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교회의 공적 역할 - 로마서 12:17~21[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6-06-28 15:04
조회
682
2026년 6월 2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교회의 공적 역할
본문: 로마서 12:17~21



로마제국의 변방 유대 땅에서 그 제국이 가장 혐오하고 경멸하는 방식으로 처형당한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신앙이 도대체 어떻게 거꾸로 로마제국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을까요?
놀랍도록 일관되고 집요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윤리를 빼놓고는 그 현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따라 하게 만든, 세계관과 그에 따른 실천적 윤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세상의 질서에 매여 그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인간이 마땅히 살아야 할 길을 일깨워주고, 불가능한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게 삶을 살아간 사람들의 모범이 결국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게 된 것입니다. 복음의 보편성은 그렇게 실현되었습니다.
로마서의 본문 말씀은, 바로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의 삶에서 지향한 윤리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체로 사도 바울의 서신들은 구체적인 공동체의 상황에 대응하여 변화무쌍한 언어로 이런저런 권면을 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저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어의 편차가 없지는 않지만, 대체로 일관된 신학적 입장에 따라 구체적인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로마서의 말씀은, 여기저기 서신에서 말했던 내용을 정제된 형태로 정리한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바울이 다른 교회 공동체에 보낸 서신의 경우는 스스로 공동체를 세웠거나 방문하고 지도한 적이 있어 그 상황을 알고 있고, 그런 만큼 구체적 사안에 대한 권면을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아직 로마교회에 방문해 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전한 편지입니다. 그러기에 이 서신은 일종의 자기소개서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고, 그런 만큼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정제된 언어로 가다듬어 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전반부(1~11장)가 주로 믿음을 주제로 한다면, 본문 말씀이 포함된 후반부(12:1~15:13)는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가 주로 믿음을 주제로 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은 믿음의 요체로서 사랑을 역설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부차적 효과로서 윤리를 말한다기보다 신앙의 요체로서 사랑의 윤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12:17~21)은 공동체 내부의 윤리(12:9~13)에 이어 공동체 외부를 포함하는 보편적 윤리(12:14~21)를 말하는 대목의 후반부입니다. 심지어 적대자들까지 유념하는 가운데 지향해야 할 윤리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공동체 내외부 모두 공통되는 윤리의 기초는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 열심을 내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며, 환난 가운데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십시오. 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십시오.”(12:9~13)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윤리적 덕목을 말할 때 당시 그리스-로마 세계 스토아철학의 윤리적 덕목을 수용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수용하지 않고 자신의 관점에서 변용하거나 덧붙입니다. 가장 두드러진 것 가운데 하나가 모든 윤리적 덕목의 기초로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궁극적 지평을 함축하는 동시에 구체적인 인간관계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바울의 임의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서 그 사랑이야말로 가장 근본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권면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그 느낌이 어떨까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그래야 하고, 나도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겠다 하고 다짐할 만합니다. 가능성의 윤리입니다.

권면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한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12:14~16)
이 권면 역시 사랑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며, 서로 한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 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의 실체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는 것은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공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황금률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모든 위대한 정신세계가 가르치고 있는 그 태도가 어떻게 가능한지 분명한 어조로 말합니다.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는 태도에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굳이 줄여 말하면 ‘겸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겸손의 미덕은 그리스도교가 배경으로 하는 유대교나 그리스-로마의 가르침에서는 권장되지 않았습니다. 유대교에서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강제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졌고,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그것이 노예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지 자유인에게는 어울리지 않은 것이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겸손, 곧 낮아짐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바울의 깨달음에서 비롯됩니다.

