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선포된 말씀, 구현된 말씀 - 요한복음 1:19~28 [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12-23 15:01
조회
109
2018년 12월 2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선포된 말씀, 구현된 말씀
본문: 요한복음 1:19~28



대림절 첫째 주일 우리는 세례 요한의 잉태 소식에 관한 말씀을, 그리고 대림절 셋째 주일인 지난 주일에는 길을 닦으라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함께 나눴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그 두 본문말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환기하되, 또 다른 차원에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공관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공생애에 관한 증언을 하기에 앞서 세례 요한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모든 복음서가 공통적으로 이와 같이 증언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으로 예수님에 앞선 선구 격으로서 세례 요한의 존재와 역할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증언을 깊이 들여다보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꼭 동일한 방식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공관복음서들은 확실히 세례 요한을 예수님의 선구 격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역사적으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선구가 된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관계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29~34)에 그 이해가 드러나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말씀을 다시 환기해보겠습니다.
먼저 유대 사람들이 사람들(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보내어 세례 요한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유대 사람들’이란 요한복음서의 기자가, 예수님의 권위와 메시야로서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의 지도자들을 일컫는 전용적인 표현입니다. 이 표현의 배후에는 요한공동체가 유대전쟁 이후 유대교 회당으로부터 쫓겨난 경험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유대 사람들은 당연히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호의적일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와서 요한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요한은 그 물음에 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대답은 세례 요한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평가받았을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요한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고백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물음을 매우 무겁게 받아들였고, 분명하게 아니라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요? 엘리야요?” 이 물음은, 메시야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오리라는 구약 말라기의 예언을 환기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들은 세례 요한을 바로 그 엘리야로 보는 견해를 뚜렷하고 보이고 있습니다(마태 11:14; 17:12). 이 물음에 대해서도 요한은 단호하게 답합니다. “아니오.” 사람들이 또 다시 묻습니다. “당신은 그 예언자요?” 이 물음 역시 메시야가 오기 전 보냄 받은 예언자에 관한 구약의 예언을 환기합니다(마카베오상 4:46; 14:41). 이 물음에 대해서도 요한은 “아니오”라고 답합니다. 계속 이어지는 물음들에 대해 일관된 요한의 부정은, 그 자신이 유대교의 틀 안에서 이해되는 어떤 인물과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유대교적 관념으로 이해할 수 없는 요한과 예수의 관계에 관한 요한복음의 이해입니다.

그렇게 부정적인 답변이 이어지자 유대사람들은 답답한 듯이 다그쳐 묻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을 좀 해 주시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시오?” 이 물음에 이르러서야 요한은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고 말이오.” 지난 주일 우리가 함께 나눈 이사야 40장의 말씀을 환기하고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내내 구약성서의 예언을 환기하며 물음을 던졌을 부정적 답변을 하던 세례 요한은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구약성서의 한 대목을 환기하며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있습니다. 질문자나 답변자 모두 구약성서에 근거한 전이해를 바탕으로 묻고 답하지만, 그 성격은 전혀 다릅니다. 앞에서 물음들에 대해 부정적 답변을 한 것이 유대교적 틀 안에서 해명될 수 없는 자신의 존재를 밝히고 있다면, 이 대목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환기하고 있는 세례 요한의 답변은 당대 이른바 정통 유대교에서는 수용되지 않았던 다른 메시야상을 받아들였던 그리스도인 공동체, 요한 공동체의 성격을 반영합니다. 두 번째 이사야가 증언하고 있는 메시야상은 일관되게 수난의 종 메시야입니다. 이사야 40장은 그 예언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의 그 답변이 이어지자 이번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묻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사제들과 레위인들과는 구분되는 사람들이지만, 요한복음의 저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과 다르지 않은 한 통속, 다시 말해 ‘유대 사람들’의 한 부류로서 역시 유대교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면 어찌하여 세례를 주시오?” 유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아무런 공적인 권위의 근거도 갖지 않은 사람이 감히 공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에 세례 요한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비로소 분명하게 밝힙니다. 자신의 권위의 근거를 밝히는 셈입니다. 유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겠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의 편에서 볼 때 진정한 권위의 근거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이가 한 분 서 계시오. 그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만한 자격도 없소.”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한 답변입니다. 이 답변은 사실상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이 활동하고 있던 당시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지금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그분을 드러내기 위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말씀입니다.

자, 이 말씀 가운데 드러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사실 오늘 본문말씀만으로는 그 관계가 확실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습니다. 그저 세례 요한은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의 외치는 이의 소리’에 해당한다는 사실만 분명하게 드러나 있으며, 이어서 오실 그리스도께서 진짜 주인공이라는 사실만 드러나 있습니다. 그 관계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비로소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이튿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한 분이 오실 터인데,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시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다’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분을 두고 한 말입니다.나도 이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령은 이분 위에 머물렀습니다.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29~34)

여기서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일러 말하기를, ‘나보다 먼저 계시기에 나보다 앞선 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선재설(先在說)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있던 물로 세례를 베푼 것과 대비하여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배태한 요한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매우 의미심장한 선포입니다.

