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의 세계를 넘어 새롭게 열리는 삶 - 누가복음 19:1~10[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6-09-06 14:28
조회
302
2026년 9월 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편견의 세계를 넘어 새롭게 열리는 삶
본문: 누가복음 19:1~10
창조절 첫 주일입니다. 가장 더운 여름을 보내며, 또한 히말라야에서 벌어진 엄청난 재난 소식을 접하면서, 오늘 인간 삶을 지탱하며 그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의 당연한 삶의 방식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어떻게 바꿔야 아름다운 창조질서를 회복할 수 있을지 다시 깊이 생각하여야 할 때입니다.
본문 말씀은 사람들의 통념이 어떻게 무너지고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지, 그 극적인 사태를 흥미롭게 전합니다. 유명한 ‘키가 작은 삭개오’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들었던 성경 이야기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그 내용의 진지함이나 심각성보다는 이 이야기를 구성하는 장면 자체가 굉장히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그 흥미로운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며 그 의미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성서 말씀의 의미를 새길 때에, 때로는 성서에 대한 초보적 지식이 없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정반대로 오랜 신앙생활을 통해 체득한 교리나 그에 따른 편견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가능한 한 기존의 어떤 편견을 떨치고 함께 본문 말씀의 의미를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여러 가지 일들을 행하시고 말씀을 전하시는 중에 여리고 지역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여리고는 사해 북쪽에 자리 잡은 도시로, 역사가 오래되었고 풍요롭고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거리를 지나고 계실 때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세리장이었고 부자였습니다. 히브리어로 ‘의로운 자’라는 뜻을 지닌 삭개오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이 사람은 틀림없는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세리장이자 부자로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애써 달려왔다는 것은 예사로운 상황이 아닙니다.
우선 세리는 일반 사람들의 눈에 볼 때 죄인으로 취급되는 부류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예수께서 세리를 친구로 삼는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던(누가 7:34) 데서 알 수 있듯이, 세리는 상종하지 못할 부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세리들은 엄밀히 말해 국가 관리가 아니라 청부업자들이었습니다. 일정한 지역의 유력자가 입찰에 응하는 방식으로 나서 징세권을 얻어내면 하수인들을 두고 세금을 거두어들여 일정액을 상납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세리를 거의 도둑이나 강도 취급했습니다. 삭개오가 세리장이었다는 것은 그 지역의 징세권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일반 사람의 통념으로 볼 때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는 이가 구원을 선포하고 계시는 예수에게 다가선 사건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부자였습니다. 하급 세리라면 가난했을 터인데, 세리장이었으니 부자인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께 접근하고 있는 상황 역시 예사롭지 않습니다. 본문 말씀에 앞선 내용을 보면 세리도 나오고 부자도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세리의 기도가 진실하다는 것을 인정한 반면(누가 18:9~14), 자신이 가진 것 때문에 구원의 길에 이르지 못하는 부자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습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누가 18:25) 그 유명한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러니까 전반적 문맥을 통해 보면, 부자가 예수께 접근한 것은 범상치 않은 상황이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를 만남으로써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길에는 이중의 장벽이 있었던 셈입니다. 예수께서 세리들과 친구라는 소문에 삭개오는 선뜻 달려올 수 있었지만, 공공연한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가 가진 것 때문에 진정성이 의심받을까 봐 예수께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그가 작은 자였다는 것은 단지 신체상의 조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준으로도 이른바 일반적인 사람들의 반열에 끼기 어려운 조건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대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 반전의 주인공은 삭개오 자신과 예수님입니다. 이 두 주인공이 일으키는 반전은, 주인공들이 사람들의 통념과 편견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하는 동시에 사람들이 강고하게 지키고 있는 통념과 편견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뜻합니다.
먼저 삭개오가 공공연한 장소에서 예수를 만나고자 시도했다는 것은 통념과 편견의 세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강력하게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세리라는 이유로 따가운 시선을 받기는 했지만 부를 누리고 있는 만큼 삭개오는 그런대로 살아가자면 오히려 남들의 선망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돈 많은 관리가 구원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이 가진 것 때문에 그 구원의 길을 따르지 못했던 것과 같은 태도입니다. 삭개오는 자신도 그와 같은 의심을 받을 것이라 염려했겠지만, 어떻게든 예수와 눈을 맞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씁니다. 자신의 진정성을 보이려는 노력입니다.
