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내 안에 계신 하나님 - 요한복음 6:47~59[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3-31 13:51
조회
38690
2019년 3월 3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내 안에 계신 하나님
본문: 요한복음 6:47~59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면 난감해지지요? 그래도 그 난감해했던 경험으로 물음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기에, 감히 물음을 던집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신앙의 최고 경지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를 뿐 아니라 나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차원은 쉽게 상상을 합니다. 그리고 부단히 애를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셔 내가 마음먹은 것이 곧 하나님께서 마음먹은 것과 같아지는 차원은 감히 상상하지 못합니다.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애쓰는 것은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셔 내가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일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밖을 향한 요구에는 능하지만 스스로 옷매무시를 가다듬는 행위에는 미숙합니다. 밖에 계신 하나님께 청원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이미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모시는 데는 미숙합니다. 밖에 계신 하나님께 말을 건네는 것은 특정한 시공간, 바로 만나는 그 순간 옷깃을 여미는 것만으로도 됩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모시는 것은 늘 옷깃을 여미는 태도로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생명의 빵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이 말씀은 매우 일관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당신께서 생명의 빵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빵은 이러하니, 누구든지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49~51)
유대 사람들은 이 말씀이 무슨 말인지 알아먹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이라는 말뜻도 알아먹지 못했고, 자기 살을 먹으라고 내어 준다는 말뜻도 알아먹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수군거렸습니다. 그렇게 수군거리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선언하십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 때문에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 때문에 살 것이다.”(55~57)

오늘 미처 다 읽지 못하였지만, 60절 이하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마저도 그 말씀의 뜻을 알아먹지 못했다고 합니다. 제자들 가운데 일부가 수군거렸습니다.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60) 제자들은 그렇게 반응했습니다.
급기야는 제자들마저 슬금슬금 예수님 곁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열두 제자만이 남은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67)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의 상황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오천 명이 운집해 있던 상황에서 열두 명만 남았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육의 양식을 나눠줄 때는 오천 명이 와글거렸는데, 영의 양식을 받아먹으라고 하니까 다 내빼고 열두 명이 남았습니다.

도대체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이 정말 그렇게 어려웠을까요?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없어 그렇게 내빼고 말았을까요?
아닙니다. 결코 그 말씀의 뜻 자체가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이야기라는 건 다 맥락이 있는 법입니다. 그 맥락 안에서 웬만한 이야기는 다 알아먹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했을 때, 짐승을 잡아먹듯이 하라는 뜻이겠습니까? 그 살과 피를 먹을 때 갖은 양념 더해 그럴 듯하게 요리해서 먹으라는 뜻이겠습니까? 우리가 성만찬에 임할 때 우리는 무슨 맛있는 고기와 선지를 먹듯이 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옷깃을 여미며 그 뜻을 생각하면서 참여합니다. 물론 더러 성만찬을 아주 ‘맛있게’ 드는 분들도 있기는 합니다만...^^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는 것이 일종의 은유라는 것을, 꼭 대단한 학식이 있어야만 아는 것은 아닙니다. 자식이 보챌 때 엄마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어미를 팔아먹어라!’ 이 말이 ‘지금 돈 없다’ 하는 것을 뜻한다는 것은 웬만한 자식들은 다 압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삶을 체화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 때문에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은 나 때문에 살 것이다.” 이 말씀은 그 의미를 풀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체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그 말씀을 못 알아먹은 것은 지식의 결여나 이해력의 결여 때문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못 알아먹은 것은 삶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그 말씀을 알아먹지 못한 것입니다. 밖에 제시된 표지를 따라 가는 건 쉽지만, 안으로부터 나오는 깨달음을 얻기는 쉽지 않습니다. 율법을 따르기는 쉽지만 진정한 믿음의 결단은 쉽지 않습니다. 밖에서 누군가에게 구하기는 쉽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베풀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뭔가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쉽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은 도무지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나 밖의 누군가가 뭔가를 해 주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의 실상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또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는 생명이 없다.”(53) 당신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우리는 구원에 이르는 진실을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 이에 대해 요한복음의 말씀과 도마복음의 말씀 사이에 엄밀한 의미에서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 도마복음이 이미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깨달아 알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모셔 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것은, 그렇게 모셔 들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 삶을 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삶에 이르는 여정은 두 복음서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가 뜻하는 바가 뭘까요? 기본적으로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이해의 차이일 것입니다. 도마복음이 훨씬 급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인간 실존에 대한 좀 더 냉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할까요? 이 시간 그 차이가 갖는 의미를 깊이 따질 생각은 없습니다. 요한복음이 인간들이 처해 있는 실존적 정황을 좀 더 현실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만 확인하겠습니다.
