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 - 출애굽기 19:1~6[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6-08-09 13:28
조회
293
2026년 8월 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오늘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
본문: 출애굽기 19:1~6
어떤 민족이나 공동체가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는 선민의식은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지켜나가기 위한 특별한 의식입니다. 그것이 주체성을 분명히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동반할 때 긍정적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배타성을 강화하게 될 때 부정적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선민의식’이 긍정적 의미로서보다는 부정적 의미로 더 널리 통용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백성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 사건을 전하는 본문 말씀은, 그 선민의식의 본래적 의미가 무엇인지 일깨워줍니다.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이 될 것이며, 나아가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감당해야 할 몫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너는 야곱 가문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일러주어라.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19:3b~6)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을 지키면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 될 것이라 합니다.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선택하신다는 말씀은 오경 안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주제일 뿐 아니라 성서 전반을 통하여 환기되고 있는 주제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 문제를 두고 씨름해야 할 만큼(로마 11:25~32) 신약성서에 이르기까지도 환기되고 있는 주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배타적 선민의식, 그리고 오늘 그와 다르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배타적 선민의식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여겨지고 있지만,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다는 점입니다(신명 7:7~8). 그것은 이스라엘의 어떤 우월한 능력이나 장점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뤄진 선택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선택받은 백성은 그에 상응하는 몫을 감당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방적 계약이 아니라 쌍무적 계약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그 과제를 감당하지 못하였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그 사명을 저버린 백성을 두고 ‘로암미’, 곧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선포합니다(호세 1:9).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진실이 망각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선택받았다는 사실은 기억되었지만, 선택받은 백성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망각되었습니다. 진실을 진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편한 대로 받아들이는 인간의 실존적 정황을 말해 줍니다.
본문 말씀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선민이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언약이 무엇일까요? 본문 말씀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건을 전하는 이야기의 첫머리입니다. 언약이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것으로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십계명을 서두로 하여 일종의 법전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계약법전(출애 20:22~23:19)입니다. 구약성서는 이 밖에도 신명기법전(신명 12~26장), 성결법전(레위 17~26장)을 포함하고 있는데, 계약법전은 그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법전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정착시대 초기 상황을 반영하고 있지만, 성서의 문맥에서는 출애굽 여정 가운데 시내산에서 받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일까요? 계약법전의 정신을 집약하고 있는 것이 그 첫머리에 나오는 십계명(출애 20:1~17)입니다. 그것은 이집트의 억압에서 해방된 백성, 곧 자유민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합니다. 그 어떤 것에도 예속되지 않고 해방된 백성으로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그 도리는 여러 관계의 차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크게 보면 첫 번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지켜져야 할 도리로서 종교적 차원을 함축합니다. 두 번째는 인간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도리로서 윤리적 차원을 함축합니다. 물론 더 세분화해서 말하면, 인간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도리는 직접적인 인간관계의 차원과 인간과 사물과의 차원을 동시에 함축합니다. 계약법의 정신은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서 지켜져야 하는 도리와 인간들 사이에서 지켜져야 하는 도리를 분리된 것으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신실한 하나님을 믿는 것과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야 할 정의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정의는 그 두 가지 차원이 온전히 이뤄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충족될 때 해방된 자유민으로서 백성의 삶이 온전히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을 십계명은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계약법전은 그 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 규율을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법전들 모두 그 내용과 형식상 고대 근동의 대표적 법전들(주전 3,000여 년경 수메르의 관습, 주전 7세기의 함무라비 법전)과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모방에 그치지 않고 고유한 역사와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출애굽이라는 해방의 사건이 기본 출발점입니다. 고대의 모든 법전이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에 대한 보호 규정을 포함하고 있지만 대개 기존의 위계적 사회질서를 온존하는 범위 내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반면 성서의 법전은 기본적으로 백성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한 형제라는 전제를 분명히 할 뿐 아니라 특별히 약한 사람들에 대한 보호를 하나님의 친권 행위라는 차원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율법은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라는 것을 말합니다. 성서의 법전이 지닌 그와 같은 성격은 이집트에서의 억압과 그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역사적 경험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 법이 함축하고 있는 정의를 이룰 때, 이스라엘 백성은 진정한 선민이 되어 제사장의 나라,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라고, 본문 말씀은 선포합니다. 제사장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을 가교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동시에 사람들의 염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역할을 맡은 사람입니다. 선민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정의를 온전히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그 진실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망각되었습니다. 다들 하나님이 선택해 주셨다는 사실만 기억하였을 뿐, 진정한 선민으로서 해야 할 도리는 망각하였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 곧 왕과 제사장들도 그 진실을 망각했고, 백성들도 그 진실을 망각했습니다. 그 진실이 망각되었을 때 그 진실을 일깨운 사람들이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제사보다도 정의를 외쳤습니다. 제사에는 열심이지만 정의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질타했습니다.