예수 앞에서 삭개오의 진정성은 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알아봅니다. 사전에 만난 적이 있다는 어떤 기록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곧바로 그를 알아보고 이름까지 부르며 그에게 뽕나무에서 내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눈빛만 보아도 진실이 통하는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예수께서는 삭개오를 부를 뿐 아니라 삭개오의 집에 묵겠다고 선언합니다. 그 집에 묵겠다는 것은 그저 밤이슬 피할 숙소로 사용하겠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 집에 묵겠다는 것은 한 지붕 아래서 잠자리를 같이한다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식탁을 같이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구원받지 못할 죄인과는 식탁을 함께 하지 않는 것이 통념인데, 예수께서는 그 통념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삭개오는 자신이 받고 있을지도 모르는 의혹이 적어도 예수에게는 한 점도 없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예수께서 ‘어서’ 내려오라고 하는 말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왔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장면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병아리가 연약한 부리로 안에서 쪼아대는 순간 어미 닭이 단단한 부리로 밖에서 쪼아댈 때 병아리가 세상에 나오게 되는 순간과 같은 장면입니다.
그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지닌 통념과 편견으로는 있을 수 없는 장면이 지금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말했습니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19:7) 예수와 삭개오의 만남, 더욱이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묵게 된 사건은 통념에 비춰 볼 때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통념 때문에,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사건을 두고 충격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한번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이 누구였을까요? 이들의 예수의 적대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주변에 운집해 그 말씀을 들으려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적대자들이 끼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고자 해도 뚫고 나갈 수 없을 정도로 모여 있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이들 때문에 예수를 곧바로 만나는 데 어려움을 겪었는데 결국 자신의 진정성과 지혜로 예수를 만나게 되었을 때, 이들은 그 사건에 당혹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을 방해하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결코 그런 저의를 갖고 있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세상을 지배하는 통념과 편견에 매여 있는 한 그들은 그리스도의 길, 구원의 길에 방해가 되는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많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빠져 있는 잘못입니다. 차별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실제로 차별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로 대상화하고 배제합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스스로 누군가를 차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의심의 여지 없이 누군가를 차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대로 내가 누군가를 차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차별 언행을 경계하며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차별행위를 삼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독단에 빠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사람들이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는 장면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통념과 편견에 어긋나는 사태를 보고 당황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마음과 마음이 통한 예수와 삭개오에게는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통념과 편견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만난 삭개오는 이제까지의 삶과는 전적으로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삭개오는 구체적인 행위의 의지를 드러냄으로써 삶의 전환을 드러냅니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을 속여 갈취한 것이 있다면 네 갑절로 갚아 주겠다고 다짐합니다. 통상 유대의 관습에 의하면, 재물로 자선할 경우 재산이나 수입의 20%가 권고되었고, 부당하게 갈취한 돈을 되돌려 줄 때에는 1/5을 더 보태주어야 했습니다(레위 6:1~5). 그러나 도둑질했을 경우 네 배의 배상 즉 3배의 벌금을 물어야 했습니다(삼하 12:6, 나단과 다윗의 대화). 이런 사정으로 보아 삭개오는 아주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돌이키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삭개오에게는 자기가 가진 재산만으로는 누릴 수 없었던 진정한 삶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그 진정한 삶을 위하여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내놓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자기 내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부당하게 축적한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림으로써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뜻합니다. 진정한 삶은 자기만의 만족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온전한 관계를 회복 가운데 누리는 삶입니다. “소유와 밀착되지 않은 회개란 있을 수 없다.”( 『갈릴래아의 예수』, 215)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그 삶의 결단을 내린 삭개오에게 예수께서는 선언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19:9~10) 삭개오의 집에 이른 구원,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관계가 회복된 사건을 뜻합니다. 그 안에서 각각의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시고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삭개오 이야기는 단지 한 개인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들을 지배하는 통념과 편견이 무너진 사건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 통념과 편견이 무너진 세계 안에서 누구나 자유롭고 공평하게 저마다의 삶을 누리게 되는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앞에서 등장하는 여러 이야기들의 의미를 집약하는 결론이자 동시에 누가복음의 핵심으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의 잘못은 쉽사리 보아도 자신의 잘못은 잘 보지 못합니다. 또한 멀리는 보아도 가까이는 잘 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기후 위기가 심각하다는 것은 잘 알면서도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기도 합니다. 모른다기보다는 회피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인권을 옹호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일상의 삶은 그와 괴리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대통령은 비판할 수 있지만 사장은 비판하지 못한 사회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 보호의 본능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거기서 자기만의 편견이 강화되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며,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삶의 방식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세리장이요 부자였던 삭개오가 구원을 누리게 된 것은, 진정한 삶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삶의 방식과 그것을 정당화하는 통념과 편견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에게서 그 진정한 갈망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찾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진실을 새기며, 우리를 지배하며 우리의 삶을 망가뜨리는 통념과 편견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제목: 편견의 세계를 넘어 새롭게 열리는 삶
본문: 누가복음 19:1~10
창조절 첫 주일입니다. 가장 더운 여름을 보내며, 또한 히말라야에서 벌어진 엄청난 재난 소식을 접하면서, 오늘 인간 삶을 지탱하며 그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의 당연한 삶의 방식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어떻게 바꿔야 아름다운 창조질서를 회복할 수 있을지 다시 깊이 생각하여야 할 때입니다.