세례 요한 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는 것은, 요한복음의 서두를 환기함으로써 그 뜻을 새겨야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1:1). ...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이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과 똑같은 몸을 지니고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현신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 하는 이야기 자체도 놀랍지만, 요한복음이 말하는 이 말은 그보다 더 놀라운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라고 선언하지 않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라고 선포한 데 그 선포의 급진성이 있습니다.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언뜻 보기에는 놀라운 선언 같지만 사실은 그다지 놀라울 것이 없습니다.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발상은 사실 고대의 세계관 안에서 그다지 놀라울 것이 되지 못합니다. 고대 세계의 제왕들은 모두 신의 현신 또는 신의 아들로 추앙받았습니다. 그와 같은 상식적인 세계관 안에서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선언은 별로 충격적일 것이 없습니다. 그 의미가 제왕 같은 면모를 전혀 지니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를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놀라운 일이지만, 일단 그 말 자체로는 파격적인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말하고자 하는 뜻을 더욱 분명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이 말은 당대 사람들의 세계관을 전도시킨 선언이었습니다. 여기서 ‘말씀’은 ‘로고스’ 곧 진리를 뜻하며, ‘육신’은 ‘사르크스’ 곧 일반적인 ‘몸’의 의미를 지닌 ‘소마’와도 구별되어, ‘노예들의 몸’ 또는 ‘살덩어리’를 뜻합니다. 이원론적 세계관 안에서 로고스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영원한 진리를 뜻하며 사르크스는 썩어 사멸할 것으로 간주되는 현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로고스가 사르크스가 되었다는 선언은 당대 세계관에 비추어 볼 때 커다란 거리낌이며 비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이 그렇게 선언한 것은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인간의 자리로 내려 오셨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인간 사회 안에서 높은 자리에 오신 것이 아니라 보통의 인간들이 경멸하는 그 자리에까지 내려 오셨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자신을 비우고 고통받는 인간의 자리로 내려 오셨다는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과 똑 같은 몸을 지니고 삶을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가 구현되었다는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이 인식은 정말 급진적입니다. 이 인식은 당대 유대교와는 도무지 비교할 수도 없고, 당대 교회들에 비추어보더라도 급진적입니다. 초기 그리스도 교회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몸의 육화로 생각했습니다. 이 때 ‘몸’은 ‘소마’입니다. 여기서 ‘소마’는 최소한 성화 가능성이 있는 몸입니다. 반면에 ‘사르크스’는 그럴 가능성이 없는 몸입니다. 아예 바닥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아예 바닥의 사람들과 같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구현했다고 한 것입니다.
컨베이어벨트에 몸이 끼어 두 동강 난 노동자의 몸, 땅에서 외쳐도 들어주는 이 없어 높은 탑에 올라 외치는 노동자의 몸, 바로 그 몸으로 성육신하여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 몸에 눈길을 돌리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분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렇게 온전하게 ‘구현된 말씀’을 ‘선포하는 말씀’으로서 의의를 지닙니다.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요? 정작 바라봐야 할 것이 달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봐야 할 것이 휘영청 밝은 달이 아닙니다. 가장 비참한 인간 삶의 실상입니다. 그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해 선포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요한복음의 증언은 정말 놀랍습니다.
세례 요한은 ‘물로 베푸는 세례’와 ‘성령으로 베푸는 세례’의 차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물로 베푸는 세례가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종교의례로서 상징적이고 가시적인 행위에 해당한다면, 성령으로 베푸는 세례는 본질적이고 실질적인 변화를 뜻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일관된 논지에서 비춰볼 때 그것은 ‘사르크스가 된 로고스’와 분리해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서의 말씀을 맥락과 분리하여 자기 편한 대로 단편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비천한 사람의 몸이 된 그리스도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영과 통하는 분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의 것을 내세울 수 있는 일말의 어떤 것을 가진 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도 내세울 것이 없는 바닥의 상태에서 진정한 영성이 비롯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은, 기존의 질서 안에서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의존할 수 없는 존재의 밑바닥에서 진정한 위력을 드러낸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영성은 어떤 위대한 영성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비참한 사람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온다는 것을, 최소한 그들의 고통에 함께 하는 것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종교의례를 통해서,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가야 할 바를 깨닫고 결의를 다질 수 있습니다. 위대한 영성가의 도움으로 구원의 길을 안내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보고, 따라야 할 것은 가장 비천한 사람들의 사르크스가 된 예수 그리스도의 삶, 그 안에서 오히려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영혼의 자유입니다.
‘선포된 말씀’ 또는 ‘선포하는 말씀’으로서 세례 요한이 아니라, ‘구현된 말씀’ 또는 ‘실현하는 말씀’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는 것은 그렇게 놀라운 진실을 뜻합니다.
성탄을 앞둔 대림절 마지막 주일, 오늘 우리가 바로 그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는지 우리를 되돌아보고 결단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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