오늘 현실에서도 그 진실은 망각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선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민족들 사이에 이뤄야 할 정의와 평화의 사명을 망각하고, 오히려 정의와 평화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이스라엘 백성과 그대로 동일화될 수 없는 외래 집단 유대인이 거꾸로 원주민을 점령하고 말살하는 참혹한 폭력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참혹한 사태를 정당화하는 데 성서의 선민 논리가 동원되고 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오도된 선민의식은 이 땅에서까지 착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극우 세력의 광기 어린 광장 집회에 어째서 태극기와 더불어 성조기, 그리고 다윗의 별이 그려진 이스라엘 국기가 등장할까요? 오도된 선민의식의 계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 팔레스타인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의 진실을 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도된 선민의식은 세상의 근심거리일 뿐입니다. 정의를 해치고 평화를 해칠 뿐입니다. 정의와 평화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안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기초 위에서 가능합니다. 자신들만 옳다고 생각하며 타인을 배척하는 의식과 태도로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 태도로는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역행하는 것입니다. 오도된 선민의식이 초래하는 결과입니다. 교회가 이익집단이 되어 버리고 권력집단이 되어 버렸다는 사회적 지탄을 언제까지 받아야 할까요? 그렇게 지탄받는 교회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은 분명히 선포합니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언약을 지키는 백성이라야 하나님의 선민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택받은 백성이라 여긴다면 자신의 잘남을 내세우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겸허하게 이 땅 위에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데 헌신해야 합니다. 나의 나됨은 불가불 타인과의 관계 안에 있다는 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서는 철저하게 그 점을 강조합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의 처지에 함께 하고 그들의 처지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라고 끊임없이 일깨웁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요구되는 가치 또한 그와 같습니다. 한국 사회는 놀랄 만큼 큰 자랑거리를 지니고 있는 것과 동시에 역시 놀랄 만큼 부끄러운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놀라운 발전과 전 세계적인 한류의 열풍,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세계적 추세 가운데서도 그 보루로서 자랑스러운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 그리고 그에 기생하는 정치적 양극화, 그리고 혐오와 배제 현상 또한 만연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가 무엇일까요? 특별히 8·15해방 81주년을 앞두고, 평화·통일주일로 지키고 있는 오늘 우리는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동학 민중운동 이래 줄기차게 이어진 정신을 다시 환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수운(水雲) 최제우 선생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정작 하나님을 섬기기는커녕 자기밖에 모른다고[各自爲心] 탄식하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들이 어찌 남의 나라를 침략하느냐 개탄하며 진정으로 하나님을 모시는 길[侍天主]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해월(海月)에게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는 정신[事人如天]으로 이어졌고, 손병희에 이르러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정신[人乃天]으로 이어졌습니다.
3·1독립선언은 숭고한 뜻을 만천하에 선포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지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 아,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구나. 힘으로 억누르는 시대가 가고, 도의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오는구나. 지난 수천 년 갈고 닦으며 길러온 인도적 정신이 이제 새로운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비추기 시작하는구나.”
해방 정국에서 김구 선생은 아름다운 나라의 미래를 소망했습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한국 현대사가 겪었던 그 경험의 반전을 이뤄내야 하지 않을까요? 약자의 존엄한 삶을 보장하는 정의와 사회적 연대, 억압에 맞서 싸워 일궈낸 민주주의와 인권의 고양, 이념과 체제의 대립을 넘어선 평화의 실현, 그것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처구니없는 배타의 논리로 위기의식을 조장하고 나라 걱정하는 듯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정말 걱정해야 할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삶의 위기요, 그 위기로 강퍅해져 가는 마음의 질병입니다.