본문 말씀은 사람들의 통념이 어떻게 무너지고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지, 그 극적인 사태를 흥미롭게 전합니다. 유명한 ‘키가 작은 삭개오’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들었던 성경 이야기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그 내용의 진지함이나 심각성보다는 이 이야기를 구성하는 장면 자체가 굉장히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그 흥미로운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며 그 의미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성서 말씀의 의미를 새길 때에, 때로는 성서에 대한 초보적 지식이 없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정반대로 오랜 신앙생활을 통해 체득한 교리나 그에 따른 편견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가능한 한 기존의 어떤 편견을 떨치고 함께 본문 말씀의 의미를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여러 가지 일들을 행하시고 말씀을 전하시는 중에 여리고 지역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여리고는 사해 북쪽에 자리 잡은 도시로, 역사가 오래되었고 풍요롭고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거리를 지나고 계실 때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세리장이었고 부자였습니다. 히브리어로 ‘의로운 자’라는 뜻을 지닌 삭개오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이 사람은 틀림없는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세리장이자 부자로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애써 달려왔다는 것은 예사로운 상황이 아닙니다.
우선 세리는 일반 사람들의 눈에 볼 때 죄인으로 취급되는 부류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예수께서 세리를 친구로 삼는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던(누가 7:34) 데서 알 수 있듯이, 세리는 상종하지 못할 부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세리들은 엄밀히 말해 국가 관리가 아니라 청부업자들이었습니다. 일정한 지역의 유력자가 입찰에 응하는 방식으로 나서 징세권을 얻어내면 하수인들을 두고 세금을 거두어들여 일정액을 상납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세리를 거의 도둑이나 강도 취급했습니다. 삭개오가 세리장이었다는 것은 그 지역의 징세권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일반 사람의 통념으로 볼 때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는 이가 구원을 선포하고 계시는 예수에게 다가선 사건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부자였습니다. 하급 세리라면 가난했을 터인데, 세리장이었으니 부자인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께 접근하고 있는 상황 역시 예사롭지 않습니다. 본문 말씀에 앞선 내용을 보면 세리도 나오고 부자도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세리의 기도가 진실하다는 것을 인정한 반면(누가 18:9~14), 자신이 가진 것 때문에 구원의 길에 이르지 못하는 부자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습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누가 18:25) 그 유명한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러니까 전반적 문맥을 통해 보면, 부자가 예수께 접근한 것은 범상치 않은 상황이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를 만남으로써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길에는 이중의 장벽이 있었던 셈입니다. 예수께서 세리들과 친구라는 소문에 삭개오는 선뜻 달려올 수 있었지만, 공공연한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가 가진 것 때문에 진정성이 의심받을까 봐 예수께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그가 작은 자였다는 것은 단지 신체상의 조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준으로도 이른바 일반적인 사람들의 반열에 끼기 어려운 조건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대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 반전의 주인공은 삭개오 자신과 예수님입니다. 이 두 주인공이 일으키는 반전은, 주인공들이 사람들의 통념과 편견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하는 동시에 사람들이 강고하게 지키고 있는 통념과 편견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뜻합니다.
먼저 삭개오가 공공연한 장소에서 예수를 만나고자 시도했다는 것은 통념과 편견의 세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강력하게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세리라는 이유로 따가운 시선을 받기는 했지만 부를 누리고 있는 만큼 삭개오는 그런대로 살아가자면 오히려 남들의 선망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돈 많은 관리가 구원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이 가진 것 때문에 그 구원의 길을 따르지 못했던 것과 같은 태도입니다. 삭개오는 자신도 그와 같은 의심을 받을 것이라 염려했겠지만, 어떻게든 예수와 눈을 맞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씁니다. 자신의 진정성을 보이려는 노력입니다.
