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권리를 가질 권리 - 마태복음 15:21~28[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6-09-27 14:18
조회
190
2026년 9월 2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권리를 가질 권리
본문: 마태복음 15:21~28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증언하는 본문 말씀은 여러 가지 점에서 인상적인 이야기입니다. 마가복음(7:24~30)도 인물과 정황 묘사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거의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교회 안에서 이 이야기는 믿음의 모범을 보여 주는 교훈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주인공 여인의 이름은 유스타로 알려졌고, 그 딸은 베르니케라고 전해집니다. 이 여인은 신뢰에서 ‘신앙의 모범’이요, 끈기에서는 ‘인내의 모범’이며, 예수님의 냉정한 말에 대한 그의 대답에서는 ‘겸손의 모범’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매달렸다는 점에서 또한 ‘기도의 모범’으로 받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받아들여도 충분히 감동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이야기의 파격적 성격과 그 의미를 제대로 새길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자신이 처한 비극적 현실 때문에 자신의 운명은 물론 기존의 통념과 질서를 완전히 바꾼 주인공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지평을 바꿔놓은 결정적 계기를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지역이었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오늘날 레바논 지역입니다. 그때 한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가나안 여자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구분을 명시함으로써 이방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유대인의 세계 밖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아주 절박한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자기 딸에게 악한 귀신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정신적 질병일 수도 있고, 아니면 모든 질병이 악령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당대의 통념에 비추어볼 때 다른 어떤 심각한 질병일 수도 있습니다. 여인은 딸의 그 병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이어지는 대화 장면은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15:22) 절박한 호소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호칭으로서 ‘다윗의 자손’은 주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였습니다. 그 두 호칭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절절한 마음을 나타냅니다. 이 호소에 예수님은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말합니다. “그를 안심시켜 떠나보내 주십시오.”(15:23)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문을 여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15:24) 그러나 그 여자는 간청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15:26) 여인의 간청을 거절한 셈입니다. 이 여인에게는 날벼락과 같은 소리였을 것입니다. 자식의 질병 때문에 절박하게 호소해야 했던 이 여인은 벽에 부딪히며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아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15:27) 그제서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15:28) 그때 그 여자의 딸이 나았습니다.

이방 여인의 절절한 마음과 믿음이 사태를 반전하여 구원의 지평을 열었다는 것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만, 이 이야기를 오늘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중대한 하나의 걸림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이 여인에게 보인 태도를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에 비춰볼 것 같으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라는 이야기,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이야기는 당시 유대인들의 통념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굳이 예수님의 입을 통해 이를 밝히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유대인의 신실한 믿음을 위한 복음서 기자의 배려일 수 있습니다. 정말로 그 나름대로 자신들의 전통을 따라 예수님이 자신들의 구세주라고 믿는 이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신중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는 것을 해명해 주는 복음서 기자의 배려입니다. 다른 한편 어떻게 예수님의 마음까지 뒤흔들어놓을 정도로 이 여인의 마음이 얼마나 절절했는지 극적으로 표현해 주는 문학적 수사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위대성은 그 유대인들을 위한 논리가 언제까지나 유대인들만을 위한 논리로 굳어지지 않고, 새롭게 제기되는 요청 앞에 무너지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람을 살리자고 하는 데, 유대인이 따로 있고 이방인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로 상황이 반전하고 있는 데 오늘 말씀의 참뜻이 있습니다. 더욱이 본문이 유대인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 다음에 곧바로 이어지고 있는 점은 그 뜻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줍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전통을 대변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보고 이사야서(29:13)를 인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15:8~9) 한마디로 전통을 소중히 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거짓을 일삼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자신들만 의롭다고 함으로써 타인을 배제함으로써 죽음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음을 질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잘못된 사태를 뒤집습니다. 여기에 말씀의 진정한 뜻이 있습니다.

다시 새깁니다. 이 이야기가 자신이 처한 비극적 현실 때문에 자신의 운명은 물론 기존의 통념과 질서를 완전히 바꾼 사건이자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지평을 바꿔놓은 결정적 사건이 되는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우리가 알고 있는 교훈 그대로 신실하고 집요하고 인내심 있고 겸손합니다. 끝까지 좌절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태도 때문에 이제껏 굳게 닫혀 있던 구원의 문이 열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건의 밑바탕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사태가 있습니다. 귀신 들린 자식의 괴로움입니다.
자식이 괴로워하는 것을 자신의 괴로움보다 더 깊게 느끼는 것이 모든 부모의 심정입니다. 자식이 괴로워하는 것보다 자신이 괴로운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자신이 대신 겪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만큼 부모들에게는 자식의 괴로움보다 큰 일이 없습니다. 자식이 잘못되고, 괴로워하고, 목숨을 잃는 것만큼 큰 슬픔, 큰 고통이 없습니다. 피에타 상, 곧 처참하게 죽은 아들의 시신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상은 그 극한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위대한 어머니로 영원히 추앙받는 까닭도 거기에 있습니다. 구세주를 낳은 몸이어서 위대하다기보다는 그 절대적인 고통과 슬픔을 안았던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과 슬픔을 안은 어머니이기에 사람들의 아픈 마음, 슬픈 마음을 다 아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주인공 가나안 여자가 지닌 믿음의 밑바탕입니다. 그 아픈 절규가 믿음의 기적, 곧 사건을 일으킵니다. 이 여인이 그와 같은 소망의 믿음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자기 딸의 목숨을 살리려는, 자기 딸이 사람답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심정 때문이었습니다. 생명을 살리려는 그 열망으로 모든 상황을 감내하고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를 받아줄 수 없다는 그 질서와 논리까지도 감싸안아 버린 정성이자 열정이요, 믿음이었습니다. 이 여인의 신실함, 인내심과 집요함, 겸손함과 불굴의 정신은 자신이 안고 있는 슬픔 곧 자식의 괴로움에서 비롯됩니다. 그 슬픔을 얼버무리지 않고 정곡으로 체험하고 있었기에 그 어떤 장애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극적 현실을 이겨낼 길을 찾은 것입니다. 자신의 사회적 신분이나 문화적 교양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절박하게 호소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놀랍게도 자신이 절박하게 바랐던 소망을 이루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딸이 귀신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배제된 이방인의 굴레에서 벗어났습니다. 개 같은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 안에 있는 동등한 주체로서 거듭나 식탁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린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던 경계의 장벽이 무너진 것을 뜻합니다. 배제되는 소수자를 만드는 모든 장벽이 무너진 것을 뜻합니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사건은 보편적인 구원의 사건, 해방의 사건이 된 것입니다.

