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리스도인, 자유인 - 사도행전 16:23~34 [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5-19 14:47
조회
9972
2019년 5월 19(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그리스도인, 자유인
본문: 사도행전 16:23~34



오늘 본문말씀은 사도 바울 일행이 빌립보의 감옥에 갇혔을 때 지진이 일어나 감옥 문이 열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에 관한 이야기에서 기적 이야기는 흔치 않은데, 이 이야기는 초자연적인 기적 사건을 전하고 있어서 좀 이례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성서에 숱하게 등장하는 기적 이야기를 대할 때마다 사람들은 논란을 벌입니다. 그 이야기가 과연 사실이냐 하는 논란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이야기를 두고도 논란이 제기됩니다. 빌립보에서 과연 그런 사건이 일어났느냐를 문제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주석가들은 사도행전에서 해석하기 가장 곤란한 본문 가운데 하나로 보았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지만, 그 기적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기적 이야기의 진의에 접근하는 데서 빗나가는 일입니다. 그 이야기가 전하는 진실이 무엇이냐, 그 이야기의 초점이 무엇이냐를 헤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기적 이야기가 전하는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요?

본문말씀을 다시 환기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의 감옥에 갇힙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자신들이 갇혀 있다는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때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터전이 흔들리고 문들이 열렸으며 죄수들의 수갑과 차꼬가 풀렸습니다. 잠에서 깨어 갑작스런 그 사태를 알아차린 간수는 틀림없이 죄수들이 다 탈옥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자결하려 합니다. 문책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순간 바울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몸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는 그대로 있소” 당신이 문책을 당해야 할 일이 없으니 절망하지 말라는 외침이었습니다. 그 극적인 사태를 경험하고 이방인 간수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대접을 합니다.