적대자들에게도 그와 같이 하라고 합니다. 더욱 놀라운 점입니다. 본문 말씀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신 32:35) 하였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잠 25:21~22) 하였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12:17~21)
이 말씀을 들으면 그 느낌이 어떻습니까? 옳은 말씀인 것 같기는 하지만, 과연 가능할까 하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불가능성의 윤리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했던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울에게서 이와 같이 변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의에 대한 분노를 접으라는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며, 불의와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고전 13:6).
줄여 말하면,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할지언정 저주하지 말라고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합니다. 불의와 악을 미워하기에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은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악을 척결하겠다는 것이 더 큰 악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 악순환을 넘어서기 위한 길로서 원수들을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할까요? 흔히 말하기를 죄는 미워할지언정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문제는 그 말뜻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바울 역시 그 불가능성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12:18) ‘할 수 있는 대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당장 그렇게 하기 쉽지 않지만, 그렇게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바울은 다시 강조합니다. 원수 갚는 일을 스스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라 합니다. 심지어는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것이 될 것이다”(잠언 25:21~22). 여기에 머리 위에 숯불을 얹는다는 것은 언뜻 보기에 ‘뜨거운 맛을 보여 준다’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은 고대 근동, 특히 이집트에서 참회 의식을 유념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참회할 때 그 표시로 머리에 숯불을 얹는 관습을 말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는 행위를 보며, 원수가 스스로 낯 뜨겁게 느끼며 참회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라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는 회의가 나올 법합니다. 선의를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벌어지는데, 악의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선의를 베풀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이 교훈은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바라는 궁극적 가르침으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덕목을 실천할 때 우리는 자신감을 얻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자기 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실천하고자 할 때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진정한 초월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가능한 것만 하고 산다면 우리에게 새삼스러운 어떤 목표가 필요 없습니다. 지금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마땅히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키는 데 절실히 요구되는 것, 그것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여정입니다.

일본 군국주의 전범들을 분석한 정신과 의사의 심층 보고서 『전쟁과 죄책』(노다 마사아키)은 전쟁범죄자들이 자신들의 죄를 어떻게 인지하게 되는지 깊이 있게 다룹니다. 뜻밖에도 인간적 대우를 받으며 자신들이 한 일을 꼼꼼히 기록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자신들이 타인을 비인간으로 여기며 저지른 죄의 실체를 인식하게 됩니다.

본문 말씀에서 바울 역시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윤리를 극한까지 확장합니다. 그것은 망상이 아닙니다. 그 통찰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성찰의 핵심은 자신의 고통에 대한 성찰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성찰과 공감으로 이어지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타인, 심지어는 적대자에게까지도 확장될 때 진정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기왕에 자신들의 범위에 있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공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신앙의 위대함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사랑의 위대함은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놀라운 사랑의 힘, 믿음의 힘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여전히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는 교회들이 많지만, 오늘 우리 사회에서 교회는 신뢰받고 있지 못합니다.
한국 개신교는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공적 역할을 담당해 왔습니다. 교육, 의료, 민주화 운동, 인권의 신장 등에서 개신교는 국가 권력과 시장 사이에서 건강한 시민사회의 형성에 기여해 왔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한국 개신교의 성장 과정은 단순한 교세 확장의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근대 교육과 사회 개혁,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개신교는 한국 사회의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사실상 교회 성장과 동일시되는 교회 공동체의 확장도 급격한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아노미 현상을 극복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할 만하였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할 수 있는 도덕적 가치와 공공적 언어를 제공하며 안전한 공간이 되는 역할을 맡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때 개신교는 민주주의, 공동체, 사회적 약자 보호 등의 가치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개신교는 그 역할을 상실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극우와 동조하는 개신교의 정치 참여가 신앙의 공적 표현으로서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동원의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묵은 반공주의, 문화적 보수주의, 그리고 사회적 소수자 이슈 등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가운데 종교적 언어가 정치적 갈등의 언어로 전락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오늘 개신교의 위기는 교세의 감소가 아니라 시민사회로부터 신뢰의 철회라는 것이 그 본질적 요체입니다. 이 엄중한 현실을 직시해야만 그 대안 또한 적절히 찾아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사회적 소통 능력을 강화하고 공공성을 회복하는 방향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는 교회의 정치적 참여를 포기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느 편에 서든 그 정치적 참여는 신앙의 한 표현이자 책임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정치 참여가 진영논리를 강화하고 따라서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로부터 벗어나 민주주의, 인권, 평화, 그리고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의 정당한 권리 옹호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지향할 때 추락한 사회적 신뢰의 회복이 가능합니다.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그 가치를 실현하고 체험할 때 우리는 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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