민중신학자 서남동 선생은 바로 이러한 사건 가운데서 ‘고난받는 민중의 메시아성’ 또는 ‘한의 속량적 성격’을 주목하였습니다. 고난받는 민중의 한 맺힌 절규가 자신을 구원할 뿐 아니라 세상을 구원으로 이끈다는 통찰입니다. 절망적인 현실 가운데서 좌절하고 체념하거나 아니면 개인적 원망과 원한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 불행의 악순환을 극복할 길은 묘연해집니다. 반면 고통의 절규를 외치는 것은 삶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절박하게 호소하고 외칠 때 한은 놀랍게 승화됩니다. 예술적으로 승화되기도 하며, 사회변혁의 힘으로 승화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아픔에 공감하고 호응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공감하면 함께 살아가는 지혜와 해법이 찾아집니다. 거기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을 두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이 장면에서만 등장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숱한 기적 이야기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늘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 ‘내가 너를 구했다’는 말보다는 ‘너의 믿음이 너를 구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선포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태도를 다시 환기해야 할 것입니다. 이방 여인과의 팽팽한 논쟁은 예수님께서 여인의 호소에 공감하는 것으로 종결됩니다. 좀처럼 논쟁에서 지는 법이 없는 예수님이 이 여인과의 논쟁에서는 깨끗하게 당신의 처음 주장을 철회하고 승복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논쟁에서 패하여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을까요? 율법주의적 정통성을 잃었지만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의 삶을 얻었습니다. 사랑을 이뤘고 구원을 이뤘습니다. 무엇보다 우선하는 삶 그 자체, 생명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으로 이뤄낸 놀라운 사건입니다. 고통을 겪는 딸을 둔 어머니의 절박한 호소와 그 호소에 공감한 예수님께서 함께 이룬 놀라운 사건입니다. 예수님께는 논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간절한 삶에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쏟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 밑바탕은 한결같습니다.
그리스도 복음의 요체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아니, 살리느냐, 죽이느냐?’ 그 갈림길에서 살리는 길을 택하는 것이 그리스도 복음의 요체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복음은 사람들을 갈라놓은 장벽을 허물고 모든 사람이 서로 존중하며 살아가는 삶으로 구체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보편적 인권의 가치는 그 복음의 정신에 부합합니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고, 사람인 한 그 누구나 존엄성을 보장받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오늘의 보편적 인권 개념입니다. 그러나 오늘 현실은 놀랍도록 그와 같은 가치 기준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자신의 귀속 집단이 불분명한 사람은 자신을 보호해 줄 공동체가 없기에 어려움을 겪는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인권이라는 척도는 상당히 강화되었고, 그에 따라 과거 시대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인권이 보장되고 있지만, 귀속성에 따른 인권 보장의 정도는 놀랍게도 그 차이가 큽니다. 나와 나 아닌 집단에 대한 차별은 오히려 더 미묘하게 강화된 측면이 있습니다. 오늘 어떤 사회 구성원에 대한 자격의 부여 기준은, 또 다른 한편으로 매우 심각한 차별과 배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 현실을 심각하게 여겼습니다. 보편적 인권을 확고한 가치로 정립하였지만 시민권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오늘 세계의 현실을 직시하였습니다. 그가 “권리를 가질 권리(right to have right)”를 말한 것은 실제로 보편적 인권이 보장되지 않은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문제제기였습니다. 시민권이 없어도, 특정한 정치공동체에 속하지 않아도 그저 사람이면 모두 존엄한 삶을 보장하는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입니다.
지난 주간 김규희 교우의 칼럼(“경기도, 살림 어려워도 아동 안전망은 지켜주길”, 「한겨레신문」, 2026.9.22.)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조사 보고서 『경기도 미등록 이주 아동 지원방안 연구: 권리보장 현황과 실태 분석을 바탕으로』(경기연구원, 2026)의 결과에 기초한 의견입니다. 경기도가 처음으로 시행한 제도로서, 미등록 이주민 아동들의 교육과 의료, 복지 등을 보장하기 위한 ‘출생 미등록 이주배경 아동 공적 확인제도’가 예산 때문에 흔들리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의견입니다.
우리 사회가 보편적 인권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 시도가 위태로워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시도들이 하나하나 쌓여갈 때 우리 사회는 실질적으로 보편적 인권을 보장하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허물고 보편적 구원의 지평을 연 사건으로서 가나안 여인 이야기는, “권리를 가질 권리”가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한다는 진실을 일깨웁니다. 본문 말씀은 오늘 교회가 어떤 인간상, 어떤 세계상을 지향해야 할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우리 모두 그 말씀의 진실을 믿고 따르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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