예수 앞에서 삭개오의 진정성은 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알아봅니다. 사전에 만난 적이 있다는 어떤 기록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곧바로 그를 알아보고 이름까지 부르며 그에게 뽕나무에서 내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눈빛만 보아도 진실이 통하는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예수께서는 삭개오를 부를 뿐 아니라 삭개오의 집에 묵겠다고 선언합니다. 그 집에 묵겠다는 것은 그저 밤이슬 피할 숙소로 사용하겠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 집에 묵겠다는 것은 한 지붕 아래서 잠자리를 같이한다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식탁을 같이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구원받지 못할 죄인과는 식탁을 함께 하지 않는 것이 통념인데, 예수께서는 그 통념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삭개오는 자신이 받고 있을지도 모르는 의혹이 적어도 예수에게는 한 점도 없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예수께서 ‘어서’ 내려오라고 하는 말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왔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장면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병아리가 연약한 부리로 안에서 쪼아대는 순간 어미 닭이 단단한 부리로 밖에서 쪼아댈 때 병아리가 세상에 나오게 되는 순간과 같은 장면입니다.
그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지닌 통념과 편견으로는 있을 수 없는 장면이 지금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말했습니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19:7) 예수와 삭개오의 만남, 더욱이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묵게 된 사건은 통념에 비춰 볼 때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통념 때문에,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사건을 두고 충격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한번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이 누구였을까요? 이들의 예수의 적대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주변에 운집해 그 말씀을 들으려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적대자들이 끼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고자 해도 뚫고 나갈 수 없을 정도로 모여 있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이들 때문에 예수를 곧바로 만나는 데 어려움을 겪었는데 결국 자신의 진정성과 지혜로 예수를 만나게 되었을 때, 이들은 그 사건에 당혹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을 방해하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결코 그런 저의를 갖고 있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세상을 지배하는 통념과 편견에 매여 있는 한 그들은 그리스도의 길, 구원의 길에 방해가 되는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많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빠져 있는 잘못입니다. 차별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실제로 차별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로 대상화하고 배제합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스스로 누군가를 차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의심의 여지 없이 누군가를 차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대로 내가 누군가를 차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차별 언행을 경계하며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차별행위를 삼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독단에 빠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사람들이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는 장면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통념과 편견에 어긋나는 사태를 보고 당황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마음과 마음이 통한 예수와 삭개오에게는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통념과 편견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만난 삭개오는 이제까지의 삶과는 전적으로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삭개오는 구체적인 행위의 의지를 드러냄으로써 삶의 전환을 드러냅니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을 속여 갈취한 것이 있다면 네 갑절로 갚아 주겠다고 다짐합니다. 통상 유대의 관습에 의하면, 재물로 자선할 경우 재산이나 수입의 20%가 권고되었고, 부당하게 갈취한 돈을 되돌려 줄 때에는 1/5을 더 보태주어야 했습니다(레위 6:1~5). 그러나 도둑질했을 경우 네 배의 배상 즉 3배의 벌금을 물어야 했습니다(삼하 12:6, 나단과 다윗의 대화). 이런 사정으로 보아 삭개오는 아주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돌이키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삭개오에게는 자기가 가진 재산만으로는 누릴 수 없었던 진정한 삶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그 진정한 삶을 위하여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내놓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자기 내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부당하게 축적한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림으로써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뜻합니다. 진정한 삶은 자기만의 만족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온전한 관계를 회복 가운데 누리는 삶입니다. “소유와 밀착되지 않은 회개란 있을 수 없다.”( 『갈릴래아의 예수』, 215)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그 삶의 결단을 내린 삭개오에게 예수께서는 선언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19:9~10) 삭개오의 집에 이른 구원,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관계가 회복된 사건을 뜻합니다. 그 안에서 각각의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시고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삭개오 이야기는 단지 한 개인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들을 지배하는 통념과 편견이 무너진 사건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 통념과 편견이 무너진 세계 안에서 누구나 자유롭고 공평하게 저마다의 삶을 누리게 되는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앞에서 등장하는 여러 이야기들의 의미를 집약하는 결론이자 동시에 누가복음의 핵심으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의 잘못은 쉽사리 보아도 자신의 잘못은 잘 보지 못합니다. 또한 멀리는 보아도 가까이는 잘 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기후 위기가 심각하다는 것은 잘 알면서도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기도 합니다. 모른다기보다는 회피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인권을 옹호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일상의 삶은 그와 괴리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대통령은 비판할 수 있지만 사장은 비판하지 못한 사회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 보호의 본능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거기서 자기만의 편견이 강화되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며,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삶의 방식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세리장이요 부자였던 삭개오가 구원을 누리게 된 것은, 진정한 삶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삶의 방식과 그것을 정당화하는 통념과 편견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에게서 그 진정한 갈망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찾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진실을 새기며, 우리를 지배하며 우리의 삶을 망가뜨리는 통념과 편견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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