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은 기적을, 그리스인은 지혜를 구하지만 - 고린도전서 1:18~25[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6-07-19 13:32
조회
359
2026년 7월 1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유대인은 기적을, 그리스인은 지혜를 구하지만
본문: 고린도전서 1:18~25
온갖 지식이 넘쳐나고 수없이 많은 주장이 펼쳐지는 오늘의 세계 가운데서 무엇이 과연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할 길일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매순간 그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분파로 나누어져 다투고 있는 고린도교회 교우들을 향하여 애정 어린 권고를 합니다. 고린도교회에 주는 서신은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권하고 있지만, 나아가 복음의 요체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줍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가 믿는 구원의 도가 어떤 것인지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1:18)
이어 세상에서 널리 신봉되는 지혜의 허망함을 말하고, 그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당대의 두 가지 지혜를 말하며 이와 대비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의미를 역설합니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1:22~23a)
유대인이 구하는 기적과 그리스인이 구하는 지혜, 이 두 가지는 모두 당시의 세상을 지배하고 좌우하는 통념이요 가치관이며, 동시에 사도 바울이 보기에 잘못된 가치관입니다.
유대인이 구하는 기적이 무엇일까요? 기적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게 뭔가를 해주기를 기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들 자신의 주장과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기대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신실해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요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욕구와 기대에 부응하는 것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사실상 자기 숭배요, 우상숭배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른바 능력주의, 업적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여기에서 독특한 선민의식이 자리합니다. 가시적인 형태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것으로 믿는 이들은 선민이 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배제됩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결코 특정한 사람에게 독점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은총을 독점한 듯이 여기는 태도가 굳어집니다. 겉으로 볼 때 그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캄캄한 죄인의 세계로 내몰립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주의의 폐해를 집요하게 비판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믿음의 밑바탕에 사실은 자기 의에 대한 확신, 자기 능력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오셨다(마가 2:17, 마태 9:13, 누가 5:32)고 선포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스스로 신실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죄인이라 몰아 부친 사람들이 처한 형편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진실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들의 믿음은 허망하다.’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구하는 유대 바리새인들을 향해 질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과시의 표징으로서 기적을 거부하고, 오직 요나의 기적 이외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마가 8:11~13; 누가 11:29~32; 마태 12:38~42). 요나의 기적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철저한 자기부정을 통한 거듭남을 뜻합니다. 그 거듭남 없이 기적을 바라는 것은 자기과시의 욕망, 자기 의에 대한 과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기적을 요구하는 태도의 함정입니다.
그리스인들이 구하는 지혜는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잘못된 지혜로서 그리스인들이 추구하는 지혜란, 한마디로 실천과 괴리된 사변적 지혜를 말합니다. 사실 세상의 어떤 종교나 사상도 그 실천적 의의를 스스로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그 지혜가 정말로 인간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보편 타당성을 지니며, 그것이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실천적 지혜로서 의미를 지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신봉되는 많은 지혜는 저마다 보편 타당성을 자임하지만, 그것은 특정한 사람들의 이데올로기이자 편견에 지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은, 그리스인이 추구하는 지혜가 그렇게 허망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성취한 지혜는 오늘날까지도 널리 신봉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일거에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해버린 그 지혜는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요? 초기 교회에 특별히 영향을 끼친 것은 플라톤의 사상이었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그리스인들의 지혜란 그것이 교회 안에서 변용된 어떤 경향을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영적 지혜’ 내지는 ‘이데아’를 추구했습니다. 현실은 허상이거나 불완전한 반면 완전한 이상 세계는 피안의 영적 세계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모순투성이의 현실이 아니라, 완벽한 질서가 조화를 이루는 이데아의 영적 세계를 추구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 들어 온 것이 영지주의입니다. 육체를 지닌 인간의 삶은 허망하니 영적 지혜의 세계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우 그럴듯한 구원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육신을 지닌 예수님의 삶이 무가치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끈질기게 싸운 것이 바로 그 영지주의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선언(요한 1:14)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 줍니다. 