요한복음은 ‘우리 가운데 다가오신 하나님을 모셔 들이고, 더불어 살아라’ 하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그렇게 선포하지 않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모신 삶을 직접 보여주신 그 분을 곧 하나님과 동일시하여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분을 받아들여 모시는 사람은 곧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이미 앞에서 강조하였듯이 그것은 그 분의 삶을 온전히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살과 피를 강조한 뜻을 우리는 잘 헤아려야 합니다. 그것은 이른바 가현설(假現說), 곧 예수님의 몸은 일종의 환상일 뿐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이 된 하나님은, 곧 살과 피를 가진 존재입니다. 요한복음은 그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역사 안에서, 사회적 관계 안에서 살아간 그 분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라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 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그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까요? 오늘날 신학에서는 역사적 예수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이해된 예수님 말고, 몸속에 따뜻한 피를 지니고 실제 사람들 가운데 사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을까 탐구하며 우리가 실제 삶에서 본을 삼아야 할 예수님의 모습을 재현해보려는 노력입니다. 의사이자 음악가요 또한 신학자였던 알버트 슈바이처는 초기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해 파산선고를 내렸습니다. 역사적 예수를 재현한다는 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역사적 예수는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
요지부동한 하나의 사실(fact)로서 역사적 예수를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의 평가대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는 결국 당대의 관념을 예수께 투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가 갖는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인간성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입니다. 하늘의 삶을 산 인간에 대한 탐구, 땅에서 하늘을 살고자 하는 인간에 대한 탐구입니다. 신성에 대해 대립되는 부정적 의미의 인간성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안에 모시고 산 사람의 모습을 찾아내려는 시도입니다. 우리가 닮고자 하는 인간, 그대로 따라 살고자 하는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삶을 기억하는 것은 그 분의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삶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냐고,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차라리 교리적으로 딱 정리해서,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고 가르쳐주는 것이 좋지 않냐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아마도 도그마에 대한 맹신을 조장하는 신앙이 일반화된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믿어서는 오늘 말씀이 전하는 진실에 다가설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답을 우회적으로 던지며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제가 국가인권위원회 혐오차별대응특별위원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만, 그 첫 모임(2/20) 때 한국사회의 여러 차별현상을 진단하는 자리에서 미얀마 출신 소모두씨가 던진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당연히 외국인노동자들이 겪는 차별현상을 생생하게 전했습니다. 우리가 대개 알 만한 내용들이었습니다. 그 증언 끝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고 물었을 때, “한국사회가 과연 어떤 사회가 되기를 원하느냐?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냐?” 스스로 되물어보기 바란다는 답을 던졌습니다. ‘꼭 이것만은 해주십시오.’라고 한 말보다 그 답이 훨씬 깊게 다가왔습니다. 차별과 배제가 만연한 살벌한 사회를 만들고 싶냐, 아니면 누구나 안전하고 편안한 사회를 만들고 싶냐 하는 물음을 던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그 뜻을 구현하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그 물음을 던져야 한다는 의미로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에 귀 기울고, 그 음성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먹고 진정한 삶을 누린다는 것은 그렇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진정으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는 삶을 누리는 우리들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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