교회가 어디에 마음을 쏟아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마음을 쏟아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정녕 하나님을 믿는다면, 사랑을 실천하고 그 위에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데 몸과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대열에 함께 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지닌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제목: 오늘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
본문: 출애굽기 19:1~6
어떤 민족이나 공동체가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는 선민의식은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지켜나가기 위한 특별한 의식입니다. 그것이 주체성을 분명히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동반할 때 긍정적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배타성을 강화하게 될 때 부정적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선민의식’이 긍정적 의미로서보다는 부정적 의미로 더 널리 통용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백성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 사건을 전하는 본문 말씀은, 그 선민의식의 본래적 의미가 무엇인지 일깨워줍니다.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이 될 것이며, 나아가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감당해야 할 몫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너는 야곱 가문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일러주어라.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19:3b~6)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을 지키면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 될 것이라 합니다.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선택하신다는 말씀은 오경 안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주제일 뿐 아니라 성서 전반을 통하여 환기되고 있는 주제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 문제를 두고 씨름해야 할 만큼(로마 11:25~32) 신약성서에 이르기까지도 환기되고 있는 주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배타적 선민의식, 그리고 오늘 그와 다르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배타적 선민의식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여겨지고 있지만,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다는 점입니다(신명 7:7~8). 그것은 이스라엘의 어떤 우월한 능력이나 장점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뤄진 선택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선택받은 백성은 그에 상응하는 몫을 감당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방적 계약이 아니라 쌍무적 계약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그 과제를 감당하지 못하였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그 사명을 저버린 백성을 두고 ‘로암미’, 곧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선포합니다(호세 1:9).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진실이 망각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선택받았다는 사실은 기억되었지만, 선택받은 백성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망각되었습니다. 진실을 진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편한 대로 받아들이는 인간의 실존적 정황을 말해 줍니다.
본문 말씀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선민이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언약이 무엇일까요? 본문 말씀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건을 전하는 이야기의 첫머리입니다. 언약이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것으로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십계명을 서두로 하여 일종의 법전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계약법전(출애 20:22~23:19)입니다. 구약성서는 이 밖에도 신명기법전(신명 12~26장), 성결법전(레위 17~26장)을 포함하고 있는데, 계약법전은 그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법전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정착시대 초기 상황을 반영하고 있지만, 성서의 문맥에서는 출애굽 여정 가운데 시내산에서 받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일까요? 계약법전의 정신을 집약하고 있는 것이 그 첫머리에 나오는 십계명(출애 20:1~17)입니다. 그것은 이집트의 억압에서 해방된 백성, 곧 자유민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합니다. 그 어떤 것에도 예속되지 않고 해방된 백성으로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그 도리는 여러 관계의 차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크게 보면 첫 번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지켜져야 할 도리로서 종교적 차원을 함축합니다. 두 번째는 인간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도리로서 윤리적 차원을 함축합니다. 물론 더 세분화해서 말하면, 인간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도리는 직접적인 인간관계의 차원과 인간과 사물과의 차원을 동시에 함축합니다. 계약법의 정신은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서 지켜져야 하는 도리와 인간들 사이에서 지켜져야 하는 도리를 분리된 것으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신실한 하나님을 믿는 것과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야 할 정의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정의는 그 두 가지 차원이 온전히 이뤄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충족될 때 해방된 자유민으로서 백성의 삶이 온전히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을 십계명은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계약법전은 그 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 규율을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법전들 모두 그 내용과 형식상 고대 근동의 대표적 법전들(주전 3,000여 년경 수메르의 관습, 주전 7세기의 함무라비 법전)과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모방에 그치지 않고 고유한 역사와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출애굽이라는 해방의 사건이 기본 출발점입니다. 고대의 모든 법전이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에 대한 보호 규정을 포함하고 있지만 대개 기존의 위계적 사회질서를 온존하는 범위 내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반면 성서의 법전은 기본적으로 백성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한 형제라는 전제를 분명히 할 뿐 아니라 특별히 약한 사람들에 대한 보호를 하나님의 친권 행위라는 차원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율법은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라는 것을 말합니다. 성서의 법전이 지닌 그와 같은 성격은 이집트에서의 억압과 그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역사적 경험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 법이 함축하고 있는 정의를 이룰 때, 이스라엘 백성은 진정한 선민이 되어 제사장의 나라,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라고, 본문 말씀은 선포합니다. 제사장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을 가교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동시에 사람들의 염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역할을 맡은 사람입니다. 선민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정의를 온전히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그 진실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망각되었습니다. 다들 하나님이 선택해 주셨다는 사실만 기억하였을 뿐, 진정한 선민으로서 해야 할 도리는 망각하였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 곧 왕과 제사장들도 그 진실을 망각했고, 백성들도 그 진실을 망각했습니다. 그 진실이 망각되었을 때 그 진실을 일깨운 사람들이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제사보다도 정의를 외쳤습니다. 제사에는 열심이지만 정의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질타했습니다.