사도 바울 역시 불가피하게 그리스적 지혜의 개념들을 사용하면서도, 영육이 동시에 깃든 존재로서 몸을 강조하고 그 몸의 변화를 말합니다. 구원은 엉뚱한 데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몸의 현실, 일상의 현실을 피해 감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새롭게 변화시켜 감으로써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 여정을 회피하는 영적 지혜는 무가치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기만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 영적 지혜를 얻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허구적 세계 안에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 세속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자족적 세계관이었습니다.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로 시달려야 하는 사람이 그 세계관을 따를 경우, 그 결과는 끊임없는 자책과 모멸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이 추구하는 기적, 그리스인이 추구하는 지혜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그저 자족적인 세계관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늘 먹고사는 문제로 시달려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희망도 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신봉되고 집요하게 강요되는 허구적인 믿음이었다는 데 그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진정한 지혜를 역설합니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1:22~25)
십자가는 하나님마저도 자신을 부정하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예수의 몸을 입었다는 진실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자기부정 행위입니다. 전지전능하고 특별한 능력을 지닌 하나님께서 평범한 인간의 일상으로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모든 것이 끝장나는 십자가의 죽음에 하나님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하나님의 자기부정은 절정에 이릅니다. 이것은 오직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고만 믿던 유대인들에게는 도무지 가당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거리낌’이라 번역한 말은 ‘스칸달론’ 곧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진실이었습니다. 이 진실은 하나님을 자신의 욕망 충족 수단으로 삼아 왔던 사람들의 태도를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하나님마저도 당신의 특별한 능력을 거부한 사건, 그것이 곧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자족적인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부조리하고 처참한 세계 현실을 바라보라는 촉구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진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지혜로 볼 때 어리석은 짓입니다. 악한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는 이길 만한 힘을 갖추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그 상식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자기 몸을 내던짐으로써 부조리한 세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줄 뿐입니다. 약함도 강함도 없는 구원의 세계는, 지금 현실의 약함을 피해 가는 데서가 아니라 약한 것의 가장 약한 나락으로까지 나를 버리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증언합니다. 모순으로 가득 찬 육체의 현실을 내버려두고 영적 세계를 추구하는 것은 결단코 구원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십자가의 길은 보여 줍니다.
세상에서 신봉되는 지혜의 관점에서 볼 때, 십자가 사건은 놀라운 신의 능력을 보여 준 사건도 아니요, 고상한 지혜를 일깨워주는 사건도 아닙니다. 그 불가해한 사건을 두고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 말하는 뜻이 어디에 있을까요?
바울이 보기에 십자가 사건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인간 삶에 개입해 들어오는 극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은 주술적인 어떤 효과를 지닌 사건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인간의 삶 가운데 개입해 들어오시는 사건입니다. 바로 그 사건의 의미를 깨닫고 받아들일 때 인간이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에 이른다는 것을 본문 말씀은 역설합니다. 그 뜻은 유대인이 추구하는 기적과 그리스인이 추구하는 지혜와 대비하여 이해할 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모순덩어리의 현실을 뛰어넘어 놀라운 일이 일어나거나 그 현실 너머 고상한 어떤 세계를 그리는 가운데 구원이 있지 않고, 십자가가 증언하는 그 말이 안 되는 사태 그 자체의 의미를 분명히 깨닫는 데서 구원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정말 말이 안 되는 사건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잔혹한 인간의 처형 방식으로 사형당합니까? 어떻게 단지 사람을 사랑했을 뿐인 사람이 그렇게 처참하게 사형당합니까?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 왔던 삶의 질서가 그렇게 충격적이라는 것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현실을 지배하는 그 엄연한 진실을 깨닫는 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이로부터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에게 이릅니다. 본문 말씀은 이 진실을 선포합니다.
오늘 우리는 갖가지 지식의 홍수 가운데 헛된 지혜에 매여 있거나 강요당하는 현실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마저 그 헛된 지혜로 오염되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기보다 자기 욕망의 투사로서 만들어진 신을 숭배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세계와 인간에 관한 많은 주장들은 또 얼마나 허망합니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믿음을 지향해야 합니다. 하나님마저도 자신의 몸을 던져 세상의 부조리를 드러내신 십자가 진실의 의미를 새기며 자신을 비우고 열어놓는 데서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에 이를 수 있습니다.
믿음은 그저 객관적 사실을 확인하고 그 이치를 파악하는 것으로만 형성되지 않습니다. 사물의 이치를 파악하는 지혜가 뛰어나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이해할 뿐 아니라 그것이 주는 의미를 깨달을 때 비로소 형성됩니다. ‘사실이 이러하니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깨달음과 결단을 동반할 때 믿음은 비로소 온전해집니다. 그 믿음이 우리가 바라는 세계를 향한 선한 행동으로 인도합니다.