이 극적인 기적 사건의 진실은 바울과 실라의 자유함에 있습니다. 그들에게 감옥의 장벽은 처음부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감옥의 장벽 안에 갇힌 상태에서도 그들은 스스로의 행동에 제약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대로 아무런 거리낌없이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장벽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애초부터 장벽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감옥의 문이 열리고 자신들에게 채워진 수갑과 차꼬가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탈옥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증언해줍니다. 이미 없는 장벽이기에 그 장벽을 넘어서는 것도 새삼스러울 것 없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마음은, 그들의 믿음은 그 어떤 조건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감옥의 장벽은 사도의 일행을 불온하게 여기는 당국이 그어놓은 선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진실은, 물리적 차원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감옥문이 열렸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감옥문이 열려 있든 닫혀 있든 상관없이 사도 바울과 실라가 그리스도인으로 자유함을 누렸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이 기적 이야기의 진실입니다. 그 믿음 때문에 처음부터 그들에게 감옥문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장애물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의 이 이야기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전형화된 이야기입니다. 이방인 간수의 놀람 역시 당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일반인들의 경이감을 나타냅니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요?
우선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일반 사람들이 믿는 신과는 전혀 다른 신을 믿었고, 또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믿었습니다. 당시 일반 사람들이 믿는 신이 어떤 신들이었을까요? 쥬피터, 디아나, 이시스와 미트라 등입니다. 이 신들은 자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제물을 요구하였고, 제관들에게 돈을 기부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 신들은 마치 인간들처럼 자신들의 이해(利害)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랑을 펼치시고, 그 사랑을 통해 인간들 사이에서 사랑을 불러일으킨다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은 이방인들과는 전혀 다른 윤리관을 형성시켰습니다. 그 윤리관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이방인들, 곧 당시의 일반인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의 축제를 위하여 그 축제 비용을 징세 당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거리와 쓰레기장에 버려진 고아들을 먹여 살리는 공동기금에 자발적으로 기부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광산에서 강제노역을 하거나 섬에 유배된 사람들과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음식과 약을 주고 친구가 되었습니다. 죽어서도 무덤에 묻힐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죄수들에게는 자비로 관을 사서 매장을 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당시 지배체제의 당국자들에게는 불온한 것으로 여겨졌고, 일반 사람들에게는 경이로운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떤 지배체제는 그 체제 아래 있는 사람들이 군말없이 그 체제를 용인하고 순종할 때 지켜집니다. 로마의 국법을 따라야 하고, 그 체제를 뒷받침하는 세계관 곧 종교를 따라야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거슬렀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그 체제에 순응하는 것이 순리라고 믿고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그 체제가 요구하는 것과는 달리 자발적으로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자유롭게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에게 억압의 두려움은 없습니다. 그러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는 사도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히게 된 사연이 무엇인지 밝혀져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도시 빌립보에서 귀신이 들려 점을 치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여자 노예입니다. 그 여자 덕분에 그 주인들은 돈벌이를 톡톡히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여자에게서 귀신을 내쫓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주인들은 자기들의 돈벌이 희망이 사라진 것에 분격해서 바울 일행을 고발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 일행이 감옥에 갇힌 사연입니다.
사도 바울의 일행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을 자유롭게 해줬습니다. 귀신에 붙들린 상태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게 해 준 것입니다. 이 일을 보고 격분한 것은 그 여인이 아닙니다. 그 여자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주인들입니다. 사람들을 자신들의 종으로, 죄인으로 얽어매놓아야 자신들의 욕망과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여인에게 자유를 선사한 바울의 행위는 그들에게 당연히 체제를 교란시키는 불온한 행위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자신들을 불온하게 보는 시선과 그 시선에 따른 체제와 감옥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귀신에 붙들린 사람에게 자유를 선사하고, 바로 그 일 때문에 감옥에 갇혔으나 그 상황에 아랑곳없이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선사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다른 이름은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5.18 광주항쟁 39주년을 맞이했습니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부르짖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의 폭력에 희생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사건은 우리 현대사에서 또 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상처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숭고한 희생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큰 걸음으로 도약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한국의 민주주의는, 무시무시한 총칼 앞에서도 굴종하지 않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쳤던 사람들, 총칼 앞에 스러진 이들을 내 몸 돌보듯 보살피며 함께 했던 이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의 기초 위에 있습니다.
물론 한국 민주주의 여정에 광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간 하나하나 거듭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숱한 저항의 역사와 사건들이 있었고, 그 사건을 일으킨 주역들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1960년대 이후 그 여정에서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다시 음미하면서 내내 떠오르는 선각자들이 있었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아마도 한국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평화 통일을 위해 헌신한 그리스도인 선각자 가운데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분은 문익환 목사님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서 교회를 각성시키고 젊은이들을 일깨우고, 가난한 민중들의 현장에 다가가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역할에 헌신을 다한 분 가운데 한 분이 박형규 목사님입니다. ‘한국의 본회퍼’ 또는 ‘한국의 니묄러’로 기억되기도 합니다만, 그 분의 삶을 기억하는 모든 분들의 기억에서 공통되는 것은 ‘진정한 자유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박형규 목사님은 1973년 남산부활절연합예배에서 당시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돌린 사건으로 내란예비음모라는 죄명으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사실 그 사건은 계획한 것과 달리 미수에 그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당국은 박 목사님께서 가난한 민중들의 현장에 함께 하며 젊은이들을 그 현장으로 이끌고 있는 것을 볼온시하여 족쇄를 채우고자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사건은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운동의 출발점이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박형규 목사님은 그 사건 이래 갖가지 죄목으로 다섯 번 이상을 감옥에 갇히면서도 불의한 권력에 굴하지 않고 이 땅의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교회와 신앙을 지켰습니다. 불의한 권력이 갖가지 방법으로 굴복시키려 해도 안 되니까 결국에는 교회내분을 가장하여 박형규 목사님을 괴롭히고 교회를 와해시키려 했지만, 오히려 ‘지붕과 기둥이 없는 세상에서 제일 큰 교회로’ 서울 중부경찰서 앞 길거리에서 7년의 성상을 지나는 동안 교회와 신앙을 지키기도 했습니다. 그 때의 여정은 <폭력을 이기는 자유의 행진>이라는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분은 감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교회를 맡고 있으니 풀어달라고 기도한 적도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대로 들어주시지 않고 당신 방식대로 이끌어주셨다고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 그곳이 꼭 견디기 어려운 곳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함께 갇혀 있는 젊은이들에 이렇게 격려했다고 합니다. “나가면 더 좋고, 못 나가도 좋고...” 불의한 권력이 그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가두면 가둘수록 저항은 거세게 일었고, 갇힌 사람들은 오히려 감옥에서 휴식과 더불어 더 깊은 공부와 성찰의 시간을 누릴 수 있으니 나쁠 것 없는 셈이었습니다.^^
박형규 목사님은 불의한 권력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절대 명령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마음 속에서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웃에 대한 사랑은 자유가 보장되지 않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사랑도 할 수 없습니다. 자유가 없는 곳에 기독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질그릇>, 13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 곧 사랑을 펼치는 것은 자유와 함께 주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역설은, 그 진실을 믿는 이에게 자유를 억압하는 그 어떤 조건도 그가 누리고자 하는 자유 그 자체를 억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재삼 말하건대, 그리스도인의 다른 이름은 곧 자유인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진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자유함에서, 숱한 신앙의 선각자들의 자유함에서 우리는 그 진실을 재삼 깨닫습니다.
‘자유○○당’의 그 오염된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를 갈망하고 불의한 권력에 저항한 사람들을 ‘폭도’로 ‘괴물’로 ‘광수’로 모는 자유와 결코 같은 것일 수 없습니다. 진정한 내면의 자유, 우리를 속박하는 모든 것을 떨쳐내고자 하는 행동의 자유, 그러기에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사랑을 나누는 그 자유를 실현하는 데 그리스도인의 존재 의의가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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