오늘 현실에서도 그 진실은 망각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선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민족들 사이에 이뤄야 할 정의와 평화의 사명을 망각하고, 오히려 정의와 평화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이스라엘 백성과 그대로 동일화될 수 없는 외래 집단 유대인이 거꾸로 원주민을 점령하고 말살하는 참혹한 폭력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참혹한 사태를 정당화하는 데 성서의 선민 논리가 동원되고 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오도된 선민의식은 이 땅에서까지 착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극우 세력의 광기 어린 광장 집회에 어째서 태극기와 더불어 성조기, 그리고 다윗의 별이 그려진 이스라엘 국기가 등장할까요? 오도된 선민의식의 계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 팔레스타인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의 진실을 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도된 선민의식은 세상의 근심거리일 뿐입니다. 정의를 해치고 평화를 해칠 뿐입니다. 정의와 평화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안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기초 위에서 가능합니다. 자신들만 옳다고 생각하며 타인을 배척하는 의식과 태도로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 태도로는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역행하는 것입니다. 오도된 선민의식이 초래하는 결과입니다. 교회가 이익집단이 되어 버리고 권력집단이 되어 버렸다는 사회적 지탄을 언제까지 받아야 할까요? 그렇게 지탄받는 교회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은 분명히 선포합니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언약을 지키는 백성이라야 하나님의 선민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택받은 백성이라 여긴다면 자신의 잘남을 내세우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겸허하게 이 땅 위에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데 헌신해야 합니다. 나의 나됨은 불가불 타인과의 관계 안에 있다는 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서는 철저하게 그 점을 강조합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의 처지에 함께 하고 그들의 처지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라고 끊임없이 일깨웁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요구되는 가치 또한 그와 같습니다. 한국 사회는 놀랄 만큼 큰 자랑거리를 지니고 있는 것과 동시에 역시 놀랄 만큼 부끄러운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놀라운 발전과 전 세계적인 한류의 열풍,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세계적 추세 가운데서도 그 보루로서 자랑스러운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 그리고 그에 기생하는 정치적 양극화, 그리고 혐오와 배제 현상 또한 만연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가 무엇일까요? 특별히 8·15해방 81주년을 앞두고, 평화·통일주일로 지키고 있는 오늘 우리는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동학 민중운동 이래 줄기차게 이어진 정신을 다시 환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수운(水雲) 최제우 선생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정작 하나님을 섬기기는커녕 자기밖에 모른다고[各自爲心] 탄식하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들이 어찌 남의 나라를 침략하느냐 개탄하며 진정으로 하나님을 모시는 길[侍天主]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해월(海月)에게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는 정신[事人如天]으로 이어졌고, 손병희에 이르러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정신[人乃天]으로 이어졌습니다.
3·1독립선언은 숭고한 뜻을 만천하에 선포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지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 아,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구나. 힘으로 억누르는 시대가 가고, 도의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오는구나. 지난 수천 년 갈고 닦으며 길러온 인도적 정신이 이제 새로운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비추기 시작하는구나.”
해방 정국에서 김구 선생은 아름다운 나라의 미래를 소망했습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한국 현대사가 겪었던 그 경험의 반전을 이뤄내야 하지 않을까요? 약자의 존엄한 삶을 보장하는 정의와 사회적 연대, 억압에 맞서 싸워 일궈낸 민주주의와 인권의 고양, 이념과 체제의 대립을 넘어선 평화의 실현, 그것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처구니없는 배타의 논리로 위기의식을 조장하고 나라 걱정하는 듯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정말 걱정해야 할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삶의 위기요, 그 위기로 강퍅해져 가는 마음의 질병입니다.
교회가 어디에 마음을 쏟아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마음을 쏟아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정녕 하나님을 믿는다면, 사랑을 실천하고 그 위에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데 몸과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대열에 함께 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지닌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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