무엇이 정말 인간을 위한 길인지, 무엇이 모든 생명이 더불어 삶의 기쁨을 누리는 길인지 분별하고, 그 길에 동참하는 결단을 동반할 때 우리는 진정한 지혜를 바탕으로 하는 믿음의 동행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막연한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온갖 허망한 지혜들이 판을 치는 현실 가운데서, 어떻게 진정한 지혜로 세상을 분별하고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진실을 깨닫고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로 새로운 세상을 이루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며, 교회는 바로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모두 진정한 지혜로 생명의 길을 걷기를 기원합니다.*
제목: 유대인은 기적을, 그리스인은 지혜를 구하지만
본문: 고린도전서 1:18~25
온갖 지식이 넘쳐나고 수없이 많은 주장이 펼쳐지는 오늘의 세계 가운데서 무엇이 과연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할 길일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매순간 그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분파로 나누어져 다투고 있는 고린도교회 교우들을 향하여 애정 어린 권고를 합니다. 고린도교회에 주는 서신은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권하고 있지만, 나아가 복음의 요체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줍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가 믿는 구원의 도가 어떤 것인지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1:18)
이어 세상에서 널리 신봉되는 지혜의 허망함을 말하고, 그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당대의 두 가지 지혜를 말하며 이와 대비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의미를 역설합니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1:22~23a)
유대인이 구하는 기적과 그리스인이 구하는 지혜, 이 두 가지는 모두 당시의 세상을 지배하고 좌우하는 통념이요 가치관이며, 동시에 사도 바울이 보기에 잘못된 가치관입니다.
유대인이 구하는 기적이 무엇일까요? 기적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게 뭔가를 해주기를 기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들 자신의 주장과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기대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신실해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요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욕구와 기대에 부응하는 것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사실상 자기 숭배요, 우상숭배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른바 능력주의, 업적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여기에서 독특한 선민의식이 자리합니다. 가시적인 형태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것으로 믿는 이들은 선민이 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배제됩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결코 특정한 사람에게 독점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은총을 독점한 듯이 여기는 태도가 굳어집니다. 겉으로 볼 때 그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캄캄한 죄인의 세계로 내몰립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주의의 폐해를 집요하게 비판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믿음의 밑바탕에 사실은 자기 의에 대한 확신, 자기 능력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오셨다(마가 2:17, 마태 9:13, 누가 5:32)고 선포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스스로 신실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죄인이라 몰아 부친 사람들이 처한 형편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진실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들의 믿음은 허망하다.’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구하는 유대 바리새인들을 향해 질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과시의 표징으로서 기적을 거부하고, 오직 요나의 기적 이외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마가 8:11~13; 누가 11:29~32; 마태 12:38~42). 요나의 기적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철저한 자기부정을 통한 거듭남을 뜻합니다. 그 거듭남 없이 기적을 바라는 것은 자기과시의 욕망, 자기 의에 대한 과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기적을 요구하는 태도의 함정입니다.
그리스인들이 구하는 지혜는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잘못된 지혜로서 그리스인들이 추구하는 지혜란, 한마디로 실천과 괴리된 사변적 지혜를 말합니다. 사실 세상의 어떤 종교나 사상도 그 실천적 의의를 스스로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그 지혜가 정말로 인간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보편 타당성을 지니며, 그것이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실천적 지혜로서 의미를 지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신봉되는 많은 지혜는 저마다 보편 타당성을 자임하지만, 그것은 특정한 사람들의 이데올로기이자 편견에 지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은, 그리스인이 추구하는 지혜가 그렇게 허망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성취한 지혜는 오늘날까지도 널리 신봉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일거에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해버린 그 지혜는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요? 초기 교회에 특별히 영향을 끼친 것은 플라톤의 사상이었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그리스인들의 지혜란 그것이 교회 안에서 변용된 어떤 경향을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영적 지혜’ 내지는 ‘이데아’를 추구했습니다. 현실은 허상이거나 불완전한 반면 완전한 이상 세계는 피안의 영적 세계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모순투성이의 현실이 아니라, 완벽한 질서가 조화를 이루는 이데아의 영적 세계를 추구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 들어 온 것이 영지주의입니다. 육체를 지닌 인간의 삶은 허망하니 영적 지혜의 세계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우 그럴듯한 구원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육신을 지닌 예수님의 삶이 무가치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끈질기게 싸운 것이 바로 그 영지주의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선언(요한 1:14)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 줍니다. 사도 바울 역시 불가피하게 그리스적 지혜의 개념들을 사용하면서도, 영육이 동시에 깃든 존재로서 몸을 강조하고 그 몸의 변화를 말합니다. 