상의 삶을 일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마태 11:29) ‘멍에’를 내팽개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지워진 멍에와는 다른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멍에는 ‘온유’와 ‘겸손’입니다. 그것은 도피와 방기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책무, 새로운 삶의 연대성에 대한 적극적 선택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은 그렇게 짐을 가볍게, 기쁘게 나누어 짊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보장하는 평화와 안식의 조건과는 전혀 다릅니다. 모든 것을 움켜쥐려는 ‘강포함’과 모든 것을 지배하는 ‘군림’이 아니라 ‘온유’와 ‘겸손’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마음의 자세일 뿐 아니라 삶의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 강포한 세상과 군림의 욕망이 지배하는 현실을 몰라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의 원리가 그렇기에 그것을 뒤바꾸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원리를 따르는 한 전쟁은 끊이지 않고, 전쟁터와 같은 일상의 삶 또한 계속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보낼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마태 10:16)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진함’입니다. ‘뱀 같은 지혜’는 세상을 이기는 방법을, ‘비둘기 같은 순진함’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물정을 너무 잘 아시기에 뱀 같이 슬기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은 비둘기 같은 순진함입니다.
이 둘 모두는 그저 마음먹기에 따라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살아가면서 그 지배 질서를 넘어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부단히 노력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더불어 진정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도 부단히 노력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세상은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그 가운데 진정한 평화의 갈망과 평화의 소명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10일(수) 민주화운동기념관에서 제39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분들에 대한 훈장 추서와 더불어 기관에 대한 대통령 표창이 있었습니다. 시인 김남주 선생 외에 조용술 목사, 최성묵 목사, 홍근수 목사, 허병섭 목사, 신삼석 목사, 정법영 전도사, 강은기 장로 등을 비롯하여 여러 교계 인사들이 훈장을 추서받았고,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와 더불어 한국교회인권센터가 대통령 표창을 받았습니다. 고난과 헌신을 대한민국 정부가 공로로 인정한 것은 그 뜻에 함께하겠다는 약속과 의지의 표현으로 고무적인 일입니다.
그 헌신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로 인해 오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평화가 이뤄진 것 또한 분명한 진실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헌신의 여정에 함께한 뜻이 어디에 있을까요? 아주 단순한 진실에 그 답이 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그리스도의 멍에를 함께 지고자 한 뜻을 따른 데 있습니다. 불의에 저항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삶을 지향한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야 할 길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진실로 이 길을 따르는 것이 평화의 길입니다. 그 길을 따르도록 교회가 앞장서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야 합니다. 그렇게 나아갈 때 우리들 저마다 일상의 평화로운 삶 또한 찾아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평화의 소명에 응답함으로써 진정한 삶의 평화를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제목: 단순한 진실
본문: 마태복음 11:25~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개역)
언제 들어도 절실한 말씀입니다. 저마다 짊어진 짐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수고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짐을 지지 않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삶 자체가 전적으로 고통일 수만은 없지만, 고통 없는 삶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언제나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이 말씀은 기록된 배경과 관련된 역사적 맥락, 그리고 더불어 바로 이 말씀 자체의 문맥에서 그 뜻을 분명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역사적 맥락은 거시적 배경 가운데서 마태 공동체가 처했던 처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며, 말씀 자체의 문맥은 그 공동체의 자기 인식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이 기록된 정황, 그 청중이 누구였는지는 대개 분명합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전쟁(66~73) 곧 로마가 유대를 완전히 멸망시킨 전쟁 직후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북부 시리아 남부의 유대계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기록되고 읽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청중이었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의 고통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 고통의 상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극한의 전쟁과 그에 이은 유대민족 국가의 멸망 상황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유대인이었기에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은 여전히 삶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건이었습니다. 사고방식, 의식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짓밟힌 민족의 백성으로서 실질적인 테러의 위협 아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소위 정통 유대인들로부터의 박해였습니다. 유대전쟁 후, 곧 나라가 사라진 후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전통을 강화함으로써 정체성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무리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박해받아 쫓겨납니다. 변방에 유대계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이를 계기로 해서였습니다. 복음서들은 사실 바로 그런 정황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의 극한적인 폭력 사태 이후 나라를 잃은 설움과 동시에 동족들로부터도 쫓겨나는 설움을 겪었던 것이 팔레스타인 주변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의 상황이었습니다. 이중의 폭력에 시달린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은 당시 유대계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공통되는 상황이었지만, 그 폭력적 상황, 특히 전쟁과 그 직후의 폭력적 상황을 가장 잘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 마태복음서입니다. 본문 말씀은 일차적으로 그 배경 가운데서 매우 절실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나한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11:28~30)
이 말씀이 얼마나 절실하게 다가왔을까요? 이 말씀은 바로 폭력적 상황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이방인들로부터 당하는 폭력, 동족들부터 당하는 폭력, 그것에서 벗어나 안식을 누리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그와 같은 거시적 배경 가운데서 의미뿐만 아니라 말씀 자체의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문맥에서 보면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자의식을 지니고 있는지 드러납니다.
본문 말씀은 크게 세 가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실이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 대신에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난 것에 대한 예수님의 감사 기도(11:25~26),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구현하신 예수님의 자의식(11:27), 그리고 진정한 평화로 이끄는 당신의 길을 따르라는 말씀(11:28~30)으로 이어집니다.
