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의 지혜, 삶에 대한 경외 - 잠언 8:22~36[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5-12 15:23
조회
98
2019년 5월 1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하나님의 지혜, 삶에 대한 경외
본문: 잠언 8:22~36



어버이 주일입니다. 그저 ‘효도해야 한다.’는 한마디의 교훈으로만 그 의미를 제한할 수 없고, 여러 의미를 더불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기회입니다. 부모님을 생각할 때 어떤 느낌부터 들까요? 애틋함, 안온함, 위로와 기쁨 등의 감정이 느껴질 수도 있고, 아니면 안타까움, 그리움, 사무침 등과 같은 감정이 솟구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열거한 것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여러 느낌과 생각이 있을 수 있지만,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생각할 때 지나칠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생명과 생명이 이어지는 그 연결망 가운데 있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자신의 존재의 근원에 대해 생각해봄직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저마다 인격을 지니고 있고, 그런 만큼 저마다 어떤 욕망과 의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연한 사실은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강조할 때, 우리는 그 인격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의 삶은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내가 몇 날 몇 시에 어디에서 태어난 것은 전혀 나의 의지나 선택과는 상관없습니다. 특히 아무개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은 전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습니다. 이 역시 엄연한 바로 그 사실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삶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부모에게 자식이 선물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식들에게 부모 역시 선물입니다.
삶이 선물이라는 진실이 삶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연의 산물이니 아무렇지 않게 대해도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요즘 선물이 타락하여 뇌물이 되고, 일상적 선물도 상업적으로 덧칠해져 그 의미가 퇴색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본래의 의미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선물은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연결하는 유대의 의미를 지니는 것인 만큼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표시이자 동시에 신뢰 또는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삶을 선물로 여기는 것은 나의 범위를 벗어나는 그 유대를 생각하는 것이며, 저마다의 삶을 존중하고, 나아가 외경하는 것을 뜻합니다.
저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고 고백하는 것은, 그 삶에 대한 외경을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최고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처럼 잠언의 본문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서두에서 꺼낸 부모자식간의 관계에 관한 교훈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지혜에 관한 교훈입니다. 굳이 말한다면, 우리가 어버이 주일을 맞아 새삼 생각해보는 삶에 대한 외경, 그 근원이 되는 지혜를 일깨워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처럼 잠언의 본문말씀을 읽게 된 만큼, 잠언이 함축하고 있는 지혜의 성격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욥기의 말씀은 비교적 자주 나눴던 만큼, 그 기회에 욥기의 지혜에 대비되는 잠언의 지혜의 성격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욥기가 전복적인 지혜를 말한다면, 잠언은 상식적인 지혜를 말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고 한 것을 기억하는지요?^^ 그러나 그 한 마디로 잠언의 지혜가 갖는 성격을 일축할 수는 없습니다.
우선 지혜서(잠언 전도서 욥기)가 갖는 성격을 재삼 확인하자면, 지혜서는 성서가 이스라엘 민족만의 고유한 유산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성서의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특별히 지혜서들은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바빌론) 문명의 유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점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책들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통찰한 지혜들이 응결되어 있는 성격을 지닌다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 보편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서는 그저 이전 문명에서 전수되어온 지혜를 수집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일종의 토착화라고 할까요? 오래 전부터 인류가 깨달아 전수해 온 지혜들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빛에서 철저하게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삶의 지혜, 그저 처세술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상식적 지혜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빛에서 재조명함으로써, 지혜의 근원을 캐묻게 한 데 성서 지혜서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성서의 신앙 세계 안에서 지혜를 추구하는 물음은 집요해서 끊임없이 그에 대한 사색이 이뤄졌습니다. 그만큼 지혜에 대한 통찰은 깊어졌습니다. 지혜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 계시의 중재자, 하나님이 몸소 피조세계에 주신 법칙,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에게 다가서는 ‘인격’, 마침내는 하나님 자신이 나타나신 형태가 되었습니다(잠 8:35). 줄여 말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롭게 되기 위한 출발점이라는 인식(잠 1:7)에서 점차 지혜를 깨우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인식(잠 2:4~6)으로 발전해갑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알면 똑똑해진다’는 인식에서 ‘똑똑해지면 하나님을 안다’는 인식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에 대한 통찰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서도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땅에 인격으로 구체화되었다는 믿음입니다. 예컨대 누가복음은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를 말하는 대목에서 결론 격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지혜의 자녀들이 결국 지혜가 옳다는 것을 드러냈다.”(눅 7:35) 사도 바울은 세상의 지혜와 대비되는 하나님의 지혜로서 그리스도를 역설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고전 1:27, 30)