구원은 엉뚱한 데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몸의 현실, 일상의 현실을 피해 감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새롭게 변화시켜 감으로써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 여정을 회피하는 영적 지혜는 무가치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기만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 영적 지혜를 얻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허구적 세계 안에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 세속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자족적 세계관이었습니다.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로 시달려야 하는 사람이 그 세계관을 따를 경우, 그 결과는 끊임없는 자책과 모멸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이 추구하는 기적, 그리스인이 추구하는 지혜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그저 자족적인 세계관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늘 먹고사는 문제로 시달려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희망도 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신봉되고 집요하게 강요되는 허구적인 믿음이었다는 데 그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진정한 지혜를 역설합니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1:22~25)
십자가는 하나님마저도 자신을 부정하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예수의 몸을 입었다는 진실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자기부정 행위입니다. 전지전능하고 특별한 능력을 지닌 하나님께서 평범한 인간의 일상으로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모든 것이 끝장나는 십자가의 죽음에 하나님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하나님의 자기부정은 절정에 이릅니다. 이것은 오직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고만 믿던 유대인들에게는 도무지 가당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거리낌’이라 번역한 말은 ‘스칸달론’ 곧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진실이었습니다. 이 진실은 하나님을 자신의 욕망 충족 수단으로 삼아 왔던 사람들의 태도를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하나님마저도 당신의 특별한 능력을 거부한 사건, 그것이 곧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자족적인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부조리하고 처참한 세계 현실을 바라보라는 촉구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진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지혜로 볼 때 어리석은 짓입니다. 악한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는 이길 만한 힘을 갖추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그 상식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자기 몸을 내던짐으로써 부조리한 세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줄 뿐입니다. 약함도 강함도 없는 구원의 세계는, 지금 현실의 약함을 피해 가는 데서가 아니라 약한 것의 가장 약한 나락으로까지 나를 버리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증언합니다. 모순으로 가득 찬 육체의 현실을 내버려두고 영적 세계를 추구하는 것은 결단코 구원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십자가의 길은 보여 줍니다.
세상에서 신봉되는 지혜의 관점에서 볼 때, 십자가 사건은 놀라운 신의 능력을 보여 준 사건도 아니요, 고상한 지혜를 일깨워주는 사건도 아닙니다. 그 불가해한 사건을 두고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 말하는 뜻이 어디에 있을까요?
바울이 보기에 십자가 사건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인간 삶에 개입해 들어오는 극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은 주술적인 어떤 효과를 지닌 사건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인간의 삶 가운데 개입해 들어오시는 사건입니다. 바로 그 사건의 의미를 깨닫고 받아들일 때 인간이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에 이른다는 것을 본문 말씀은 역설합니다. 그 뜻은 유대인이 추구하는 기적과 그리스인이 추구하는 지혜와 대비하여 이해할 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모순덩어리의 현실을 뛰어넘어 놀라운 일이 일어나거나 그 현실 너머 고상한 어떤 세계를 그리는 가운데 구원이 있지 않고, 십자가가 증언하는 그 말이 안 되는 사태 그 자체의 의미를 분명히 깨닫는 데서 구원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정말 말이 안 되는 사건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잔혹한 인간의 처형 방식으로 사형당합니까? 어떻게 단지 사람을 사랑했을 뿐인 사람이 그렇게 처참하게 사형당합니까?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 왔던 삶의 질서가 그렇게 충격적이라는 것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현실을 지배하는 그 엄연한 진실을 깨닫는 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이로부터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에게 이릅니다. 본문 말씀은 이 진실을 선포합니다.
오늘 우리는 갖가지 지식의 홍수 가운데 헛된 지혜에 매여 있거나 강요당하는 현실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마저 그 헛된 지혜로 오염되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기보다 자기 욕망의 투사로서 만들어진 신을 숭배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세계와 인간에 관한 많은 주장들은 또 얼마나 허망합니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믿음을 지향해야 합니다. 하나님마저도 자신의 몸을 던져 세상의 부조리를 드러내신 십자가 진실의 의미를 새기며 자신을 비우고 열어놓는 데서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에 이를 수 있습니다.
믿음은 그저 객관적 사실을 확인하고 그 이치를 파악하는 것으로만 형성되지 않습니다. 사물의 이치를 파악하는 지혜가 뛰어나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이해할 뿐 아니라 그것이 주는 의미를 깨달을 때 비로소 형성됩니다. ‘사실이 이러하니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깨달음과 결단을 동반할 때 믿음은 비로소 온전해집니다. 그 믿음이 우리가 바라는 세계를 향한 선한 행동으로 인도합니다.
무엇이 정말 인간을 위한 길인지, 무엇이 모든 생명이 더불어 삶의 기쁨을 누리는 길인지 분별하고, 그 길에 동참하는 결단을 동반할 때 우리는 진정한 지혜를 바탕으로 하는 믿음의 동행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막연한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온갖 허망한 지혜들이 판을 치는 현실 가운데서, 어떻게 진정한 지혜로 세상을 분별하고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진실을 깨닫고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로 새로운 세상을 이루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며, 교회는 바로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모두 진정한 지혜로 생명의 길을 걷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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