처음 두 마디의 말씀은 누가복음(10:21~22)과 거의 그대로 일치하며 그 문맥도 거의 유사합니다.
마태복음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탄식하는 말씀(11:20~24)에 이어집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는 데 반해 오히려 어린아이들이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감사하는 것으로 본문 말씀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조금 더 극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파송을 받았던 일흔두 사람이 파송 결과를 보고하는 대목(누가 10:17~20)에 이어집니다. 제자들이 보고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10:17) 그러자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10:18).
예수님께서 감사드린 일은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사탄이 무력하게 무너진 사건입니다. ‘대적하는 자’ ‘고발하는 자’라는 뜻을 지닌 ‘사탄’은 하나님의 뜻, 예수 그리스도의 길과 다른 세상의 지배 원리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섬김의 길이었다면 사탄의 길은 지배의 길이었습니다. ‘사탄이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일’, 그것은 세상 모든 사람을 사로잡고 있던 그 지배의 욕망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무너진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새로운 세계,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일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께 감사드린 사연은 단지 그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사건의 진실을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내 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예수께서는 더더욱 감사드립니다.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신 진실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은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와 지식에 능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밑지지 않는 영악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이며 그 권력자와 함께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철부지 어린아이들’은 그 세상에 물들지 않은 순진한 사람들입니다. 때 묻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영악한 세상의 지배 원리에 능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은 세상의 지배 원리에 능하지만 하늘의 일에는 무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도무지 모릅니다. 반면에 ‘철부지 어린아이’는 세상의 지배 원리에는 무지하지만 하늘의 뜻에는 밝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을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이들 앞에서 사탄은 무력해집니다. 암만 화려한 권세도 무력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께 감사드린 일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고귀한 몫을 맡겨주셨다는 것을 확인합니다(마태 11:27). 이 문맥에서 등장하는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철부지 어린아이들이야말로 그 진실을 제대로 알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거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현된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 헤아려 알 수 있습니다. 철부지 어린아이들이 알만한 진실이라면 그것이 결코 복잡하고 현란한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말씀(11:28~30)은 바로 그 진실을 따르는 길이 초래하는 결과와 그 요체를 밝혀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정한 안식을 누리고 싶은 모든 사람, 모든 영혼에 주는 진정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바로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길이요, 진정한 안식을 누리는 길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심리적 안정을 뛰어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현실을 벗어나 도피처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어딘가 도피하지 않고 삶 자체가 평화와 안식을 누리는 것을 뜻합니다. 평화로운 삶, 안식을 누리는 일상의 삶을 일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마태 11:29) ‘멍에’를 내팽개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지워진 멍에와는 다른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멍에는 ‘온유’와 ‘겸손’입니다. 그것은 도피와 방기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책무, 새로운 삶의 연대성에 대한 적극적 선택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은 그렇게 짐을 가볍게, 기쁘게 나누어 짊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보장하는 평화와 안식의 조건과는 전혀 다릅니다. 모든 것을 움켜쥐려는 ‘강포함’과 모든 것을 지배하는 ‘군림’이 아니라 ‘온유’와 ‘겸손’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마음의 자세일 뿐 아니라 삶의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 강포한 세상과 군림의 욕망이 지배하는 현실을 몰라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의 원리가 그렇기에 그것을 뒤바꾸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원리를 따르는 한 전쟁은 끊이지 않고, 전쟁터와 같은 일상의 삶 또한 계속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보낼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마태 10:16)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진함’입니다. ‘뱀 같은 지혜’는 세상을 이기는 방법을, ‘비둘기 같은 순진함’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물정을 너무 잘 아시기에 뱀 같이 슬기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은 비둘기 같은 순진함입니다.
이 둘 모두는 그저 마음먹기에 따라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살아가면서 그 지배 질서를 넘어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부단히 노력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더불어 진정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도 부단히 노력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세상은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그 가운데 진정한 평화의 갈망과 평화의 소명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10일(수) 민주화운동기념관에서 제39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분들에 대한 훈장 추서와 더불어 기관에 대한 대통령 표창이 있었습니다. 시인 김남주 선생 외에 조용술 목사, 최성묵 목사, 홍근수 목사, 허병섭 목사, 신삼석 목사, 정법영 전도사, 강은기 장로 등을 비롯하여 여러 교계 인사들이 훈장을 추서받았고,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와 더불어 한국교회인권센터가 대통령 표창을 받았습니다. 고난과 헌신을 대한민국 정부가 공로로 인정한 것은 그 뜻에 함께하겠다는 약속과 의지의 표현으로 고무적인 일입니다.
그 헌신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로 인해 오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평화가 이뤄진 것 또한 분명한 진실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헌신의 여정에 함께한 뜻이 어디에 있을까요? 아주 단순한 진실에 그 답이 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그리스도의 멍에를 함께 지고자 한 뜻을 따른 데 있습니다. 불의에 저항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삶을 지향한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야 할 길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진실로 이 길을 따르는 것이 평화의 길입니다. 그 길을 따르도록 교회가 앞장서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야 합니다. 그렇게 나아갈 때 우리들 저마다 일상의 평화로운 삶 또한 찾아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평화의 소명에 응답함으로써 진정한 삶의 평화를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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