오늘 본문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에 관한 깊은 사색의 여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이 어렵다고 해서 어떻게 하면 쉽게 전할 수 있을까 고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선포되고 기록된 말씀의 맥락을 지나치고 제가 하고 싶은 말만 할 수만은 없는 노릇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따라가며 새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앞의 대부분의 내용이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천지만물에 앞서 가장 먼저 태어난 지혜가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명장이 되어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거들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음미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지혜가 하나의 인격적 주체로서 스스로 선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 주체가 명장이 되어 천지를 창조하는 일을 거들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대하면서, 하나의 물리적 자연이 형성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과연 현명할까요? 이 묘사에는 오늘의 과학이 밝히고 있는 지구에 관한 상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창공을 매달았다’는 것이 그렇고, ‘땅의 기초를 세웠다’는 것도, ‘산의 기초가 생겼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가 그렇듯, 이 이야기는 천지만물의 생성과정을 묘사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천지만물의 이치 가운데서 깨달아야 할 하나님의 뜻, 그리고 그 뜻대로 살아야 할 인간의 삶의 태도를 일깨워주고자 하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천지만물의 이치가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낸다는 것, 그리고 그 지혜는 인간의 지혜에 감응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지혜가 하나님을 거들어 천지창조를 도왔다는 이야기는 천지만물의 운행 가운데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아 알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신약 시대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롬 1:20)
그 지혜가 인격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있고, 오늘 본문처럼 분명한 말씀선포의 주체로 등장하는 것은, 인간에게 다가오는 지혜의 성격을 말합니다. 그저 객관적인 자연의 법칙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의 성격, 인격적 존재 상호간에 감응되는 지혜의 성격을 말합니다. 사람 가운데 체현되는 지혜의 성격을 말합니다. 이미 앞서 말했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께서 곧 하나님의 지혜라고 믿지 않았습니까? 예수님뿐입니까?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가 꽃과 더불어 새와 더불어 대화를 나눴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결코 우스개 소리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어떤 역사적 사건을 마주하면서 ‘하늘을 보았다’고 고백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김재준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4.19는 암운을 뚫고 터진 눈부신 전광이었다. ... 그 윤리적 높은 행위가 일반의 양심에 자화상을 소출시켜주었다.” 박형규 목사님은 피흘리며 쓰러지는 학생들을 본 장면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그들에게서 나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예수의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었다.” 하나의 사건에서 역사의 나아갈 바를 읽어낸 혜안, 곧 지혜의 안목에서 나온 통찰입니다. 이 통찰에 이른 사람은 응답하고 결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말씀은 선포합니다. 지혜가 우리를 향하여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아, 이제 내 말을 들어라. 내 길을 따르는 사람이 복이 있다. 내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고, 그것을 무시하지 말아라. 날마다 나의 문을 지켜보며, 내 문설주 곁에 지키고 서서, 내 말을 듣는 사람은 복이 있다. 나를 얻는 사람은 생명을 얻고, 주께로부터 은총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놓치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해치는 사람이며,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잠 8:32~36)
스스로 인격적 주체가 된 지혜는 사람들에게 인격적 결단을 요구합니다. 이 말씀은, 마치 지혜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이 날이 새기도 전에 스승의 집 문 앞에서 기다리는 듯한 태도로 지혜를 갈망할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지혜를 깨우치는 것은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생명을 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지혜를 깨우치지 못한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의 생명을 해치는 것이며, 따라서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생명을 주는 그 지혜를 갈망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 지혜를 몸소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그 지혜는 세상을 지배하는 지혜와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요한 12:24)
나 혼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오만, 나만 옳고 타인은 모두 글렀다는 독선, 너는 죽고 나는 살아야겠다는 배타성은 삶의 연대성을 무시하는 무지의 소산일 뿐입니다. 한쪽의 동포들이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전쟁의 공포 가운데 있는데 그 상황을 타개하고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노력을 흠집 내고 정쟁의 빌미로 삼는 태도, 기껏 합의한 대로 적법한 절차를 통해 안건을 상정하는데도 자기이해 득실 때문에 완력으로 저지하는 정치적 태도 또한 죽음을 사랑하는 태도입니다. 저쪽에서 뭔가 쏴 올렸을 때는 이쪽에서 그보다 심한 일을 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헤아리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매도한다면,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자기만 옳다고 자기만 살겠다고 우기지만 결국 모두를 곤경에 처넣고 스스로 자멸하는 길일 뿐입니다.

우리 저마다의 삶은 진실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어진 고귀한 선물임을 우리는 재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언제나 나를 넘어선 자연의 이치, 세계의 이치, 역사의 이치를 일깨워줍니다. 그 지혜를 얻음으로써 진정한 생명을, 진정한 은총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